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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가을호)산문연재/예술의 향기 가득한 합스부르크제국-비엔나/권승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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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연재
예술의 향기 가득한 합스부르크제국
권승긍

우리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흔히 ‘누런 먼지 구덩이’라는 뜻의 ‘홍진紅塵’에 비유하곤 한다. 그건 깨끗한 자연과 대비되는 혼탁한 인간 세상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어쩌면 이렇게 화려할 수 있을까? 유럽에서 가장 ‘예쁜’ 도시를 들라면 아마 비엔나를 선정해야 할 것이다. 비엔나에 가면 사람이 사는 삭막한 도시가 아니라 화려한 장식장 속에 있는 것과 같이 황홀하다.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링스트라세를 따라 줄줄이 늘어서 있고 고색창연한 카페에서는 달콤한 케이크와 향기로운 커피가 사람들을 유혹한다. 게다가 예술의 도시답게 수많은 음악가의 동상이 거리를 장식해 비엔나의 거리를 걷노라면 경쾌한 왈츠의 선율이 귓가를 맴돈다. 어디 그 뿐인가. 저 유명한 크림트의 그림들이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비엔나에 가면 눈과 귀와 입이 즐겁다. 그저 모든 것들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닌 별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비엔나가 부다페스트에서 2시간이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우리는 무시로 이곳을 드나들었다. 친지가 오거나 지인들이 찾아오면 비엔나를 보자고 기차를 타고 오곤 했다. 그래서 국제선이 들어오는 서역은 우리에게는 아주 낯익은 곳이 되었다. 마침 여름방학에 동생들이 조카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비엔나를 본격적으로 안내하는 가이드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몸이 무척 아파 떠나기로 한 날 같이 올 수 없었다. 아내가 그 모든 일을 맡아 가족들을 인솔하고 우선 비엔나로 왔다. 다음날 서역에서 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몸이 온전하지 못하여 늦게 오는 바람에 온 가족이 초조해하며 기다리기도 했다. 4시나 돼서야 올 수 있었는데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잊지 못할 장소가 있는데 비엔나의 서역은 우리에겐 그렇게 추억이 겹겹이 쌓인 장소로 남아있다.
비엔나는 파리와 더불어 19세기 유럽의 ‘모더니티’를 상징하는 도시로 부각되었다. 파리가 창조적 우울의 도시라면, 비엔나는 달콤한 낭만의 도시이다. 비엔나에 오면 모든 것이 마법처럼 달콤한 커피로 바뀐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 라이즈」(1995)라는 영화를 보면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열연한 젊은 남녀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얘기가 통하여 무작정 내려 밤을 지새운 곳도 바로 비엔나이지 않은가. 못 믿겠거든 한 번 비엔나에 와 보라. 칙칙한 인생이 장밋빛 낭만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과 몰락
비엔나는 유럽의 가장 막강한 왕가인 합스부르크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처음 비엔나를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삼은 것은 바벤베르크가였다. 962년 오토 1세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이 출현하면서 그의 아들 오토 2세는 바벤베르크가의 레오폴드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의 ‘동쪽 나라’인 아우스트리아Austria의 국경 수비를 맡겼다. 바벤베르크가는 그 후 영지를 더욱 동쪽으로 확대하여 1135년 비엔나를 ‘동쪽 나라’인 아우스트리아의 수도로 삼았다. 비엔나가 역사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호전적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에 이르러 헝가리와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1246년 바벤베르크가는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바로 합스부르크가이다.
원래 합스부르크가는 스위스 아르가우의 합스부르크 성에서 시작되었다. 그리 대단한 세력을 지니지 못했던 이 가문이 어떻게 유럽 최강의 왕가를 이루었을까? 독일의 왕이 주로 역임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가 마땅한 적임자가 없어 ‘대공위 시대’로 계속 되던 중 선제후들은 1273년 자신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유능한 황제가 아니라 후보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없는 스위스의 소영주인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를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독일의 왕으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루돌프 1세는 현명하고 유능한 왕이었기에 그는 영지를 더욱 확대하여 오스트리아를 아들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 합스부르크가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452년 프리드리히 3세 이후는 사실상 합스부르크가에서 그 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의 영광은 1806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자연 그 중심이었던 비엔나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다.
합스부르크가가 유럽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인 15세기 말부터이다. 특히 막시밀리안 1세는 싸우지 않고 결혼동맹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의 아들 필리프를 스페인 통일의 주역이었던 페르난도의 딸 후아나와 결혼시켜 여기서 카를 5세가 태어나게 되었는데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비롯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영토와 아메리카 식민지까지 통치하는 최강의 군주가 되었고 합스부르크가도 유럽을 지배하는 왕가가 되었다. 그 합스부르크의 영광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거쳐 나폴레옹 전쟁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나폴레옹이 패함으로서 다시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처리를 위하여 1814∼1815년 각국 대표가 비엔나에 모이게 되어 이른바 30년 동안 ‘빈 체제’를 형성하면서 합스부르크가는 유럽을 사실상 지배하는 왕가가 되었다. 동시에 당시의 비엔나도 나폴레옹의 흔적이 남아있는 파리를 제치고 유럽문화의 수도로 부상된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럽문화의 수도로서 비엔나를 완성한 사람은 사실상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Frantz Jozeff(재위; 1848∼1916)였다. 그는 무려 68년 동안이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로 있으면서 영광과 몰락을 함께 경험했다. 1848년 18세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등극했을 때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트리아를 포함해서 북으로 체코, 폴란드를 지배해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 보고 있었으며, 동으로는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남으로는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 베네치아를 포함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동으로는 스위스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여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당시 사실상 유럽의 최강자였다.
