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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흐름진단/양경언/당연한 것/당연하지 않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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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476회 작성일 13-03-2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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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진단(계간평)

양경언당연한 것/당연하지 않은 것

 

 

∙김소연, 「열대어는 차갑다」(≪창작과 비평≫ 2012년 여름)

∙조연호, 「표본가족」(≪리토피아≫ 2012년 여름)

∙손미, 「미끄럼틀」(≪창작과 비평≫ 2012년 여름)

∙김현, 「발생학」(≪시사사≫ 2012년 7~8월)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

―진은영, 「언제나」 중

 

쉽게 오해하고, 쉽게 이해한다. 그것은 말이 품고 있는 당연한 속성이다. 쉽게 이해한다는 속성을 오해해선 안 된다. 이는 불완전한 통로라 할지언정, 말을 매개로 서로를 바라볼 지점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 너와 나 사이에 최소한의 공유가 가능하다는 것, 먼 옛날 우리가 바벨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지 오래라 해도 먼 훗날 우리는 바벨탑에 대한 기억을 원천 삼아 지구 어디에서건 스치듯 만날 여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기입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시를 이루고 있는 말들이 세계를 새로이 창안할 때, 말의 속성은 고스란히 유지된다. 때문에 시를 통해 세계를 그대로 그려내겠다는 호언장담은 어쩌면 만용이다. 활자라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시라는 몸은 그러므로 가장 설득적이지 못한 문자로 구사된 삶에의 증거다. 다르게 말하자면, 시는 선언을 하기 위해 비非선언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혹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하나의 장면을 제시하고, 정正을 위해 반反에 서 있으며, 논리를 위해 감성을 택하는 것이다. 직설(直說, 혹은 直舌)이 아닌 곡설曲舌로 당연한 말을 당연하지 못한 질서로 건네는 세계. 따라서 ‘쉽게 오해하고, 쉽게 이해한다’는 속성은 시에선 고스란히 통용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는 그 속성을 매우 전위적으로 구사하고 있지 않은가.

시가 말의 전위일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세계에 기대하는 당연한 것들이 언제나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수영이 말했듯, 이 모든 상황을 시는 감당해낸다. 그렇기에 우리가 시를 맞이하기 위해서 헤아려야 할 일은 마치 시가 말의 속성을 전위적으로 구현해내듯, 시를 이루고 있는 활자가 새겨진 종이의 가장자리, 흰 종이만이 놓여 있는 공터마저도 바라보고자 하는 감각의 마련이다. 혹은 문장에서 반드시 필요한 성분은 아니지만 문장이 창조한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부사를 짚어내는 인식이 필요하다. 창조를 위해서 그 어떤 배제도 허용치 않는 방식을 우리는 시로부터 얻는다. 그러니 이해와 오해를 존립케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를 ‘좀 더’의 방식이라 하자. 혹은 ‘더’에 미치지 못한 ‘좀 덜’의 방식이라 해도 될 것 같다.

 

1.

 

사월은 차갑다

사월의 돌은 더 차갑다

사월의 돌을 손에 쥔 사람은 어째서 뜨거운가

그는 어째서 가까운가

마루 아래 요정이 산다고 믿은 적이 있다

잃어버린 세계는 거기서 잘 살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 뜨거워질 수 있다

하나의 문장으로도 세계는 금이 간다

이곳은 차가우므로 더 유리하겠지

뒤뚱거리는 아기처럼

닫힌 문이 뒤뚱거린다

문에게도 가능성이 있다

맥주가 목젖을 가시화한다

안주가 어금니를 가시화한다

우리의 대화를 대신한다

대화는 기억해둔 것들을 잃게 한다

사월은 유실물보관소일지 모른다

솥에 뚜껑이 없었다면

쌀은 밥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뜨거운 밥에 차가운 숟가락을 넣는 건

어째서 기예에 가까운가

손이 시려운 자가 장갑을 낀다

손목을 그어본 자가 시계를 찬다

문이 열린다

찬 바람이 들이친다

바다는 사월의 날씨를 집결한다

해파리가 뜨겁다 가오리가 가깝다

열대어는 차갑다

심해어는 내 방을 엿본다

―김소연, 「열대어는 차갑다」 전문, ≪창작과 비평≫ 2012년 여름

 

