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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시/양수덕/전도사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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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덕
전도사들 외 1편
하얀 왕관을 쓰는 상상을 하다가 휘청
겨울바람 앞에서 어금니를 무는데
함박눈이 팔짱을 끼네요
그는 나의 든든한 왼팔이 되어요
나의 빈자리를 금방 알아챈 그이와 걸어요
서울 발 북녘 발 중동 발……
지구의 커다란 돔 지붕 아래 함박눈이
눈 화장의 검은 얼룩으로 번지고 있어요
외치는 소리 들려요 삿대질이 어지러워요 쌈질도 대단해요
바람은 어긋난 궤도를 타느라 요란하구요
편 가르기가 시작되네요
눈깔사탕을 아껴 아껴 녹여먹던 어린 날
함박눈은 하늘 발
혓바닥을 내밀어 하늘을 받았지요
그런 줄 잊었어요
우리 모두 따뜻하고 여린 눈의 피를 수혈 받았다는 걸
눈이 눈을 불러내요
지구의 돔 지붕 아래 우리가 나눈 하얀 피로 구약처럼 살다
여기까지 온 옛 당신을 찾아 헤매요
함박눈의 다리가 길게 길게 늘어나 거기까지 도착했나요 아닌가요
나의 왼 팔은 곧 녹을 테지요
금 의자가 빛나는 빈자리에 누가 앉나요
하얀 왕관을 쓴 비둘기는 언제 오나요
남는 장사도 아닌 것이
비즈니스를 하듯 내일을 말해요
말하기 전에 꼭꼭 씹어보아요
즐겨요 오래 씹을수록 단 맛이 들큼해지는 걸
유리 가면을 쓰고 말았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요
가장 가깝고도 먼 내일에게
반은 찌그러진 햄릿, 반은 한숨의 캘커타인 얼굴 들키고 말았어요
어제의 습기 범람한 밀실은
오늘의 넋 나간 비
오늘의 끝이 뻔한 단답형 기분은
내일의 내일의…… 아니 내일이 없다면요
한 순간씩 지구는 지워져요 식어버려요
우리의 찬 손이 안녕이라고 흔들어줄 틈도 없이
40초에 한 명씩
일 년이면 백만 명의 내일을 잃은 이들이 스스로 지구를 떠나요
그럴 때마다 지구는 우그러지곤
다시 공갈빵처럼 부푸는 법을 알아요
무얼 먹을까 저녁거리를 떠올리듯 내일이라는 말이 가벼워지는 때도 있어요
순해진 입은 초록빛으로 벌고
통로의 채비를 갖추고 불려가요
가장 가깝고도 먼 내일이라는 거래처에게요
내 혓바닥도 모르게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나는 아침에는
비즈니스를 하듯 내일을 말해요
체하지 않으려 말하기 전에 꼭꼭 씹어 단물부터 물들여요
양수덕∙2009 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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