이런 영향력 덕분에 유럽의 문화예술도 비엔나를 중심으로 꽃을 피웠으며 요한 스트라우스, 프란츠 리스트,슈테판 츠바이크, 지그문트 프로이트, 구스타프 클림트, 말러 등 뛰어난 사상가, 작가, 음악가, 화가들이 모여들어 비엔나의 황금시대를 만들었다. 세기말 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비엔나도 유럽 지성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이다. 게다가 향락을 쫓는 비엔나의 모든 사람들은 제국의 풍요로움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오페라 하우스, 카페, 무도회장, 극장 등으로 몰려다니며 비엔나의 황금시대를 마음껏 구가했다.

그러나 이 최강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1866년 신흥강국 프로이센에게 괴니히 그레츠 전투에서 패함으로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밀려들어 오는 프로이센 군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제국 내의 여러 나라들이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자 1867년 2월 그중 가장 믿을 만한 헝가리와 공동으로 ‘합스부르크 이중제국’을 형성하여 이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의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1889년 유일한 황세자였던 루돌프가 애인과 같이 마이얼링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1896년에는 뒤이어 황제의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가 죽었으며, 1898년에는 황제의 반려자였던 황후 엘리자베트가 제네바의 호반에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칼에 찔려 암살당함으로써 제국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연이은 비보를 접한 요제프 황제는 “이 세상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명도 남겨두지 않으시려는 겁니까?”라며 울부짖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은 황제의 조카이자 제국의 상속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이었다. 세르비아를 방문했던 대공이 수도 사라예보에서 보스니아 출신의 청년에게 암살당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고 그 전쟁이 끝난 1918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과 영욕의 세월을 같이한 상징적 건물은 왕궁인 호프부르크 궁이다. 1220년에 최초로 세워지기 시작하여 역대 황제들에 의해 차례로 증개축 되었다. 15세기 전반에 왕궁 예배당이, 16세기에 아멜리에 궁이, 17세기에 레오폴드관이, 18세기에 승마학교, 도서관 등이 각각 건설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네오 바로크 양식의 신왕궁이 지어져 2천 개가 넘는 방을 보유한 현재의 왕궁이 완성되었다. 왕궁의 정문은 미하엘 문으로 18세기에 화려한 로코코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문의 양 옆으로 제국의 힘을 상징하는 4개의 헤라클레스 상이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다. 우리나라 절 입구에 버티고 서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과 유사해 놀랐다. 우리의 경우는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하지만 여기서는 제국의 강력한 힘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자 보거라! 이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힘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스페인 승마학교가, 오른 쪽에는 황제의 아파트먼트가 위치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왕궁을 두루 구경할 수 있는데 출입이 제한된 구역이 많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살았다는 아파트먼트로 여기엔 1854년 결혼해서 44년을 같이 살았던 이들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특히 시시Sisi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엘리자베트 황후의 아름다운 초상화가 걸려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시시는 바이에른의 왕가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둘째 딸로 뚜렷한 이목구비와 총명한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황후로 자신의 딸 조피가 죽은 뒤로는 아름다움을 신앙처럼 받들어 날씬한 몸매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병적일 정도로 식사조절과 운동에 몰두했다고 한다. 1873년 비엔나에서 만국박람회가 개최됐을 때 방문객의 상당수는 그 아름다운 황후를 만나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시시는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황후가 건강 악화로 요양을 떠나버리자 페르시아의 국왕인 나세르 오드딘은 황후를 만나기 전에는 비엔나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하여 쇤브룬 궁에서 그를 위해 만찬을 개최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엘리자베트는 동화 속의 왕비나 공주처럼 실제로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였고, 그 자취가 이곳 거실과 침실, 알현실, 살롱, 서재 등에 남아있으며 현관홀에는 실물 크기의 황후상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시시의 아름다운 얼굴은 사실 비엔나의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다. 여기저기 황후의 초상을 넣은 그림이 붙어있으며 심지어는 그녀의 이름을 넣은 ‘시시 초콜릿’도 있어 언제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상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시가 비엔나보다 더 좋아했던 부다페스트에는 ‘시시 레스토랑’도 있고, 그녀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트 다리도 있어 다뉴브의 푸른 물결을 가로지르고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68년 동안이나 통치했던 요제프 황제보다 비운의 죽음을 당한 엘리자베트야말로 어느 의미에서 진정 합스부르크 제국의 ‘아름다운 상징’인 셈이다.

입헌군주정부의 이상을 실현하는 건물들
비엔나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시내의 중심을 형성하는 ‘링스트라세Ringstrasse’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원형도로’ 혹은 ‘반지형도로’일 것인데 여기에 비엔나의 주요 건물들은 다 몰려있으며 그 중심에 스테판 성당이 있다. 1번과 2번 트램이 우리의 지하철 2호선처럼 링을 따라 도는데 1번이 시계바늘 방향이고 2번이 그 반대이다. 이것을 타고 가다 내리면 시가지 어디든지 갈 수 있으며 대략 한 바퀴 도는데 30분가량 걸린다.