인간의 유한한 삶이 덧없어지길 원치 않기 때문에 부단히 의미 부여를 한다. 무언가에 대한 ‘기대’를 끊지 못하는 우리들의 실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우리가 경유한 체험에 의거한 것이므로) 관습적인 판단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상상해도 그것은 언제나 여기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인간의 유한한 삶이 비극이라고 여겨지는 까닭은 우리가 마련하는 기대가 언제나 한계를 내정한 채로 만들어지므로 기대의 좌절이 기실 당연하기 때문이다. 가령 열대 기후 속에서도 푸른 물결을 헤엄쳐 나갈 열대어에 대한 연상을 요구할 때, 당신은 쉽게 차가운 느낌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대다. “열대어는 차갑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열대의 뜨거움을 경유해 차가움으로 기대되는 열대어를 떠올리며, 우리는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혹은 그로부터 어떤 구원을 바랄 수 있을까.

인용한 위의 시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라는 상상의 틀이 시인에겐 ‘여기+∂’ 로 전환된다). 이를테면 우리의 간편한 기대에서부터 한 발 ‘더’ 들어가는 태도. 한 발 ‘더’ 들어갈 때, 앞서 우리가 느낀 ‘차가움’은 전복된다. ‘더 차가운’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월은 차갑지만, ‘사월을 견디는 돌’은 그보다 ‘더’ 차갑다. 차가움이 두 번 반복될 때, ‘더’의 감각을 깨달은 이에게 그것은 ‘뜨거움’으로 전달된다. 반복과 전복이 기대와 기대의 좌절 사이에서 의미를 유영하게 하는 것이다. 좌절되는 것은 한계가 명확한 기대일 뿐, 기대치 않은 일들이 ‘더’의 감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열대어는 차가울 테지만 열대어보다 ‘더’ 깊은 물에서 헤엄치고 있을 심해어가 어떤 온도를 갖고 있을지 우리는 쉽게 짐작하지 못한다. 다만 이들이 세계 어딘가에서 우리와 공존한다는 사실, 따라서 심해어는 내가 몸담고 있는 방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폭 바깥에서 다시 ‘나’를 엿볼 수도 있다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관습적인 판단으로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우리들의 실상이 초라하더라도, 결코 슬퍼하지 말 것. 무엇에 대한 기대조차도 한 번 ‘더’ 들여다봄으로써 세계가 자아내는 감정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루 아래 요정이 산다고 믿은 적이 있다”는 언술은 우리가 현재 그 요정의 존재를 믿지 않을 만큼 순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 처해있음을 알린다. 이는 ‘마루 아래 요정’이 여전히 건재했으면 하는 ‘기대’가 은근슬쩍 끼어들 수 있도록 의미를 열어둔 언술인데, 이를 통해 지금이 비록 순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일지언정 그 순수를 요청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지 않겠느냐는 요청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루 아래 요정이 산다고 믿은 적이 있다”는 언술을 통해 시적 주체가 꺼내 든 ‘기대’는 ‘잃어버린 세계’가 ‘거기서’, 그러니까 상실했다고 여겼던 ‘마루 아래’에서 ‘잘 살고 있다’는 기대 이상의 확신을 가능케 한다. ‘마루 아래 요정’이 산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노라고 말하면서 비롯되는 기대를 경유해 현재 상실한 대상을 떠올리게 하고, 그 기대를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여 종국에는 ‘잃어버린 세계’를 어딘가에(“거기서”) 정착시키는 일. 