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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기획/‘대밭’ 시인 이광웅/고인환|‘목숨을 걸고’-이광웅 시인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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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5,181회 작성일 13-10-0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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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기획/‘대밭’ 시인 이광웅

고인환

|‘목숨을 걸고’-이광웅 시인의 작품세계

 

 

이광웅의 시를 되새기는 이 순간, 마음이 무겁다. 그가 남긴 시를 이제야 눈여겨보게 되었다는 때늦은 후회와 더불어, ‘목숨을 걸고’ ‘진짜’로 살아가려 한 시인의 순정한 마음이 ‘지금 여기’의 경박한 현실을 되짚어보게 하기 때문이다.

먼저, ‘산 같은 침묵을 깨뜨리고’(「햇빛의 말씀」) ‘슬픔의 바다’에 뛰노는 ‘빛(새)’의 언어(「사회 참관」)를 길어 올린 이광웅 시의 저수지를 엿보기로 하자. 「대밭」은 이광웅 시의 원형질이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경쾌하고 감칠맛 나는 언어의 질감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서 꿈틀거린다.

 

대밭에 살가지 쪽제비 시글시글 댓가지를 분질러놓으며 댓잎사귀 짓이겨놓으며 바스락 소리 밤새 끊어지지 않는 밤이 깊었다. 새암 두덕에 두룸박 소리 긁히고 부딪히고 쌀 씻는 소리랑 큰동세 작은동세 주고받는 목소리 뒤세뒤세할 때까지 한쪽 귀퉁이 이불귀를 끌어 잡아당겨가며 대밭을 떠내밀며 잠을 설쳤다.

 

사랑채에서 울려오는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무섭고 선보러 오는 사람네의 수다스런 언변 뒤에 감추어 둔 비밀스런 험상들이 무서워서 얼굴에 껌정을 칠하고 대밭을 빠져나가 북산으로 달려나간 큰고모의 안부가 걱정돼서 할머니는 새벽부터 물레질이 잦았다. 새떼가 지나며는 실자새의 윙윙 소리는 퍼지고 퍼져서는 장지문을 다 흔든 후에 벽장문을 다 흔든 후에 부엌에까지 들어가서 새로 회삼물한 부뚜막을 흔들었다.

 

용수를 박고 막 떠온 전내기를 좋아하는 만주 아저씨가 오는 날은 우리 동네에는 있지도 않은 유태인 무서운 이야기는 끓는 라디오의 군부대신 연설처럼 열기가 올라오고 멀고 먼 옛날 절의사진絶意仕進에 잠적불출潛跡不出하셨다는 할아버지네 할아버지네 지하수처럼 흘러간 애사에 가슴 아파하는 날은 밀밥을 먹으면서 타국 가서 왼 식구가 세한에도 이불 없이 웅숭거리고 뼈 마디마디 곱았다는 사랑방에 들어 어느새이 괭이처럼 코를 고는 오직 아저씨를 위하여서 어머니는 나를 불러 대밭에 가서 술국 끓일 명아주 잎을 따게 했다. 지는 햇빛 속에 바람 소리 속에 섞여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대밭은 나의 상아탑이었다.

 

해방 직후 팔봉 지서장을 살은 육촌 재종형이 인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남쪽 어딘가로 도망치던 구름 낀 밤이 있었고 해방되기 전부터 공산당을 해온 오상리 아저씨가 수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북쪽 어딘가로 도망치던 추적추적 비 내리던 밤.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고 말짱허니 갠 하늘이 되어 눈부시게 해가 빛났다. 땅거미 진 저녁이 내리면 어느새이 대밭에 자러 들온 참새떼가 짹재르짹재그르 떨어지는 햇빛 받고 시냇물 흐르듯이 끝없이 울어대고 까막까치가 또 끝없이 짖어대고 볼먹은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보태어 자동차의 이 소란은 극한 대낮의 홍수만큼 시끄러운 것이었다. 지금은 없는 그 새 나라의 대밭이 그립다‘

―「대밭」 전문

 

‘대밭’에 얽힌 유년 시절의 추억이 ‘시냇물 흐르듯이’ ‘뒤세뒤세’한 어조로 되살아나고 있는 작품이다. ‘할아버지/할머니’로 대변되는 공동체적 삶의 애환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분단으로 이어지는 우리 근 · 현대사의 현장이 ‘대밭’을 매개로 한 소리들의 웅성거림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시인이 길어 올린 토속적이고 순박한 언어의 향연이 훈훈하면서도 애틋하다. 민족사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향토적 언어의 정수라 할 만하다.