링스트라세는 1857년 요제프 황제의 명령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옛 성벽을 부수고 그 자리에 구 시가지를 둘러싼 3km의 아름다운 반지형 도로를 만든 것이다. 애초 요제프 황제의 구상은 제국의 기념물인 호프부르크 궁, 스테판 성당, 수비대 요새들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비엔나를 ‘영원한 제국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괴니히 그레츠 전투의 패전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면서 요제프 황제도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어 황제 중심의 절대왕정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 새로운 입헌군주제의 상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신흥 부르주아들은 새로 들어설 건물들을 자신들의 요구와 맞는 세속문화의 전당으로 꾸미고자 하였다. 하지만 링스트라세의 건축물들이 부르조아의 요구에 맞게 완성되는 데는 무려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결과 링스트라세의 건물들은 비엔나의 풍경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바꾸어 버렸으며 그 풍경은 입헌정부가 탄생한 그 자신감 넘치는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비엔나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링스트라세의 그 상징적 건물들을 안내하며 찾아다녔다. 링의 왼쪽에 주요 건물들이 몰려있는데 가장 먼저 볼 것은 그리스 신전 모양의 국회의사당이다. 입헌군주제가 되면서 군통수권은 황제에게 있지만 입법권은 의회에 넘겨지게 되었고, 마침 그 자리에 군 연병장이 있었는데 군에서 그 땅을 의사당 건물을 짓기 위해서 내준 것이었다. 덴마크의 건축가 테오필 한센은 민주적인 새로운 정치방식을 수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건축양식을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찾았다. 한센은 “하려하고도 장대한 하나의 기념건축물”을 그리스 신전의 양식으로 설계하여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그 의사당 앞에 지혜의 여신이자 비엔나의 수호신인 아테네 여신의 조각상을 세워 이 민주주의의 전당을 장식하였다. 의사당 앞에서 보면 2층에 배치한 기둥들이 기단이 있어 훨씬 더 높아 보임으로써 장중함을 준다. 건물을 통해 고도의 정치적 상징을 보여준 셈이다.

다음에 볼 건물은 그 옆에 있는 비엔나 시청사다. 그런데 이건 시청사가 아니라 무슨 중세의 고딕 성당과도 같다. 어떻게 해서 시청사가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을까? 건축가 프리드리히 폰 슈미트는 시청사에 걸맞은 양식을 찾기 위해서 플랑드르 후기 고딕양식을 선택했다. 그 양식은 스페인의 지배에 맞서 싸운 당당한 플랑드르 자유도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자유도시의 이미지를 비엔나가 차용한 것이다. 그 당당한 기개로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시청사의 모습은 이제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신생 자유도시 비엔나의 의지이자 새로운 상징인 것이다.
우리가 여름에 동생들과 같이 이곳에 갔을 때 마침 유럽 월드컵이라는 ‘유로 2008’이 한창이었다. 개최국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였는데, 의사당에서 시청까지 링스트라세를 막고 우리의 거리 응원전처럼 주최국인 오스트리아에서도 응원의 열기가 뜨거웠다. 마침 유로 2008의 주후원사가 현대기아 자동차였는데 안내원들은 이 회사가 한국의 기업인 줄 모르는 눈치였다. 오히려 ‘훈다이HYUNDAI’라는 발음으로 인해 일본기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행사 관계자에게 ‘훈다이’가 일본이 아니라 한국기업임을 손짓 발짓 해가며 열심히 설명했더니 우리가 그 후원사가 위치한 ‘코리아’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기념 모자를 주는 것이 아닌가. 아, 서글픈 ‘코리아’여!
세 번째로 링스트라세에서 볼 것은 시청의 위쪽에 위치한 비엔나 대학이다. 비엔나 대학은 1848년 혁명을 부추겼다는 이유로 시내의 곳곳에 분산배치 됐다가 1870년 시의회가 새 대학건물을 지어도 좋다는 허락을 황제에게 받아낸 뒤 다시 지어졌다. 새로운 대학의 건물은 인간의 개성, 휴머니즘을 찬양하고 이성의 승리를 상징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학문의 전당이 개성과 이성의 찬가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인간의 잠재된 본능을 규명했고, 멘델이 유전법칙을 발견해냈으니 비엔나 대학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다. 그런데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비엔나 대학을 비롯해 링스트라세에 많이 존재하는데 그 대표적 건물이 바로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오페라하우스다. 세계 3대 오페라하우스에 들어가는 이 기념비적 건물은 건축될 당시 실패작으로 오인되어 건축가인 반 데어 닐이 목을 매고 자살할 정도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파리 오페라하우스에 맞설 정도의 아름다운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링의 맨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또 다른 르네상스 양식의 대표적 건물은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 위치한 미술사박물관이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가의 미술품을 전시할 목적으로 1891년 개관했다. 이 건물은 바로크 양식에 가까운 르네상스 양식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특히 내부는 크림트의 벽화를 비롯하여 황금색의 장식들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거기에 전시된 그림들은 실로 엄청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어 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가의 힘을 느끼게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찾아갈 건물은 시립극장인 부르크 극장이다. 시청사의 맞은편에 위치한 건물로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져 화려한 외관과 장식이 눈에 띄는 건물이다. 이 극장은 애초 황실과 귀족, 평민들의 같이 만날 수 있는 시대를 꿈꾸면서 바로크 양식을 선택해 외관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외관은 화려했지만 출입구는 좁았으며 음향시설은 엉망이었다.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스타일로 극장을 개조하여 1897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극장은 탈바꿈하게 되었다. 특히 내부에 그리스 시대의 신화와 연극을 소재로 한 벽화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이처럼 링스트라세의 의미 있는 건물들은 위로 비엔나 대학으로부터 아래로 오페라 하우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왼쪽에 배치되어 유럽을 지배했던 입헌군주정부의 이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상징적 건물들은 그 중심에 놓인 왕궁인 호프부르크 궁과 서로 배치되면서 조화를 이루는 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즉 황제를 인정하면서도 시민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건물들이 왕궁을 포위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이 주요 건물의 배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시민)는 황제를 포위하고 있다. 황제의 통치는 인정하지만, 우리와 같이 이 거대한 제국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이 상징적 건물들은 링의 왼쪽에 몰려있어 트램을 탈 필요도 없이 맨 위쪽의 비엔나 대학에서 시작하여 비엔나 대학-시청사-시립극장(길 건너)-국회의사당-미술사 박물관-호프부르크 궁(길 건너)-오페라 하우스로 동선을 잡고 구경하면 된다.(혹은 그 반대로 돌아도 된다.) 그리고 오페라 하우스에서 카페가 즐비한 케른트너 거리를 걸어 링의 중심에 위치한 스테판 대성당에 이르면 그 빛나는 시대, 비엔나 입헌군주정치의 상징을 다 둘러본 셈이 된다.
