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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시/곽은영/그린란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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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은영
그린란드 외 1편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상어는 바다 마녀를 찾아가서 말했지 우린 너무 빨리 죽어요 오래오래 살아 바다 끝까지 가보고 싶어요 미끌미끌 바다 마녀는 말린 해마를 단지에 툭툭 이 철없는 상어야 마녀는 오래 전 죽은 딸이 생각났지 모험이 좋아 뱃사람을 따라 갔으나 해초 같은 머리칼 나풀거린 채 푸르게 굳어 바다 집에 돌아온 어린 딸 마녀는 충고를 하지 않아 마녀가 충고를 할 때는 들어야 해 상어는 간절하게 졸랐어 제발 오래 살게 해 주세요 넌 눈이 투명하고 예쁘구나 내게 그 투명함을 다오 눈알을 준다는 건 무슨 말일까 상어는 두려웠지만 끄덕끄덕 바다 마녀는 무표정하게 물약을 하나 주었지 꼴깍꼴깍 뭘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잖아 상어는 크고 동그란 눈을 깜빡였어 그때 조그맣고 파란 벌레가 상어의 눈에 닻을 내렸지 조그만 벌레에게 커다란 상어의 눈은 황홀한 섬 벌레는 매일 매일 상어의 눈알을 파먹었어 상어는 눈을 잃어버려서 빨리 헤엄치지도 못했지 장님이 된 상어는 으드득 이를 갈았지만 거래는 끝났어 벌레가 포동포동해지니 크고 싱싱한 물고기들이 다가왔지 덕분에 상어는 굶지는 않았어 상어는 눈을 잃어버려서 높이 올라가지도 못해 바다 에서 200년 살자 턱뼈가 무시무시하게 커졌지 곰도 씹을 수 있을 만큼 오래오래 살다가 죽은 상어의 이빨은 바다 마녀의 약병 속에 침몰한 배처럼 고요히 가라앉아 있어 약병은 아주 투명하고 예뻐
초콜릿
―이 저질 초콜릿을 만드는 놈아 뚱뚱한 요리사와 홀쭉한 요리사가 주걱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사방으로 까만 곤죽이 튀었다
잘 익은 카카오 열매를 흔들면 통통통 롱롱롱 뚱뚱한 요리사와 홀쭉한 요리사는 사이좋게 세상에 없던 초콜릿을 만들어냈지 쌉싸름함과 달콤함이 지그재그 풍부하게 퍼져나가 마지막 조각이 혀끝에서 터지면 머리끝까지 포옥 안기고픈 여운이 덮쳐왔어 완벽한 초콜릿 관습대로 누구의 이름을 따서 초콜릿을 부를까 초콜릿을 닮은 여인이 신붓감일 만큼 초콜릿을 사랑했지만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지 뚱뚱한 요리사가 하얀 왕에게 홀쭉한 요리사는 까만 왕에게 초콜릿을 바쳤어 왕들은 한 조각 먹자마자 홀딱 반해버렸지 이 초콜릿은 내 이름을 따서 불러야 한다 왕들은 각자 그렇게 선언했어 정복지의 카카오는 딴 나라로 못 간다 어림없는 일 바닷길을 막겠다 푸르고 붉고 노랗게 익은 카카오 열매는 주렁주렁 원숭이가 신났어 붉으락푸르락 왕들의 최후통첩 전쟁 전쟁 전쟁 카카오 일꾼들은 더 가난해졌고 팔과 다리가 없어진 군인들이 속속 돌아왔지 젠장 초콜릿이 뭐란 말인가 젊은 과부와 늙은 부모의 눈물들 뚱뚱한 요리사와 홀쭉한 요리사는 괴로웠어 홀쭉한 요리사는 어느 밤 몰래 뚱뚱한 요리사에게 갔지 이 저질 초콜릿을 만드는 놈아 둘은 주걱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어 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어 넌 초콜릿을 모독했어 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어 넌 초콜릿을 배신했어 둘은 반죽을 휘젓던 힘으로 서로의 코를 정통으로 날렸지 부은 눈두덩은 멍으로 범벅 주방은 초콜릿으로 범벅 초콜릿 향기가 모락모락 온 집을 포근하게 쓰다듬었어 초콜릿 초콜릿 우리가 사랑한 건 초콜릿이야 그냥 떠나자 나도 레시피를 숨겨놨지 둘이 다시 손을 잡자 마당의 밝은 달빛이 중얼거렸지 초콜릿을 닮은 여인들을 찾아가렴 곤죽들 위로 새 발자국만 남기고 요리사들이 사라져버리자 왕들도 전쟁을 멈추었어 그들은 유례없는 전쟁에 자신들의 이름이 붙을까봐 서둘러 선물을 쏟아냈지 광장의 사람들은 초콜릿이 돌아왔다 카카오 모자를 쓰고 조롱하는 광대의 공연을 즐겼어 잘 익은 카카오 열매를 흔들면 통통통 롱롱롱 맑은 북소리가 나
곽은영∙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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