‘대밭’에서 시작된 자연의 소리가 ‘새암’, ‘장지문’, ‘벽장문’, ‘부뚜막’을 거쳐 ‘잠을 설’치며 뒤척이는 어린 시인의 귀에 전해지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 ‘살가지 쪽제비’가 내는 ‘바스락소리’가 ‘두룸박’ ‘긁히고 부딪’치는 ‘쌀 씻는 소리’, ‘큰동세 작은동세 주고받는 목소리’와 ‘뒤세뒤세’하게 얽히며 다가온다. 여기에 시인은 ‘선보러’ 온 ‘사람네’의 ‘비밀스런 험상들이 무서워’ ‘얼굴에 껌정을 칠하고 대밭’으로 달아난 ‘큰고모’의 이야기를 겹쳐놓는다. ‘대밭’을 지나가는 ‘실자새의 윙윙 소리’가 ‘큰고모의 안부’를 걱정하며 ‘새벽부터 물레질’이 잦은 ‘할머니’의 마음에 스며드는 순간이다. ‘자연’과 ‘삶’이 ‘대밭’의 소리를 매개로 애틋하게 소통하는 장면이다.

‘타국’을 떠돌다가 ‘사랑방에 들어 괭이처럼 코를 고는’ ‘만주 아저씨’의 고단한 삶과 ‘지하수처럼 흘러간 애사에 가슴 아파하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지는 햇빛’, ‘바람 소리’로 쓰다듬는 ‘대밭’의 언어는 또 어떠한가. 나아가 ‘대밭’은 ‘해방 직후’의 이념 대립을 증언하는 역사의 현장으로 몸을 바꾼다. ‘팔봉 지서장’을 지낸 육촌 재종형’은 ‘인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남쪽 어딘가로 도망’쳤고, ‘공산당을 해온 오상리 아저씨’는 ‘수복 때 대밭을 빠져나가 북쪽 어딘가로’ 달아났다. 하지만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부시게’ 해가 빛나고, ‘참새떼’, ‘까막까치’ ‘부엉이’ 등의 울음소리가 끝없이 이어지며 ‘대밭’을 장악한다.

이렇듯, ‘대밭’의 언어는 민족사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서정의 결을 풍성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민족적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구체적 언어를 통해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어느 순간 시인의 시에서 ‘대밭’의 언어가 사라졌다. 시인은 ‘대밭’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아니, 버렸다.

 

요새

나는

밤에

간음의 꿈을 만난다.

 

(중략)

 

무엇 때문일까.

생업이 떨어져나가서 그럴까.

집이 없어 그럴까.

대낮에도 악몽같이

압박해오는 것이 있고

천식을 앓는 것같이

숨이 차는 나의 생활

 

천식 같은 밤의 휴식시간에 손가락 사이 부서지는 꿈의 분말을

입김 불어 날리어도

이부자리 무거운 밤.

요새

나는

밤에

흥건히 땀에 적시이고

지저분한

간음의

꿈을 만난다

―「꿈」 부분

 

‘대밭을 떠내밀며 잠을 설’치던 풍요로운 유년의 풍경이 ‘지저분한/간음의 꿈’을 견디는 앙상한 중년의 모습으로 몸을 바꾼다. 그 사이 이른바 ‘오송회 사건’이 가로놓여 있다. 치욕스런 역사의 해프닝(아이러니)이 한 시인의 삶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1982년 월북 시인의 작품을 읽었다는 이유로 전 · 현직 교사 9명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20여일의 모진 고문 끝에 ‘교사간첩단’으로 둔갑되었다. 주동인물로 지목된 이광웅 시인은 7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다가 1987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시인은 4년 8개월의 감옥 생활을 통해 삶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후 1988년 복직되었으나 이듬해 전교조에 가입하면서 다시 교단에서 밀려난다. 그는 고문과 투옥 후유증으로 1992년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시인은 20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명예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렇듯 진실은 늘 한 발자국 더디게 온다.

‘인생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하는 ‘새 나라’의 ‘상아탑’이자 그리운 시의 텃밭이었던 ‘대밭’의 소리는 ‘퇴락한 고가나/천연색의 아름다운/강과 들에 펼쳐지는/지저분한 간음의 꿈’으로 변주된다. 이른바 유년의 상실이자 꿈의 훼손이다. ‘악몽같이/압박해오는’ ‘천식을 앓는 것같이/숨이 차는’ 생활의 현장에서 ‘손가락 사이’로 ‘부서지는 꿈의 분말’을 앞에 두고 시인은 어찌할 바 몰라 바르르 떨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간음의 꿈’마저 쓰다듬으며 다시 일어선다.

 

시대 속에서 어제의 편력은

떨어져나간 별일 뿐

밤 가운데 사라진 별똥별일 뿐.

 

해질녘의 내가 쉼터를 구하지 못하여

낯선 광야, 낯선 밤을 무겁고 고단한 잠 벗지 못하고

아무 데나 쓰러진 후

잇대어 만나게 되는 것

항행하는 유령의 배와

피냄새 나는 우리 역사

노다가 현장에

함바집 식탁

맛있는 국밥.