비엔나에 가서 중심 거리를 구경하거나 친지들을 안내할 때마다 우리는 이 동선을 이용했다. 그렇게 돌고나면 짧게는 한나절, 길게는 하루가 걸린다. 물론 미술사박물관에서 그림을 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가에 따라 유동적이다. 그리곤 케른트너 거리로 가서 맛있는 커피와 저녁을 먹으면 하루의 일정이 마감된다.

달콤한 카페의 유혹
유럽에서 커피가 가장 맛있는 곳을 들라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비엔나를 말할 것이다. 달콤한 크림을 넣은 커피를 우리나라에서 ‘비엔나커피’라고 할 정도로 비엔나의 커피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비엔나커피는 비엔나에는 없다. 가장 비슷한 것이 카푸치노처럼 크림을 많이 넣은 ‘멜랑주Melange’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다방식 비엔나커피와는 다르다. 말하자면 비엔나커피란 말은 달콤한 비엔나의 커피를 모방한 우리식 커피인 셈이다. 거기에 들어있는 달콤한 크림처럼 비엔나에 대한 환상이 보태져 그렇게 부른 것이리라.
비엔나 커피의 원조를 맛볼 수 있는 곳이 오페라 하우스에서 스테판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케른트너 거리다. 19세기 숱한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 비엔나를 예술의 도시로 만들었던 그 원동력이 바로 이곳 카페에서 시작되었다. 대부분 고색창연한 건물, 높은 천정, 우아한 실내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내에 들어가 대리석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고 느긋하게 신문을 뒤적이며 하루의 일과를 계획하면 비엔나의 카페에 왔음을 실감한다. 카페는 그들 생활의 일부분일 정도로 밀접하다.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업무를 보기도 하지만 책이나 신문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원래 커피는 아랍에서 건너왔다. 일설에 의하면 비엔나를 포위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군이 물러나면서 두고 간 원두에서부터 커피가 전해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1670년 경 아르메니아 상인이 커피를 수입해서 유럽에 퍼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1685년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황제에게 허가를 받아 카페가 탄생했고 이것이 유럽에 퍼진 것이다. 오늘날 서양문화의 특징이 돼버린 커피와 카페는 이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말하자면 비엔나가 유럽 카페의 원조인 셈이다.
우리는 케른트너 거리의 수많은 카페 중에서 초코 케이크인 토르테가 맛있다는 데멜Demel에 들렸다. 이 카페는 요제프 황제가 특별히 좋아해 황실에 과자를 납품하기도 한 곳이다. 오래되고 우아한 실내장식과 많은 손님들이 이곳의 명성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그 처갓집인 자허와 토르테를 두고 그 명칭사용권으로 법정투쟁까지 갔던 사연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데멜의 토르테는 우리의 입맛에는 너무 달아 먹은 걸 후회할 정도였다. 어쩌면 토르테의 그 달콤한 맛이 바로 비엔나의 맛인지도 모르겠다.

비엔나의 중심, 성 슈테판 대성당
케른트너 거리를 걷다보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자연스럽게 발을 옮기는데 그곳이 바로 진정한 비엔나의 중심, 성 슈테판 대성당이다. 반지형 도로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어느 지점에서 보아도 잘 보이는 비엔나의 랜드 마크다. 원래 12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을 14세기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4세가 지금 모양의 고딕식 건물로 개축하였다. 이 고딕 성당은 특히 지붕이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돼 화려함을 보여주는데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마차시 성당과 유사해 합스부르크 이중제국 시절에 타일로 장식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분명 이 모자이크 지붕은 서유럽의 고딕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성당의 입구에는 흥미로운 표식이 있다. 빵의 크기를 재어볼 수 있는 둥그런 홈과 길이를 대어볼 수 있는 표준 척도가 성당의 입구 돌 위에 새겨져 있다. 시장에서 산 빵이나 물건이 제대로 만든 것인지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장치다. 이 성당의 주변 슈테판 광장은 예전에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시장의 상인들이 고객을 속이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했으리라. 대성당이 사람들의 실생활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다.
