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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미니서사/김혜정/여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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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923회 작성일 13-03-2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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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여름의 끝

 

 

십칠 년 전, 남해의 작은 섬마을에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몇 십 년 만에 온 최대의 태풍이었습니다. 그 섬의 고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은 새내기 선생이었던 그는 퇴근길에 소주 한 병을 사가지고 자취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집주인은 도시에 나가 살았으므로 혼자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밤이 되자 바람이 신음을 내지르고 비가 세차게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술기운이 오르자 그는 바다가 보고 싶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파도가 그를 덮칠 기세로 밀려왔습니다. 그는 등줄기가 뻐근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때 한 소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한눈에 소녀를 알아보았습니다. 유난히 하얀 피부, 가냘픈 몸,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사소한 충격에도 금세 잠이 들곤 하는 병까지 앓고 있는 소녀. 이따금 굴이나 바지락을 캐어 그의 방 앞에 놓아두곤 해서 그를 당혹스럽게 했던 소녀였습니다.

소녀는 넋이 나간 채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울음소리는 영락없이 포효하는 짐승 울음소리였습니다. 파도가 소녀의 집은 물론 그녀의 부모님까지 휩쓸어갔던 것입니다.

소중한 사람이 별안간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어렸을 때 화재로 부모를 잃었으니까요. 그는 소녀를 들쳐 업고 자취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소녀는 그대로 잠이 들어 이틀이나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녀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습니다. 아주 편안한 미소였다고요. 그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모든 것이 지워지기를 바랐습니다.

드디어 폭우도 태풍도 잠잠해졌습니다. 그는 그녀를 홀로 남겨둔 채 출근했습니다. 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그녀가 걱정되었습니다. 집에 돌아갔을 때 그녀는 그를 위해 밥상을 차려두었습니다. 마치 그녀와 그가 처음부터 함께 살아왔던 것처럼 모든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했던 것이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총각선생이 장애가 있는 여학생을 건드리고는 숨겨두고 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와 그가 더 이상 한 집에서 살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말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하는 그녀를 그는 차마 떨치지 못했습니다. 작은 섬마을에 소문은 점점 흉흉해졌습니다. 정신지체아이자 고아인 제자를 범한 파렴치한.

세상의 규범 앞에서 결국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사직서를 내고 그녀와 함께 곧장 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요. 그 여름의 끝, 그녀는 한 아이를 잉태하였고 그는 그 아이를 태풍이 준 선물이라 여겼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섬마을로 가는 중입니다. 뉴스는 곧 태풍이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하는군요.

 

김혜정∙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장편소설 <달의 문>으로 서라벌문학상 신인상 수상.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장편소설 <독립명랑소녀>로 ‘2010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경기국제통상고등학교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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