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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시 깊이 읽기/이성복의 시 사랑일기/노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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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여름호)시 깊이 읽기/이성복의 시 사랑일기/노지영
온몸의 언어와 사랑 보존의 법칙
사랑日記
이 성 복
1.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늙은 風車, 휘이 돌려 보시지
몸은 녹슬은 기계, 즐거움에 괴로움 섞어
잠을 만드는 기계
몸은 벌집, 苦痛이 들쑤신 벌집
몸은 눈도 코도 없지만 몸을 쏘아보는 獵銃과
몸을 냄새 맡는 누리의 미친개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낡은 신발 값과 같으니
―當代의 몸값은 신발값과 같으니
當代의 몸이 헤고 닳아, 참으로 연한 뱃가죽 보이누나
2.
한 마리 말을 옭아매는 馬車의 끈은, 끊어지지 않는
馬車의 사랑 馬車의 꿈 사랑한다 가엾은 내……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가늘은 낚싯줄은
물고기의 사랑, 사랑은 입으로 말하여지고 사랑은 입을 꿰뚫고
그래, 개를 걷어차는 구둣발은, 구두를 닮은
소가죽의 사랑 픽, 쓰러지며 소가 남긴 사랑
죽은 나무는 자라지 않지만 죽은 나무의 괴로움은 자라고
지금 밀물은 바로 그 썰물이었으며 愛人은
愛人을 닮은 수렁이었고 愛人을 닮은 무딘 칼이었고 愛人을 닮은 不安이었고
그래, 온 몸으로 번지는 每毒의 사랑
문드러지면서 입술이, 허벅지가 表現하는 아기자기한 사랑
어머니, 저의 밥은 따뜻한 죽음이요 저의 잠은 비좁은 壽依요
어머니 저는 낙타요 바늘이요 聖者요 聖者의 밥그릇이요 어머니, 저는
견디어라 얘야, 네 꼬리가 생길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마라,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네가 갈 때까지
네 혓바닥은 괴로움의 혓바닥이요 네 손바닥은 병든 나무의 나뭇잎이요
3.
어느날 엄마, 내가 아주 배고프고 다리 아파 목마른 논에
벼포기로 섰다면 엄마, 그 소식 멀리서 전해 듣고 맨발로
뛰어오셔 얘야 가자 아버지랑 형이랑 너 기다리느라
잠 한숨 못 잔단다 집에 가자 내가 잘못했어 엄마, 그러시겠어요?
그러실 테지만 난 못 돌아가요 뿌리가 끊어지면 물을
못 먹어요 엄마,제 이삭이나 넉넉히 훑어가시지요
어느날 엄마, 내 살 길이 아주 가파르고 군데군데 끊어지기도 한다면
엄마, 얘야 내 등에 업혀라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지 너만 보면
마음 아프구나 하시며 내 살 길처럼 타박타박 걸어가시겠어요?
엄마 걸어가시겠어요? 발굽이 부러지면
등으로 기어 날 안고 가시겠지만 엄마, 난 못 가요
내 四肢는 못박혀 고름 흘려요
엄마, 어느날 저녁 구름을 밀어내며 얘야
여기 예루살렘이야 痛哭으로 壁을 만든 나의 안방이야
요단, 잔잔하단다 요단, 지금 건너라, 빨리 가시면
내가 건너가겠어요? 어느게 나룻배인가요? 아니예요
그건 쓰러진 누이예요 엄마, 누이가 아파요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에 수록
1. 사랑의 행방을 찾아서
세계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다. 사랑의 실체를 알기 위해 세계는 언제나 사랑 중이다. 사랑이란 늘 결핍되어 홀로 설 수 없는 주체와 그 주체에게서 온전히 파악되지 못하는 외부 대상간의 상호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그리하여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어떻게 감각하고 이해하여 다가가는가는 언제나 사랑의 기초적이고도 지난한 작업이 된다.
일찍이 김수영은 「사랑의 변주곡」이라는 시에서,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라는 유명한 전언을 한 바 있다. 김수영에게 사랑은 알아가는 것, 그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주체를 자라게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광신”이 아니고,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그릇된 명상”도 아닌 사랑은 시라는 양식 속에서 어떤 형태로 발화될 수 있을까. 김수영 말처럼 “혼돈으로서의 시”가 ‘온몸’의 사랑으로 이해되려면 어떠한 변주가 필요할까. 그간 사랑의 역사를 기록해 왔던 한 시인의 「사랑일기」를 엿보면서 약간의 힌트를 얻는 것도 좋을 듯하다.
