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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시/김왕노/희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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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사 외 1편
밤새 내 꿈속의 하루는 그들로 인해 난장판이었다.
내 꿈을 얕잡아본 초원의 루니 들소니 코끼리니 하이에나니 자칼이니
내 꿈의 방심이었던가, 꿈의 개방이었던가?
꿈에 깨어나도 하이에나 울음 길게 귀에 남아있다.
내 꿈이 그만큼 방대하다는 것은 세상을 내 꿈속에
다 들여다 놓을 수 있다는 것
한 번도 벗기지 못한 어둠의 껍질도 벗길 수 있다는 것
그 감동에 키스를 오래 할 수도 있다는 것
아직도 내 꿈속에 오면 다 깨어날 식물인간이니
내 꿈으로 오면 불임이 끝나고 수태가 될 새니 고라니니
새댁 그 모두에게 내 꿈속 출입은 무료다.
고로쇠나무 수액처럼 구멍을 내어 꿈을 채취해 가도 좋다.
나는 내 꿈을 희사한다.
그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누가 기증한 꿈을
나도 끝없이 누려왔으므로
그 꿈으로 세상을 잘 버티고 잘 살아왔으므로
나는 꿈을 거침없이 내놓는다.
지구가 내 꿈에 처박혀서 앓더라도 수발을 들 꿈
병든 꽃이 가까스로 피어도 끝없이 보듬어 안을 꿈
난 단숨에 내 묵은 천 년의 꿈마저 다 내놓는다.
게워낸다.
내 꿈으로 불구의 날이 다시 일어서 도시를 초원으로 뒤덮을 것이다.
난 다시 내 꿈을 꾸리기도 해 북벌의 말 떼 수천 수 만 마리 먹일 것이다.
현해탄을 건너 핵폭탄으로 내릴 먹장구름의 꿈을 풀잎마다 키울 것이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거친 초원을 내닫는 초식성동물 같아서
높은 산맥을 넘어가는 야크의 굽 같아서
밤새 야크의 등허리에 내리는 눈 같아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오후의 카페에 앉아 추억 몇 스푼을 탄 커피를 마시면서
호수에 새겨지는 구름이나 새의 깃을 읽는 것이 아니어서
낭만의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어서 사랑아.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마차를 타고 방울소리 딸랑이면서 언덕을 넘어가지 않고
징검다리 건너서 미루나무 숲을 지나서
신발 흙탕물에 젖어서 가는 내 사랑이어서 정말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월광곡을 소녀의 기도를 은파를 듣기보다는
흐린 창을 열고 낙숫물 소리를 들어서
서럽도록 짙은 풀벌레 소리나 들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반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서
성호를 긋는 것이 아니어서
그냥 밤하늘 초롱초롱 별을 보면서 그리움 못 견뎌 눈물 글썽거려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이념서적을 넘기면서 밑줄 긋기보다는
길가의 민들레꽃이나 푸른 사과를 바라보면서
1번 국도가 어디 있을
깻잎 같은 추억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려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창가 아래서 아리아를 부르기보다는
패, 경, 옥 그리고 명자꽃 누나 수국꽃 동생
칡꽃 이모 싸리 꽃고모라 부르는 것이어서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와인을 마시기보다는 한 사발 막걸리
포크와 나이프로 청춘을 쓸기보다는 숟가락 젓가락으로
늦은 밥상 앞에 앉아서 미안하다. 사랑아, 그래서 미안하다.
미안하지만 사랑아, 네가 곁에 없어야 사랑이라 부른다.
곁에 있으면 부르는 게 수줍어 부르지 못하지만 없을 때만
더욱 다정하게 불러 미안하다. 잉걸불 가슴으로 불러 미안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밤하늘을 향해 우우 불러서 미안하다.
그렇게 내 사랑은 촌스러운 것이어서 사랑아, 정말 미안하다.
사랑아, 내 사랑은 늘 클래식한 것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김왕노 경북 포항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 <사진속의 바다> 등.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수상,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시와 경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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