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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기획/‘대밭’ 시인 이광웅/강인섭/순한 양처럼 살다 간 이광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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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기획/‘대밭’ 시인 이광웅
강인섭
순한 양처럼 살다 간 이광웅 시인
시인 이광웅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내 기억 속에는 생전의 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독일 시인 슐러가 말한 대로 미래는 주춤주춤 다가오고 현재는 쏜살같이 흘러가며 과거는 언제나 그대로 서 있기 때문일까?
내가 이광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전북 이리시(지금의 익산시)에 있는 남성중고교시절이었다. 나의 4년 후배였던 그는 공부 잘 하는 학생으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그 무렵 신설된 교내 문학상인 남성문학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두각을 나타냈다. 어느날 학교 문예반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갸름한 얼굴에 맑은 눈을 가진 앳된 인상이었다. 외모뿐 아니라 자주 만날수록 마음씨가 곱고 착해서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내가 살고 있던 이리시 교외 마동의 대나무밭이 있는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의 형과 누이 역시 내 친구이어서 동생처럼 친근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 무렵 남성중고교에는 시조시인 장순하 선생의 지도 아래 허세욱(작고), 김연태, 김진악, 김규식(작고), 백도기, 정양, 최창학 등 훗날 문단에서 시와 소설 등으로 활약한 문학청년들이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광웅은 많은 후배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나를 형처럼 따랐고 헌책방 같은 데에서 진귀한 책을 구하면 먼저 내게 보여주곤 했었다. 비교적 말수가 적은데다 해맑은 얼굴에 천진한 웃음만 짓고 있던 그와 함께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잊기 일쑤였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이리시내 헌책방이나 장거리에는 간간히 피난민의 이삿짐 속에서 귀한 책들이 섞여 나왔다. 그 중에는 이태준, 정지용, 임화, 오장환등 월북 작가의 창작집도 섞여 있었는데, 후에 오송회 사건의 빌미가 된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도 그때 읽었던 책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내가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간 후에는 자주 만날 수 없었으나 방학 같은 때 향리에 내려가면 가끔 만나 고단한 서울생활과 문학 이야기로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그 후 나는 대학 재학 중에 군에 입대했고 최전방에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광웅은 내 뒤를 따를 생각이었는지 내가 다녔던 한국외대 불어과에 입학했고 얼마 후 ≪현대문학≫지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그 무렵 이광웅은 가세가 기울어 서울에서의 학창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돼 향리로 내려가 대학을 마친 후 군산에서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나는 바쁜 신문기자 생활과 뒤늦은 파리 유학 등으로 쫓기는 생활을 하다보니 이광웅과 만날 기회를 거의 가질 수 없었다. 언젠가 그가 미술교사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알려왔고 얼마 후 짧은 만남을 가진 자리에서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윤삼하 시인의 ‘벽이라도 하나 무너져 버려라’로 시작되는 <바람부는 날>이라는 시편을 읊조리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오송회 사건이 용공 조작임을 알고……
내가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80년대 초 어느 날 신문 지면을 크게 장식한 오송회 사건과 이광웅이 그 주동자의 한 사람이라는 기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직감적으로 신군부가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번지는 민주화 열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조작한 사건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당시 워싱턴 정가에는 광주사태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군부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 등이 많이 나돌았으며 미국 조야의 비난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오송회 사건이 용공조작의 표본처럼 느껴졌다 하더라도 자세하고 진실된 정보를 얻을 수 없는데다 신군부에서 제5공화국으로 이어지는 공포정치가 지배하던 당시의 사정으로는 달리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1981년 전두환의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나도 특파원 4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오송회 사건의 진상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우선 이광웅의 가족들과 친지들로부터 사건의 발단과 재판과정 등을 얘기 듣고 그들이 마련한 탄원서의 내용을 샅샅이 검토했다. 