「사랑일기」라는 제목을 내세우며 이 시는 시작되고 있지만, 자유연상식의 환상적인 언술구조로 인해 이 시에서 사랑의 대상을 찾아 일의적으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성복의 「사랑일기」는 주체가 절대적 대상이나 절대선의 의지를 이성적으로 정리해가는 과정 속에서 사랑의 체험을 소재로서 곁들인 형태의 시가 아닌 것이다. 사랑은 환상적인 합일의 경험을 제공하며 인간을 거대한 정신으로 올려놓지만, 동일한 인간을 그 합일에서 분리시키고 분열시켜 상실의 주체로 추락하게도 한다. 대상에 리비도를 집중하여 사랑의 대상을 심미화하기 전에 먼저 실수, 속임수, 환각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혼돈의 주체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설명하지 못하는 이러한 혼돈의 주체가 겪는 불안, 정제된 언어로 질서화하기 어려운 고통의 감각은 자유 연상을 통해 다소 난해하게 분출된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가 지금 여기, 시적 주체가 처한 시공간이다. 금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정언 명령들에 시달려 또한 금지에 도전해야 하는 시공간, 육체적 구속에 놓여있는 시공간에서 억눌려 있는 시적 주체는 “마음이여”를 호명하며 마음과 정신을 몸 안으로 소환한다. 마음이 거주해야 하는 장소인 ‘몸’은 “녹슬은 기계”나 “잠을 만드는 기계”, “고통이 들쑤신 벌집”이다. “쏘아보는 엽총”이 있고, “몸을 냄새 맡는 누리의 미친 개들”이 있는 고통스러운 공간인 것이다. 이 시의 1부에서 ‘마음’은 육체의 고통스러운 감각 속에서 “헤고 닳은” “당대의 몸”에 담긴다. ‘마음’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고통 받는 육체와 구속적 현실을 경유해야 하는 것이다.
2. 세부들의 연루, 그리고 사랑 보존의 법칙
한 마리 말을 옭아매는 馬車의 끈은, 끊어지지 않는
馬車의 사랑 馬車의 꿈 사랑한다 가엾은 내……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가늘은 낚싯줄은
물고기의 사랑, 사랑은 입으로 말하여지고 사랑은 입을 꿰뚫고
그래, 개를 걷어차는 구둣발은, 구두를 닮은
소가죽의 사랑 픽, 쓰러지며 소가 남긴 사랑
이 시에서 마음의 행방, 사랑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세계의 세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 시의 2부에서는 마음이 세계 안에 ‘육화enfleshment’되는 양상이 펼쳐진다. 그것은 아주 의미 있고 성스러운 존재로 승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연쇄 속에서 그간 집중되어 오지 않았던 세부들로 떠오른다. 사소한 세부에는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이야기를 하느라 그 속에서 생략되고 외면되어 왔던 각개의 서사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로 주목받아 온 대상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존재의 속성과 연루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입으로 말하여지”는 것과 “입을 꿰뚫는” 것이 이 시에서는 동시에 조명된다. “마차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 “한 마리 말을 옭아매는 마차의 끈”이라는 세부가 드러난다. 또 “물고기의 사랑”을 말하기 위해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가늘은 낚싯줄”이 조명된다. 그리고 “개를 걷어차는” 상황 속 “구둣발”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구두를 닮은 소가죽의 사랑”과 “쓰러지며 소가 남긴 사랑”까지 동원된다. 하나의 존재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세부들의 인과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것의 기원은 세부들의 변화와 희생을 동반한 변형 속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존재한다. “지금 밀물은 바로 그 썰물이었으며” 사랑하는 “애인”이라는 존재는 “애인을 닮은 수렁”이자, “무딘 칼”이자, “불안”의 이형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자리는 결코 하나의 대상에 고착될 수 없다. ‘광신’이 대상존재에 대한 리비도의 고착이라면, 다른 세부들의 인과를 탐색하여 하나의 대상에 고착되지 않고 연루된 존재의 요소들을 파악하는 노력이야말로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마치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현상적인 형태는 변하나 삶과 사랑에 썼던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 ‘사랑 보존의 법칙’이 구현되고 있다.
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는 은유에 있어 취의Tenor와 매체Vehicle를 문학용어로써 구분하여 의미내용인 원관념과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인 보조관념을 구분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쏟아져 나오는 “A=B”라는 형태의 은유들은 취의를 보조하기 위해 동원된 매체라고 볼 수 없다. 본질과 비본질, 목적과 수단은 이 시에서 구분되지 않고 동위의 요소로서 다발적으로 언술된다. “저의 밥=따뜻한 죽음”, “저의 잠=비좁은 수의”, “저=낙타=바늘=성자=성자의 밥그릇”의 등식이 연쇄되면서 ‘죽음’과 ‘수의’는 같은 계열체가 되며, ‘낙타’와 ‘바늘’, ‘성자’와 ‘성자의 밥그릇’ 같은 인접된 요소들도 어떤 의미의 위계관계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같은 계열체로 묶인다. 야콥슨Roman Jakobson이 그토록 구분하려고 했던 통합축과 계열축의 언어는 서로 섞여버리고 인접성과 유사성으로 정렬된 언어들이 서로 융합되어, 재배치된다. 그리고 이 많은 요소들의 연루가 바로 “온 몸으로 번지는 매독의 사랑”이며,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네가 갈 때까지” 경험되고 알아가야 할 사랑의 종목들로 표현되는 것이다.