―「함바집 식탁」 부분

 

고통스런 과거를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투영되어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무겁고 고단한 잠’ 벗어버릴 ‘쉼터를 구하지 못하’고 ‘낯선 광야, 낯선 밤’ ‘아무 데나’ 쓰러진다. 이 ‘이슬 젖은’ ‘잠자리’에서 시인은 ‘항행하는 유령의 배와/피냄새 나는’ 우리의 ‘역사’를 대면한다. 이 ‘빈터’에는 ‘그리운’ 유년의 ‘물결’이 ‘너울’거리기도 하고, 고통스런 ‘어제의 편력’이 출렁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 과거의 기억에 안주하거나 몰입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 그 자체는 ‘밤 가운데’ 사라지는 ‘별똥별’일 뿐이다. ‘살찐 송아지’의 ‘닳아지는 목숨’을 통해 ‘회생의 기름방울’을 채워주신 선조들처럼, 시인은 자신의 삶(언어, 기억)을 통해 우리 역사의 현장을 정화시키고자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맛있는 국밥’으로 승화시키는 시적 연금술이 애틋하다. ‘노가다 현장/함바집 식탁’에는 ‘항행하는 유령의 배와/피냄새 나는 우리 역사’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따뜻한 봄날(「햇빛의 말씀」)’에 대한 희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맛있는 국밥’은 과거의 기억 혹은 역사를 고통스러운 현재적 삶의 자양분으로 끌어안으려는 의지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하여, 그는 ‘노가다 현장’ ‘함바집 식탁’에 올라온 ‘맛있는 국밥’과 같이 소박하고 투명한 언어를 꿈꾼다.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생기는 것은 없고

그저 남 좋은 일만 하다가

병들고 죽어가는-

인정 넘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 부비며 모여 사는 동네이라서

그 이름도 어여쁜

우리의

달동네 꽃동네.

―「달동네 꽃동네」 전문

 

시인의 언어가 소외된 서민들의 삶과 만나 아름답게 피어나는 장면이다. 모순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살 부비며 모여 사는’ 삶에 대한 동경이 공명共鳴하며 ‘달동네 산동네’의 너울로 출렁인다.

이 출렁임은 ‘얼어붙은 오늘 이 죽음의 땅’에서 ‘새봄을 구가할 꽃들의 합창’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봄맞이 서두르는 새들의 궁리’를 이처럼 소박하게, 이처럼 절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철창을 통해서 흘러 든 햇빛

얼어 곱은 두 손에 받아 든 햇빛.

그 햇빛 내게 건네는 말씀

-따뜻한 봄날이 머지 않으리.

 

얼어붙은 오늘 이 죽음의 땅에

봄맞이 서두르는 새들의 궁리……

산 같은 침묵을 깨뜨리고

새봄을 구가할 꽃들의 합창……

―「햇빛의 말씀」 전문

 

‘철창을 통해서 흘러 든 햇빛’을 ‘얼어 곱은 두 손에 받아 든’ ‘맛있는 국밥’의 언어. 시인은 이 ‘진짜’ 언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아갔다. 이윽고 삶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는 ‘진짜 시/삶’의 한 풍경이 솟아난다.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전문

 

하여, 이광웅 시인에게 시는 ‘결코/말도/말의 예술도/아니다.’ 그에게 시는 ‘역사의 토양에 깊이 뿌리 내리고/미래의 하늘에 주렁주렁 열매 맺는’ ‘숨결/맥박/따순 손길/말없는 바라봄/뜨건 뺨부빔’(「시」) 그 자체이다.

‘설운 눈빛이 눈에 걸리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슬픔의 바다’(「사회 참관」)를 건너느라 마음껏 누리지 못한 ‘수선화 피인 갠’, 그 ‘영원’의 날을 오랫동안 기억하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맺는다.

 

내 생애에서의 영원이란

그 해 봄

내게 머나먼 압록의 강물같이나 바라뵈던 복직이

명절같이나 찾아와

떠나야 했던 교직에 또 몸담아 살면서

귀여운 소년 소녀들에게 평화로이 우리 국어를 가르키던

그 학교

그 교정

그 화단 가운데

수선화 피인

갠 날이다.

 

수선화같이

혀끝으로 봄을 핥으려는

꼭이나 수선화의 생리를 지니인 사람을 흠모하기 비롯한

그 해 봄

그 갠 날이다.

내 생애에서의 영원이란

달리 마련이나 있을 것이 아니어서…….

 

빈 운동장 끝

그 해 봄

바람 많아 섧게도 꽃대 흔들려쌓는

한결 감옥에서 그리울, 한결 지옥에서 새로울…….

 

수선화 피인 갠 날이다.

―「수선화」전문

 

 

고인환∙2001년 <중앙일보> 평론 등단. 저서 <결핍, 글쓰기의 기원>, <말의 매혹: 일상의 빛을 찾다>, <공감과 곤혹 사이>, <한국 근대문학의 주름> 등이 있음, 젊은평론가상 수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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