이는 상실이 기대를 통해 상상으로 전복되는 상황이자 우리를 충분히 ‘뜨거워’지게 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시는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상징체계를 걷어낸 채 알몸으로 세계와 마주한다는 의미에서) 온도를 가진 짐승의 심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우리는 ‘~게 한다’는 방식의 진술을 사용하면서 시로 말미암아 변화하는 우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옳다, “하나의 문장으로도 세계는 금이 간다.” 문장에 품은 기대와 기대를 추동하는 ‘더’의 끼어듦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의미의 전복만으로도 차가움은 뜨거움으로 전화할 수 있다. 문자들이 창조한 세계에서도 이러한데, 실제의 일들은 오죽할까. 한 명의 사람으로도, 또는 하나의 사건으로도 세계는 금이 간다. 그러니 모든 사물과 존재들에는 누구 하나 빠짐없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한 삶이 덧없는 까닭에, 덧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삶이 미처 열어 보이지 않은 농축된 무언가가 기대를 촉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때 ‘기대’는 ‘관습적인 판단’의 다른 이름으로 자리하지 않고, 어떤 사물이 혹은 어떤 존재가 우리와 어느 순간 만나길 바라면서 고이 내장해 온 ‘기다림’의 지점으로 자리한다. 맥주가 목젖을 가시화하고, 안주가 어금니를 가시화하듯이 그 지점은 시에서처럼 ‘더’ 들여다 볼 때에야 발견할 수 있는 (미처 가깝다고 여기지 못해왔던 것들의) ‘가까운’ 곳을 일컫는다. 솥에 뚜껑이 있어야 쌀이 밥으로의 변화를 견딜 수 있듯, (미처 중요하다 여기지 못해왔을 만큼) 사소한 것들의 ‘중요한’ 위치를 일컫는다. 기대의 좌절이 인간의 유한한 삶을 비극으로 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대가 내포한 다양한 가능성이 유한한 삶에 불확실한 감정들을 빚어내는 것이다. 여기서의 ‘기대’는 미래에 저당 잡히지 않은 채, 현재를 부각시키는 인식이다. 따라서 기대는 더욱 좌절되어야 하고, 좌절 이후에 만들어지는 기대란 (욕심을 부려보자면) 다른 말로 ‘희망’일 수 있다. 그것은 삶에의 희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의 제목도, ‘열대어가 차갑다’가 아닌 ‘열대어는 차갑다’이지 않은가. “열대어‘가’ 차갑다”라는 문장 뒤에는 단절이 남는다. 열대어가 차갑다는 진술만으로 세계에 대한 진술은 정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대어‘는’ 차갑다”라는 문장 뒤에는 ‘그리고’가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계속적으로 사유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이것은 기대이자 희망에 가깝다.

 

2.

‘더’라는 말에서 우리는 다시금 사유할 수 있는 공백을 발견한다. ‘더’에 미치지 못한, ‘덜’은 어떠한가.

 

사소한 것을 코에 달고

오랜만에 조금 덜 가난한 엄마를 만난다

조금 덜 가난한 이파리 뒤

예배와 예배 사이 고철을 주웠다

숙제를 못하는 자식을 벌할 권위를 얻기 위해

고철의 무법함이 썩 빛난다

뒤늦게 나팔꽃이 된 엄마는 곤충침에 꽂히고 나서

그 땅에 피난소를 지었으니 날개를 떼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나는 당신과 새벽까지 고아가 되어 얘기 나눴으니까

자신이 한 행동의 모든 주인을 잃을 나이에

줄곧 내게 흔들던 거머리 숲을 내려놓고 엄마는

조금 덜 거덜났다

조금 덜 거덜난 봄-여름 이웃

그이가 길 틔우는 일은 명사십리 소금밭에도 이르지 못하네

벌레 모자母子는 빛과 소금에 대해 조금 얘기하고

내 은혜가 자녀의 평탄을 지휘하는 자의 것이게 하소서

지옥에 안 가는 노래를 불렀다

―조연호, 「표본가족」 전문, ≪리토피아≫2012년 여름

 