3. 은유의 몸들로 투입된 케노시스의 시학
그리하여 시의 3부에서는 이러한 사랑 속에 연루된 세목들을 두고 차마 ‘못 가는’ 주체의 정서가 주력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2부에서 등장한 대문자 ‘어머니’와는 다르게 3부에서는 가족서사 속에서 아들을 염려하는 맹목의 ‘엄마’가 등장한다. 집으로 가야하고 또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환기시켜주는 대상인 ‘엄마’를 시적 주체는 계속적으로 호명하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실 테지만 난 못 돌아가요 뿌리가 끊어지면
물을 못 먹어요 엄마, 제 이삭이나 넉넉히 훑어가시지요
‘아들’은 어떤 하나의 존재와 대상으로 걸어가고 건너가는 행위를 거부하고 있다. “뿌리가 끊어지면 물을 못 먹어요”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혈육으로서의 아버지와 형, 엄마와 같은 가족이 자신이 돌아가야 할 뿌리가 아니라, 주체의 고통에 연루된 많은 세부들의 공생애가 자신이 있어야 할 뿌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는 삶과 사랑을 향하여 “내 살 길처럼 타박타박 걸어가”는 행위를 촉구하고 있지만, 시적 주체인 아들은 다시금 못박는다. “등으로 기어 날 안고 가시겠지만 엄마, 난 못 가요/내 사지는 못박혀 고름 흘려요” 라고 외치며 자신이 못 박혀 있는 좌표를 결코 떠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상과 목적telos을 향해 돌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 명확히 나타난다.
내가 건너겠어요? 어느 게 나룻배인가요? 아니에요
그건 쓰러진 누이예요 엄마, 누이가 아파요
‘요단’을 건너 가나안이 될지도 모르는 곳을 맹목적으로 향할 수 없는 이유는 강을 건널 수 있는 ‘나룻배’라는 수단이 바로 “쓰러진 누이”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수단이 필요한 것인데, 그 ‘나룻배’로서의 운송수단이 바로 소외되어 온 인간인 ‘누이’라는 것을 시적 주체는 힘겹게 발견하고 있다. 시적 주체인 ‘내’가 몸의 고통을 인식하면서부터 시작한 시는 ‘타자’인 누이의 아픔을 함께 통각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이 ‘내’가 아픈 이유는 지금 이곳에서 소외된 누이가 아프기 때문이다. 주체의 아픔에서 시작하여 타자의 아픔에 도달하는 이 시의 여정에는 “내 살 길”을 향한 ‘광신’적인 건너감이 없다. 가장 보잘것없는 세부로 육화되어 주체의 삶과 뿌리를 지탱하고 있는 무수한 사랑의 인과요소들이 거대한 몸의 고통으로 출현하고 또 낱낱이 고백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의미를 절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랑의 본래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 다른 몸이 되는 ‘케노시스Kenosis’의 시학을 향하고 있다.
잊혀지거나 보잘것없이 취급되어 소외되어 왔던 사소한 세부들에 마음의 ‘사랑’을 투입하는 일, 그것이 시의 역할이다. 그리고 현상과 관계 맺고 있는 요소들의 뿌리를 드러내면서 새로운 가치와 접붙여주는 일, 그것이 바로 은유의 역할이다. 타자화, 수단화되어왔던 대상들은 ‘혼돈의 은유’ 형식 속에서 피와 살과 몸의 전체 형상을 취함으로써 주체의 ‘사랑’과 연대될 수 있다. 주체의 고통과 관계된 대상들을 통해 외부 세계와 연루된 주체의 위치를 발견하고, 사랑이라는 ‘복잡성의 질서’를 알아가는 순간, 대상에 대한 고착과 광신을 벗어나는 사랑의 출구는 펼쳐질 것이다.
시와 사랑의 관계는 그렇게 ‘온몸’이다. 모든 것들의 관계맺음 속에서 “폭력이 없는 나라”에 “조금씩 다가가”는 ‘시’의 여정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시가 사랑의 관계가 되고, 사랑이 시의 에너지가 되는 사랑 보존의 법칙이, 존재에게는 영원히 펼쳐질 테니 말이다. 김수영에게 보존된 에너지로 이성복 또한 ‘아들’에게, ‘광신’도 ‘폭력’도 아닌 “사랑”을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아들아 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이성복, 「아들에게」 중에서
노지영∙2010년 ≪시인≫으로 평론 활동 시작. 방송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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