이 성당에는 역대 합스부르크 황제들의 내장을 안치한 납골당이 있다. 시신을 전부 안치하는 것이 아니라 장례식이 끝나면 심장은 아우구스티너 성당에, 유골은 카푸치너 성당에, 그리고 심장 이외의 내장은 바로 이곳 슈테판 성당에 안치했으니 여긴 역대 황제들의 내장만 있는 곳이다. 아마도 시신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이렇게 분산했을 것인데 장기를 따로 보관했다니 정성보다는 기괴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그 막강한 역대 황제들보다 1791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천재 모차르트의 장례를 치른 곳으로 더 유명하다. 주제단의 북쪽 벽에 그 사실이 적혀있어 황제의 매장보다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이곳을 들른다. 권력보다는 예술이 사람들을 더 감동시킨다는 증거인 셈이다.
북탑 아래에 「치통의 그리스도」라는 흥미로운 조각이 있다. 납골당 입구 계단의 왼쪽에 위치한 석상인데 고통스런 표정이 ‘치통’을 앓는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려진다. 누가 조각했는지 모를 15세기경의 조각인데 우리의 ‘마애불磨崖佛’이나 돌장승처럼 소박하고도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어떤 석공이 고통스러워하는 그리스도를 조각했을 것인데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이 성당의 구석에 안치된 것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소박함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슈테판 성당을 나오면 예전 합스부르크 시절의 복장을 하고 흰색 가발을 쓴 사람들이 다가와 음악회에 가지 않겠냐며 표를 판다. 대개는 간단한 저녁 음악회다. 우리의 경우라면 그저 아마추어 라이브 가수 몇이 나와 노래 부르는 정도지만 여긴 음악의 도시 비엔나가 아닌가. 그 수준이 만만치 않다.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서는 미리 몇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지만 이런 공연은 늘 있어서 비엔나에 와서 시간이 허락된다면 기념으로 한 번 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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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도시, 비엔나
비엔나가 어떻게 해서 세계적인 음악의 도시가 됐을까? 비엔나는 이미 15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이름을 떨쳤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로서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게다가 황실에서 음악을 적극 장려하고 애호하니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 또한 음악을 좋아하여 많은 수요가 창출되었던 것이다. 자연 뛰어난 음악가가 배출되는 것은 물론 다른 지역의 음악가도 음악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비엔나로 와야 되기에 비엔나는 음악의 도시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8, 9세기가 되면서 비엔나의 인구는 20∼30만 정도에 불과했지만 음악을 애호하는 풍조는 대단해서 세계의 음악가들이 다 모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비엔나 고전파라는 하이든Joseph Haydn(1732∼1809)과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1756∼1791)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1770∼1827)이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죽었으며 낭만파 작곡가인 ‘가곡의 왕’ 슈베르트Franz Schubert(1797∼1825)와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1825∼1899)도 비엔나를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브루크너, 브람스,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등 수많은 음악가들이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18,9세기 비엔나는 말하자면 온 유럽의 음악가들이 다 모이는 음악의 메카였던 것이다.
비엔나를 빛낸 음악가들을 기리기 위해 거리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이들의 동상을 세워 그들의 음악적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비엔나에 가면 이들의 면면을 살펴봐야 한다. 하이든의 동상은 마리아 힐퍼 거리에 있으며, 모차르트의 동상은 명당인 호프부르크 궁 안의 왕궁정원에 우뚝 서서 비엔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살아서는 비참했지만 죽어서 천재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회복한 셈이다. 베토벤의 동상은 링스트라세에 맞닿아 있는 베토벤 광장을 지키고 있다. 독일 본 태생인 베토벤은 17세의 나이에 비엔나로 와서 그곳에서 음악가로 일생을 보냈다. 독일 태생이지만 사실은 비엔나에서 명성을 얻었던 셈이다. 비엔나가 고향이고 평생을 비엔나에서 보낸 비엔나 토박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황금색 동상은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으로 시민공원에서 사람들을 맞이한다. 화려하기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와서 기념사진을 찍는 곳이다. 그 공원에는 슈베르트와 브루크너의 동상도 있어 세 명의 음악가들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
링스트라세를 따라 음악가의 동상이 이어져 있어 관심이 있다면 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도 동생들과 어린 조카들을 보여주기 위해 링을 따라 시계바늘 반대 방향으로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슈베르트, 브루크너의 동상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지금 이 동상들이 그저 돌조각에 불과하다고 여기지만 언젠가 음악을 들을 때 비엔나에서 봤던 동상들의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다. 사실 동상이야 어디든지 세우는 것이 가능하지만 비엔나의 동상은 좀 색다른 느낌이다. 그들이 바로 이곳에서 활동했고 이곳에 묻혔기 때문에 무생물인 동상도 영혼을 지니고 있으리란 느낌이 든다.
음악가들의 동상을 보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무덤을 찾아가도 좋다. 특히 이들 음악가들을 좋아하거나 클래식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비엔나 동남쪽의 중앙묘지와 마르크스 묘지를 찾아가 그들의 무덤을 참배하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된다. 모차르트 무덤은 마르크스 묘지에 있는데 사실 모차르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추정되는 장소에 천사의 석상을 세워 무덤으로 꾸민 것이다. 그 외에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는 중앙묘지에 잠들어 있다. 중앙묘지의 한가운데 모차르트의 기념비도 있어 음악의 벗들과 같이 있도록 배려하여 아쉬움을 달래준다. 여기에 오면 위대한 음악가들의 육신은 죽어 묻혔으나 그 영혼은 살아있어 언제나 음악이 귓가에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890년 비엔나에서 시행한 한 여론조사에서 요한 슈트라우스는 전 유럽에서 세 번째로 인기 있는 인물로 뽑혔다. 1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고, 2위는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이며, 3위가 슈트라우스였다.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 이유는 그의 음악이 제국 내의 여러 민족들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의 왈츠와 폴카에서 폴란드, 체코, 헝가리 인들은 자기 고유의 음악을 듣고 그를 자기 민족의 음악을 복원한 사람으로 여기고 열광했다. 게다가 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강」은 녹황색의 뿌연 다뉴브 강물을 맑고 푸른 강물로 만드는 마술을 보여 주었다. 다뉴브 강은 그 가락처럼 그렇게 맑고 푸른 강이 아니다. 처음 다뉴브 강을 보았을 때 뿌옇고 탁한 강물을 보고 놀랐다. 아니, 이게 그 유명한 다뉴브 강이란 말인가 하며 의아해 했다. 하지만 독일의 검은 숲에서 발원하여 오스트리아를 적시고 헝가리를 지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를 거쳐 흑해로 흘러들어가는 다뉴브 강은 슈트라우스의 음악으로 맑고 푸른 강이 된 것이다. 음악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장엄한 스트라우스의 가락은 바로 진정한 ‘오스트리아의 소리’ 혹은 ‘비엔나의 소리’인 것이다.
