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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시/유병록/다른 곳에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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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록
다른 곳에서 외 1편
대문이 사라졌다
놀라지 않는다 대문이란 종종 사라지곤 하니까
그리고 집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태연한 이 공터에서
내가 산 적이 있긴 한 걸까
다른 곳에서
집이 사라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유리창에 매달린 불빛도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던 권태도 냉장고에 넣어둔 배고픔도 모두 사라졌는데
눈이란 믿을 게 못 되지
이 근처에 대문이 서 있을 거야 저 높이에 창문이 열려 있을 거야 그 위에 붉은 지붕이 매달려 있을 거야
희망은 얼마나 빨리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는지
다시 집을 짓고 그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밥을 짓고 여기가 몇 번째 집인지 묻지 않고
살아갈 뿐이다
어제는 무덤이었고 오늘은 집이었으며
곧
다시 무덤이 될 이곳에서
문 너머에
희미한 윤곽으로 남은
자상刺傷은
안으로 잠긴 문
저 문을 열고 들어간 자가 있다 비좁은 방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가 있다 두드려도 대답 없는 문 너머에서
그는 아직도 악몽을 꾸다 깨어날까 아직도 빈방에서 홀로 비명을 지르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곤 할까
귀를 갖다 대면 들리는 숨소리
좀 더 견고한 문이 필요해 더 캄캄해지면 잠들지 않고서도 간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야……
그가 찾아왔을 때
나는 조그만 구덩이 하나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나만이 유일한 매장지였으므로
자상의 흔적은
그를 들여보내고 나서 밖에서 잠근 문
저 문 너머에는
어둡고 비좁은 방이 있다
무덤처럼
그 흔한 창문 하나 없이
유병록∙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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