조금 ‘덜’ 가난한 엄마를 만나고 조금 ‘덜’ 가난한 시간에 머물러 있다 보니 시에서 말하는 자와 ‘엄마’는 표본가족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된다. 대신 ‘나’와 ‘엄마’ 모두에게 주어진 역할까지의 걸음을 ‘덜’어내니, 이들은 모두 단독자가 된다. ‘나’와 ‘엄마’가 단독자가 되어 새벽까지 고아처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에 ‘덜’ 이르렀기 때문. 이들은 누추한 육체를 떠안으면서 서로를 버거워하기 보다는 ‘숲을 내려놓고’, 각자가 ‘평탄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는 당연한 기대를 거두어들이는 방식, 서로가 조금 덜 ‘거덜’ 날 수 있는 방식, 이윽고 지옥에 안 가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방식. 이 때 ‘나’와 ‘당신’ 사이에 마련된 믿음은 구복과 구원에 이르지 않는 다만 사소한 일상의 영위로, 현재에의 초청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덜’을 꾸며주는 ‘조금’은 이 같은 사유를 가능케 하는 쉼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떠맡는다.

 

좀, 앉을게

구둣발로 들어왔다

차갑지만 둥근

여기에 좀 있을게

네 속에

창백한 애인이 피아노를 친다

양옥집 애 같다

고개 돌리면 입댈 수 있는 거리

어쩌면 이것이 절정일 수 있겠다

우린 몰래 무릎을 열고

긴 관 속을 헤매고 다녔지

조용히 바라보았어

떠다니는 해파리들

망토를 걸치고 뛰어내려

다른 곳으로

다른 곳으로

깊은 모래 속으로

만질 때마다 번지는 핏물

여자를 버린 애인과 누우면

미끄러운 것에 눌리는 꿈을 꾼다

몸을 말아넣으면

나는 천천히 굴러떨어져

손잡이도 없는

네 속에

그만 좀, 앉을게

이제

나도 너의 물집인데

―손미, 「미끄럼틀」 전문, ≪창작과 비평≫ 2012년 여름

 

여기 ‘좀’ 앉겠다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사물에게, 사람에게-양해를 구할 때야 ‘다른 곳으로’의 기대가, 상상이 가능해진다. 삶이 미처 열어 보이지 않은 무언가가 기대를 촉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어떤 당연한 일일지라도 말을 걸고, 양해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좀, 앉을게”, “여기에 좀 있을게” 와 같이 양해를 구하는 일은 ‘너’의 속을 존중하고픈 배려가 내게 있다는 것. 이 때 당연한 일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고, 내가 몸을 말아 넣어 너의 속을 천천히 굴러다니는 일은 새삼스럽게 경이로운 일이 된다. 또한 너를 중심으로 나를 사유하므로, 너의 물집으로 존재할 수 있는 나의 위치를,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생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맥락을 이해하는 일이 된다. 시에서 ‘나’는 얼마든지 ‘너’로부터 비롯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미의 전복 속에서도 그 의미는 서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세계는 곧 ‘좀,’의 방식으로 다른 기대를, 다른 상상을 촉발시켜나가는 것이다. 이는 유한한 인간의 삶이 생성을 존속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3.

그리하여 우리는 쉬운 오해와 쉬운 이해가 서로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면서 얽혀 들어가는 시를 아름답다고 판별할 수 있게 된다.