비엔나에서 음악은 일상이다. 늘 음악과 가까이 있으며 오페라의 좌석은 몇 달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등급은 지휘자, 출연자에 따라 G,A,B,C 등으로 매겨져 요금을 달리 한다. 공연의 수준에 따라 요금의 차이가 있지만 100∼200유로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물론 한국에서 인터넷을 통해서 미리 예매해야 한다. 우리는 비엔나에서는 감히 도전을 못하고 부다페스트에서 크리스마스 무렵에 맞춰 「호두까기 인형」을 보려고 한 달 전에 인터넷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표가 이미 매진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비싸게 하는데도 표가 매진될 정도로 이곳 사람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비엔나에서 한 해의 마무리는 항상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를 보는 것으로 한다. 모든 극장에서 「박쥐」를 공연하지만 입장권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박쥐」는 귀족 흉내를 내는 비엔나의 신흥 부르주아계급을 풍자한 익살스런 작품인데 귀족층과 중산층에게 모두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유쾌한 마음으로 이 오페레타를 감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세기말의 관능 혹은 황금빛 유혹, 클림트와 분리파
음악을 들었으니 이제 그림을 감상하러 다녀보자. 비엔나의 인구는 160만 명 정도로 서울의 한 구와 비슷한데 박물관이 무려 40여개나 된다.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에 여기저기서 수집한 것들로 비엔나는 가득하다. 그래서 비엔나는 음악의 도시일 뿐만 아니라 미술의 도시이기도 한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소장품을 전시한 미술사 박물관에 가보면 브뢰겔의 그림이 그의 나라인 벨기에의 브뤼셀보다도 더 많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다.
가장 많은 그림을 전시한 곳이 미술사 박물관으로 호프부르크 궁의 맞은 편 마리아 테레사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크 양식에 가까운 르네상스 양식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다. 입구의 화려한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 30실 정도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는데 근대 이전의 회화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파리의 루브르나 마드리드의 프라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시설이나 그림의 수준이 만만치 않다. 우리는 그림이 좋아 이곳을 두 번이나 갔다. 한번은 우리 부부만 갔고, 한번은 동생들을 데리고 갔다. 그림 안내는 당연히 아내의 몫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대大 피테르 브뢰겔Bruegel Pieter(1525∼1569)의 작품을 전시한 방으로 그의 빛나는 풍속화가 이곳에 다 있는 것 같다. 특히 「눈 속의 사냥꾼들」이나 「농민의 결혼식」과 같은 풍속화는 브뢰겔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릴 수 없는 섬세함이 있다. 농민들의 일상적 삶과 표정들을 살아있는 것처럼 그려내어 독특한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했다. 대부분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들이 성서나 신화에서 소재를 취해 그렸던 반면 브뢰겔은 농민들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을 그림으로 옮겼다. 당시로서 이런 풍속화는 혁명적인 발상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으로써 근대 회화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눈 속의 사냥꾼들」 앞에는 이 그림을 베끼는 모사화가가 있어 그 유명세를 짐작하게 했다.
이 외에도 라파엘로의 「초원의 성모」와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녀의 연작 회화」가 눈길을 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연작초상은 그의 유명한 작품 「시녀들」에 등장하는 어린 마르가리타를 나이에
따라 다양하게 그린 것으로 이곳 합스부르크가로 시집온 공주의 결혼예물인 셈이다. 게다가 순간의 장면을 영원으로 승화시킨 베르메르Johannes Vermeer(1632∼1675)의 「화가와 모델」도 이곳에 있어 늘 사람들로 붐빈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의 그림들은 무척 많아서 방을 세 개나 배정했을 정도다.
비엔나의 미술사 박물관은 그림들도 대단하지만 그 건물 자체가 또한 예술이다.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한 외관은 물론 건물의 내부를 보면 색색의 대리석에 황금색 장식들이 휘황찬란하고 빈 공간에는 고대의 예술세계를 묘사한 클림트의 화려한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중간에 중앙에 있는 카페에 느긋하게 앉아 이 화려한 건물을 감상할 필요도 있다. 우리는 처음에 카페가 너무 우아하고 멋있어 상당히 비싸리라 예상하고 아예 근처에도 가지 않았는데 메뉴를 보니 다른 곳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이곳에서 간단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셨다. 검은 대리석 기둥과 황금색 천장, 고색창연한 대리석 테이블과 의자, 맛있는 커피, 모든 것이 완벽했다. 게다가 이 카페는 세계의 명화들로 둘러싸여 예술의 향기가 충만하지 않은가. 정말 궁궐이나 귀족의 저택에서처럼 명화 속에 둘러싸여서 하는 식사가 이런 것이리라.
