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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시/신종승/어느 간이역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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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승
어느 간이역 외 1편
무궁화호를 기다리는데
KTX 열차가 미끄러지며 들어오더니
거침없이 지나쳐간다
통과역인 이곳,
좀 쌩둥한 마음이 바람 일듯 인다
왜 이리 차가울까
오늘은 그래도 조금 속도를 줄이면서
슬쩍 눈인사 건네는 것도 같았지만
지나치는 옆모습과 뒷모습을 보니
콧날 뾰족하니 세운 맵찬 얼굴 그대로다
간이역까지도 지나치지 않고 꼭 들러서는
손 꺼칠한 사람들의 손 덥석 잡고는
잠시나마 너스레 떨기도 하고
이것저것 허드레것 죄다 걷어 싣고는
손 흔들며 주섬주섬 떠나가는
너털너털 웃음이 명품인 완행열차
그 열차에 몸을 싣고 어느 간이역에라도
다다르고 싶은 오늘이다
대합실이 거실 같은,
나와 나
―내가 나를 지우기 하다
최신형 스마트폰으로 나를 찍는다
나를 내가 찍는다
한 차례 나를 찍고는
내가 나를 들여다본다, 검사하듯
이리저리 빛 잃고 탄력 잃은 얼굴
처진 눈 꼬리 입 꼬리가 억지 표정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라고 하며
이게 누구야,
왜 이렇게 된 거야,
기분이 나빠 당장 나를 지우기하고는
내가 나를 다시 찍는다
찍었다 지우고 지웠다 찍고 해보지만
나는 흔쾌하게 나에게로 달려 나오지 않는다
언제 보았는지 갈풀 같이 희뿌연 이가 나타나
실물보다 더 잘 나온 거 아니냐고 피식 웃는다
진정 어디로 멀리 간 건가, 푸르른 나!
안되겠다 싶어 여러 장을 한꺼번에 찍는다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바꾸어 가며
이쪽저쪽 각도도 달리 해가며
그리고는 한 장 한 장 제쳐가며 나를 찾는다
나와, 나!
세월은 흘렀어도 여전히 푸르른 내 마음
끝내 최신형 스마트폰의 성능을 탓하며
불만 탱탱한 기분을 내동댕이쳐버린다
최신형이란 게 얼굴 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다니,
신종승
2012년 ≪애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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