내가 예측했던 대로 이 사건은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고 오송회라는 작명(?)까지 한 용공 조작 사건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애당초 누군가가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을 시험지 뒷면에 필사본으로 베낀 것을 군산시내 버스 안에 놓고 내렸는데 그것을 주은 경찰이 시험지의 출처를 추적하다가 군산제일고의 국어교사들을 혐의자로 지목 한데서 발단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 학교 국어교사인 박정석, 이광웅, 강상기 등을 긴급체포, 47일간이나 경찰서에 가두어 놓고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을 가한 끝에 강제 자백을 받아내어 기소한 것. 그 결과 이광웅은 재판에서 10년 구형에 7년 선고를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내가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될 무렵 여야 정치권에서는 5공 출범 과정에서 저질러진 억울한 사건들에 대해 정치적 사면조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정부 안에서도 정치적 화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노신영 안기부장을 만나 내가 알아본 오송회 사건의 진상과 전말을 자세히 설명하고 늦었지만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참동안 내 설명을 경청하던 노신영은 ‘지금 국회에서 민정당과 신민당 원내총무 간에 사면 감형 등을 논의하면서 해당 인사들의 명단을 간추리고 있으니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귀뜸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이종찬 총무와 신민당 김동영 총무를 각각 만나 이 사건의 억울함과 잔여 형기를 살고 있는 이광웅 등의 석방을 간곡히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 노력이 주효했는지 이광웅은 잔여 형기 2년을 남기고 5년 만에 영어의 몸에서 풀려났다. 기소 전에 두 달 가까이 모진 고문을 받은 데다 감옥에서 오랜 수감생활을 한 탓으로 그러잖아도 창백하고 허약해 보이던 이광웅은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자유를 얻은 그가 그 동안 못다 한 문학공부를 다시 시작해 시심을 불태우며 감추어 두었던 재주를 맘껏 발휘하기를 몹시 바랐었다.
그래서 세상도 바뀌어가고 있는 듯하니 민주화와 자유를 향한 창작활동을 함께 벌이자고 다짐하고 그가 서울에 와서 일할 직장도 알아보기로 했다. 마침 민주화의 기운이 감도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기저기서 새로운 신문 잡지들이 창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직장을 구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가족과 부인의 직장이 있는 고향에 다녀오겠다고 시골에 다녀온 이광웅이 ‘행님 아무래도 저는 전라북도에서 교사로 복직해야 할 것 같아요. 아내가 제 옥바라지 하느라 고생도 많이 했고 아이들과도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 라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더 이상 상경을 권할 수도 없었다. 이광웅은 전주로 내려간 얼마 후 복직은 되었으나 곧 몸져누웠고 고문 후유증과 감방생활의 고통으로 몹시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2년 서울 백병원에서 50세를 갓 넘긴 나이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 양같이 순하게 살아온 이 땅의 선량한 시인에게 무고한 죄를 뒤집어씌운 국가권력과 암울했던 시대에 대해 한마디 항변도 못한 채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백병원 영안실에서 치뤄진 이광웅 시인의 장례에는 문익환 목사와 고은시인 그리고 그와 함께 교사로 있었던 동료들이 줄지어 조문했다. 그리고 군산시 금강 하구둑에는 어쩌면 그의 운명과도 같은 시 「목숨을 걸고」 전문이 돌에 새겨져 이광웅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목숨을 걸고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한다
뭐든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이광웅의 해맑은 얼굴과 한 시인을 죽게 한 우리 시대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그리고 다시는 술이나 사랑 같은 것에 목숨을 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아울러 해보면서 말이다.
강인섭∙1936년 전북 고창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대학에서 수학했다.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녹슨 경의선> 등 4권의 시집과 <더 넓은 세계로> 등의 수상집, 평론집을 다수 출간했다. <동아일보> 워싱턴특파원. 논설위원. 관훈클럽 총무를 역임하고, 통일민주당 부총재, 제14. 16대 국회의원과 대통령정무수석을 지냈다. 한국외대 석좌교수와 호남대 겸임교수를 지낸 후, 현재 강우규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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