비엔나를 대표하는 음악가가 요한 스트라우스라면, 비엔나를 상징하는 화가는 단연코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다. 그의 관능적이고도 화려한 황금색의 「키스」는 바로 비엔나의 상징이다. 비엔나는 그의 그림처럼 그렇게 달콤하고도 관능적이지 않은가.
클림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일단 링을 벗어나 벨베데레 궁전으로 가야 한다. D번 트램을 타고 벨베데레 궁에서 하차하면 클림트의 그림이 있는 상궁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처음 우리가 이곳에 갔을 때는 부활절 휴가 기간이었는데 봄을 시샘하는 눈까지 내릴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상궁에 들어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클림트의 그림을 보니 추위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특히 그의 「키스」는 방 하나를 통째로 배정하고 감시원도 세 명이나 지키게 하여 그 그림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이 그림은 어떤 경우에도 외국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비엔나의 국보급 그림인 셈이다.
「키스」는 정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그림이다. 그냥 보면 모든 게 느껴진다. 온갖 꽃이 만발한 절벽 위에서 두 연인이 포옹하며 황홀하게 키스를 하는 장면을 그렸다. 화려한 황금색의 옷으로 두 연인이 뒤덮여 있는데 남자는 딱딱한 검정색과 흰색의 사각형 무늬로 장식되었고, 여자는 부드러운 곡선에 따뜻한 색조의 원형 무늬로 치장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상징적 표현이다. 이들은 온통 황금의 덮개를 쓰고 얼굴과 손만을 내놓고 있는 듯이 보여 흐르는 황금색이 황홀한 여자의 표정과 조화를 이룬다. 키스는 바로 이런 황금이 흐르는 것처럼 눈부시고 황홀한 것이 아니던가! 온 몸이 황금이 되어 녹아내리는 듯하다. 주변은 어두운 듯하지만 황금색의 어렴풋한 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이들을 비춰주고 있다.
이 그림은 북부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아폴리나레 교회에 장식된 비잔틴 모자이크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비잔틴의 황금색 모자이크를 응용해서 이렇게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게다가 발아래의 꽃밭은 보티첼리의 「봄」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중세의 종교적 엄숙주의에 맞서 인간의 개성을 부활시킨 르네상스 정신을 생각나게 한다. “자, 보거라.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찬란하고 황홀한가!”라고 이 그림을 말한다.
「키스」 외에도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그림이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1」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의 외경 「유디트서」에 나오는 인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적장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을 구한 여인이다. 이스라엘 ‘논개’인 셈인데 ‘팜므파탈’의 ‘잔인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르조네, 카라바조, 젠틸레스키 등 수많은 화가들이 이 소재를 즐겨 그렸다. 그런데 클림트의 그림에는 적장을 죽이는 장면에서 보이는 잔인함이나 두려움, 혹은 영웅적 행위와 당당함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쾌감에 사로잡혀 몽롱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 보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이제 막 사랑을 나누고 난 뒤의 표정처럼 황홀하기 짝이 없다. 다만 그의 손에 남자의 목이 들려있어 그녀가 유디트임을 알려준다. 크림트는 이것 외에도 또 다른 관능적인 모습의 「유디트·2」를 그리기도 했다. 유디트를 통해서 클림트는 여성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클림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파격적인 그림들을 그리게 됐을까? 이는 ‘분리파’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다. 1897년 4월, 20명에 이르는 화가와 건축가는 미술인협회를 탈퇴하고 아방가르드(전위예술)동맹을 결성하여 비엔나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이들에게는 기존의 예술에 반기를 들었다는 의미의 ‘제체시온Secession’, 곧 ‘분리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은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고유한 예술이, 예술에는 예술만의 고유한 자유가 존재한다.”고 선언하고 독자적인 행동으로 나아갔다 이들 분리파들은 클림트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성스러운 샘’이라는 의미의 베르 사크룸Ver Sacrum이라는 전위 미술잡지도 발간했으며, 요제프 올브리흐가 설계하여 그들의 아지트인 분리파 회관을 건립하기도 했다.(일군의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회관을 가질 정도라니! 그 호사스러움이 부럽다.)
그 분리파 회관은 링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겐트슈틸(청년양식) 건물로 입구의 황금색 돔이 독특하다. 그 건물에도 클림트의 그림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모조품이 온 바 있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소재로 한 「베토벤 벽화」가 눈길을 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시각화 한 것인데 음악의 율동처럼 유연한 사람들의 모습이 특이하다.
1898년 봄, 분리파 사람들은 그들의 회관이 완성되기 전에 원예협회 회관을 빌려 기념적인 첫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에는 회원들 뿐 만아니라 로댕, 뵈클린, 휘슬러, 슈톡, 크노프 등 외국의 작가들도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는데 무려 5만 7천 명의 관람객이 찾았고, 218점의 그림이 팔릴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요제프 황제가 전시장을 찾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 전시회의 포스터는 혁신의 힘을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을 내세웠다. 주류 화단을 미노타우로스로 보고 이를 죽임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예술이 승리하리라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다. 게다가 포스터의 오른 쪽에 이 광경을 지혜의 여신이자, 비엔나의 수호신인 아테네 여신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삽화를 넣었다. 지혜가 승리하리란 암시이자, 비엔나 시민들의 지지가 분리파에게 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분리파는 세기말의 조류에 맞춰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시각과 방법으로 예술을 창조하고자 하였고 그런 이들의 경향은 보수적인 화단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류에서 스스로 이탈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었던 것이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그림들이 그 증거가 된다.