 

빛이 있었다 ☼

헌책방에 들렀다

서양소설 한 권을 샀다

옮긴이 진은영

그즈음 진은영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면

진은영은 최근에 빛을 번역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시를 쓰고 종종 철학책을 읽는

진은영을 알고 있다

나는

진은영을 진은영으로

진은영의 빛을 진은영의 빛으로

가능케 했다

오늘

물에 만 밥과

고추장멸치볶음을 치우고

빛의 날개를 펼치고

알게 된 사실이다

사실

빛을 옮긴이는

진은영이며 진은영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들도 있다

세계에 있다

진은영이 서양소설을 모국어로 읽는 세계

진은영이 시를 번역하고 종종 철학책을 쓰는 세계

한국 같으면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재임 중인 세계

사실인즉

빛의 뒷면에 붙여진

견출지를 떼어내면

그 어둠, 세계의 정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

 

☼ (다음의 각주는 본문의 내용과는 상관없음을 밝혀둔다.) 빛은 팸플릿과 같이 도착했다. 빛을 펼쳤다. 어둠이 물로 들어 있었다. 일테면, 불 꺼진 식당에 대한 고공으로 올라간 버스에 대한 기지를 수호하는 이들에 대한 스물 두 명의 유령이 굴리는 자동차에 대한.

☼ (다음의 각주는 앞선 각주와 이어진다.) 그러나 그 팸플릿은 무엇보다 검은 물, 수 만 세포에 깃든 빛남에 대한 것이었다. 일테면, 생물들의 우정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시는 누구를 위해 낭독하는가 그 어둠의 전과(자)는 언제고 합당한 별을 달게 되는가.

―김현, 「발생학」 전문, ≪시사사≫ 2012년 7-8월

 

인용한 위의 시에서 우리는 ‘진은영’과 ‘김현’이라는 실제 시인들의 만남을 기대하고, 그 찰나의 만남에 대해 상상한다. 하지만 시는 우리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므로, 실제의 ‘진은영’과 ‘김현’은 그 자리에 없고, 이 상황을 ‘옮긴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빛을 옮긴이는/진은영이며 진은영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를 통해 여러 개의 사실을 경험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이제껏 꾸려왔던 체험과는 전혀 다른 통로로 형성된 종류의 일들일 것이다. 가령 어떤 시인이 우리가 품고 있는 기대 밖의 언어를 읽는 세계, 어떤 사람이 시를 ‘번역’하고, 종종 ‘철학책’을 쓰는 세계,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기이하게도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재임 중’에 벌어지고 있다는 세계. 이러한 사실들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은 상황으로 (덜 사실적인 상황으로) 표현되고 있으므로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고, 그 이해는 어떻게 오해되는가. 혹은 이 상황은 어떻게 오해되고 있고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실인즉 세계를 발생케 하는 ‘빛’은 ‘어둠’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인용한 시에서 발생한 세계의 비밀을 이해/오해하기 위해 덧붙여진 각주에 힘을 빌어야 한다. ‘오해’라는 말을 오해해선 안 된다. 각주는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다는 시인의 언술을 오해하고, 각주에 힘입어야만 우리는 이 세계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의 지하 통로와 같은 각주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이천십년 이후 우리의 현실 이면에 농축되어 있는 비가시적인 일들에 대한 고민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생물들의 우정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시는 누구를 위해 낭독하는가”, “어둠의 전과(자)는 언제고 합당한 별을 달게 되는가.” 이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싸움터였던 ‘불 꺼진 식당’과 ‘고공을 향해’ 출발했던 ‘버스’와 사회적인 타살을 선고받은 누군가의 ‘죽음’과의 연관성 속에서야 답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그러니 시를 이루고 있는 말들이 세계를 창안할 때, 본문 바깥에 놓인 어떤 뼈와 살들은 시라는 몸을 가장 시답게 만들어 내는 근간이다. 그리고 창안된 세계는 이미 가장 현실적인 현실임을.

다시금 곱씹어보건대, 시에선 창조를 위해 그 어떤 배제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유한한 인간의 사회에서 존속시켜야 할 윤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당연한 것들의 당연하지 않은 질서와 당연한 것에 대한 재고로 기입되는 당연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감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양경언∙1985년 제주 출생.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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