에곤 실레의 그림들을 많이 보기 위해서는 미술사 박물관 뒤에 위치한 레오폴드 미술관으로 가면 된다. 거기엔 깡마른 몸과 불안한 표정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인물들이 있어 삶에 대한 병적인 욕망과 세기말의 우울이 교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묘하게도 분리파의 건축 양식인 유겐트스틸의 건물들은 링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입헌군주제의 상징성과 서로 맞서고 있다. 분리파 회관을 시작으로 오토 바그너가 지은 카를스플라츠 역사도 그 옆에 있으며 위로 올라가면 링의 동쪽에 알루미늄과 유리를 많이 사용한 오토 바그너의 우편저금국이 있다. 링스트라세의 서쪽에 왕궁을 비롯하여 입헌군주정부의 상징적인 건물이 들어서 있다면 동남쪽에는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고 스스로 떨어져나간 분리파의 상징적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셈이다.
생태적 상상력, 훈데르트바서를 아십니까
이제 비엔나의 생태적인 화가이자 건축가를 만나보자.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1928~2000)를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대개가 모른다는 대답이 나온다. 그렇다 바서는 일반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나도 처음에 몰랐다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사람이다. 그는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 묻히기를 바랐던 생태주의자다. 비엔나와 뉴질랜드를 오가며 살다 뉴질랜드 앞 바다의 배안에서 병으로 죽었던 특이한 인물이다.
비엔나의 북쪽 링에서 동쪽으로 가는 트램을 타고 가다보면 지붕과 창문에서 나무가 자라는 희한한 아파트가 나온다. 바로 훈데르트바서가 설계한 시영 아파트다. 직선을 전혀 쓰지 않고 곡선으로만 지었으며 무생물인 건물과 식물을 같이 배치해 건물에서 나무와 풀이 자란다. 처음 이 건물을 보았을 때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할까? 마치 아이들의 놀이터 같기도 하고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요정의 집 같기도 하다. 그렇다. 마치 스머프의 집 같았다.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그런 공간을 꿈꾸지만 바서는 그것을 현실화 시켰다. 바서는 직선은 나쁜 것이라 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실상 모든 동식물에서 완벽한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적인 것은 바로 곡선이다. 그래서 바서는 곡선을 이용해 집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희한한 아파트의 설계를 비엔나 시에서 수용하여 시영아파트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같으면 말도 안 된다고 무시했을 것인데 그것을 허용하여 이런 기념비적 건물이 남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그 건물에는 시민들이 살고 있다. 한번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아파트 앞의 갤러리에 가서 내부를 구경했다. 정말 직선으로 이루어진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지하의 화장실도 재미있게 꾸며져 마치 놀이터 같았다. 갤러리에는 카페와 상점들이 있었는데 이 기념비적 건물을 구경하러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새로운 관광지가 된 것이다. 바서는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동화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이다.
시영 아파트에서 한 블록만 시내 쪽으로 가면 바서의 미술관이 나온다. 여기서 바서의 그림들을 상설전시하고 있는데 그 생태적 상상력이 놀랍다. 역시 직선을 전혀 쓰지 않고 곡선으로만 형태를 표시했다. 기막힌 발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아내는 아예 두꺼운 화집을 한권 구입했다.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맞히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샀다고 했다. 바서의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고정된 틀에 안주하는가를 느꼈다. 전통이나 관습의 이름으로 혹은 기존의 권위로 늘 그 틀 속에 안주해 있었다. 심지어는 그 틀을 파괴하는 것을 불안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떤 고정된 틀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이 세상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아름답게 만드는지를 바서는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엔나 대학에서 북쪽으로 트램을 타고 가다 다뉴브 운하와 만나는 곳에 바서가 건축한 쓰레기 소각장과 열병합 발전소가 있다. 쓰레기 소각장은 기존의 건물을 개축하여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마법의 성처럼 만들었다. 색색의 타일로 장식한 외관은 마치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는 것 같았다. 가우디 역시도 생태적인 건축을 추구하여 동식물에서 소재를 찾았고 조각 타일을 입혀 외관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혐오시설인 쓰레기 소각장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서울의 중계동에도 중랑천변에 쓰레기 소각장이 있는데 건물 외벽에만 울긋불긋 색칠을 입혀서 뭔가 시도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발상이 다르다.
맞은편에 위치한 열병합 발전소는 붉은 핏줄처럼 외관을 장식한 건물이다. 마치 사람 몸속의 핏줄처럼 에너지가 도시의 곳곳을 이어준다는 발상이다. 다소 기괴스럽게 보이지만 건물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하여 어떤 곳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훈데르트바서는 우리에게 충격이었다. 바서는 인간의 꿈이 어떻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누구나 그렇게 상상은 해보지만 바서는 그것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우리도 저렇게 살 수 없을까를 생각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제도와 관습, 그리고 고정관념이 어쩌면 그 꿈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비엔나의 밤하늘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권순긍∙문학평론가. 저서 <우리소설 토론해 봅시다>, <역사와 문학적 진실>,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 <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 <선생님과 함께 읽는 한국고전소설>, <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 교육인적자원부 교과서 검정․심의의원, 대학교육협의회 대학입학전형 심의위원장 역임. 현재 한국고소설학회 회장. 세명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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