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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산문연재/윤의섭의 포에티카/표현의 技術·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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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연재/윤의섭의 포에티카/표현의 技術·3․
훌륭한 표현은 감각적으로 발현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의도에 의해 빚어지는 것이지만, 아무리 의도를 했더라도 모든 시의 표현이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요지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최적의 표현을 위해서는 시인의 오랜 노력이 곁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노력이란 자신만의 개성이 담길 수 있도록 다양한 실험과 모색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한편 표현은 어휘와 문체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체는 시를 쓰는 시인의 고정적이면서도 개성적인 표현 양식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갖는다. 이 문체를 다양한 시적 대상을 표현하고자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감각을 갖기 위해서는 역시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문체를 버리고 새로운 문체를 습득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내게도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문체를 바꾸기 위해 화려한 문장력을 보여주는 시를 거울삼아 무던히도 쓰고 지우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다. 그 결과는 빠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기존 문체를 완전히 바꿀 수 없다. 결국 자신의 문체와 새롭게 시도한 문체가 합쳐져 몇 달, 혹은 몇 년 뒤 새로운 문체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새로운 문체가 지금의 문체와 비교하여 결코 좋은 문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문제는 바뀐 문체는 바뀌기 전의 문체로 회복될 수 없다는 데 있으므로 문체의 변화를 시도할 때는 신중한 판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문체는 수사법에 의해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기도 한다. 이때 文體는 흔히 말하는 ‘Style’로 간결체, 화려체, 건조체 등의 유형을 총괄할 때 쓰는 말이어서 수사법과는 유의어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修辭를 ‘文彩’에 가까운 개념인 ‘Figure’, 즉 비유적 꾸밈이라는 한정적 의미로 대개 알고 있다. 주지하듯 수사법에는 비유법만이 아니라 강조법, 변화법도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사적 표현이 결국 그 문장의 문체에 영향을 미치므로 문체든 문채든 종국에는 문체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은유와 환유를 대표적인 수사법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이들 은유와 환유 역시 다른 수사법의 뒷받침을 통할 때 더욱 적합한 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강조법’의 한 방식인 ‘점층법’이다.
더 이상 기다리는 일 없을 때
패인 못 자국
닿을 수 없는 그림으로라도 덮어보자고
의자 위에 발끝을 들고
조금 더 위에
조금 더 위에
천장을 뚫고 윗집 7층의 벽에 22층의 벽에
아파트 옥상에 뜬 둥근 달의 거실에
달에도 못 걸고 그 위에 더 높고 먼 별의 창문에
별이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별빛에 못질을 하며
우리부리한 눈빛의 달마도를 걸고
먼 별빛
자꾸 헛것 가리키는
퍼렇게 멍든 손가락에 못질을 하며
―김점용, 「달마도를 걸다」 부분
위 시에서 ‘달마도’를 더 높이 거는 화자의 행위는 점층적인 궤도를 따르고 있다. 그 길은 ‘의자 위’, ‘조금 더 위’, ‘천장’, ‘7층’, ‘22층’, ‘옥상’, ‘달’, ‘먼 별’, ‘가느다란 먼 별빛’으로 이어져 있다. 이 궤도를 따라 화자의 행위와 심적 지향은 높고 먼 곳으로 향한다. 결국 달마도를 거는 행위(못 자국을 덮으려는 행위)는 닿을 수 없는 거리와도 같은 불가능한 심적 좌표에 이르고자 하는 안쓰러운 화자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화자의 현재적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점층적 궤도를 따라 호출된 시어들, 즉 ‘천장’, ‘7층’, ‘22층’, ‘옥상’, ‘달’, ‘먼 별’, ‘가느다란 먼 별빛’은 모두 은유이다. 이 은유가 점층법에 의해 나열되지 않았다면 이 시가 갖고 있는 의미는 결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들 은유는 상승지향적인 방향성에 따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시의 전개 과정에서 그 의미가 누적됨에 따라 화자의 안쓰러운 심정을 보다 고양시키고 확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사실 점층법을 쓴다고 해서 모든 시가 상승지향적인 방향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점층적 열거는 오히려 시를 단순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위 시는 열거의 평면성 대신 점층적 심화를 통해 입체성을 획득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청령포 영월 탄부 연하 예미를 지나
자미원으로 간다
그 큰 별에 다다라서도 성에 차지 않는지
무한의 너머를 향해 증산 사북 고한 추전으로 또 달린다
명왕성 너머에까지 가려 한다
검은 탄광 지대에 펼쳐진 하늘,
태백선을 타면 원상결 같은 작자와 시대 미상의 천문서를 탐하지 않아도
紫薇垣에 닿을 수 있다
탄광 속에는 백일흔 개의 별이 깊숙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 별에 이르는 길은 송학 연당 청령포 영월 예미……
―조용미, 「자미원 간다」 부분
위 시 역시 점층법이 쓰이고 있다. 기차의 궤도인 ‘청령포 영월 탄부 연하 예미’는 모두 해발이 높은 곳에 위치한 기차역을 따라 이어져 있다. 그리고 ‘자미원’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위치한 간이역이다. 그런데 기차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무한의 너머’, ‘증산 사북 고한 추전’, ‘명왕성 너머에까지 가려 한다.’ 결국 기차는 ‘紫薇垣’에 닿을 수 있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紫薇垣’은 큰곰자리 일부와 작은곰자리, 용자리를 포함하는 별자리의 명칭으로 ‘자미원’과 동음이의어이다. 이 별에 이르는 상승의 궤도는 점차 고양되는 존재의 초월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과정은 모두 점층적인 표현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단순한 기차역의 열거를 넘어서서, ‘명왕성’, ‘백일흔 개의 별’과 같은 흔한 은유를 넘어서서 의식과 깨달음의 상승지향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가 상승지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독자 역시 의식의 고양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시적 지평은 곧 실재적 체험으로 느껴진다. 그것은 모두 외재적 존재를 자아의 의식으로 끌어 들여 어떠한 방식으로 재배치하고 어떤 의도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감각적 전략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층적 표현 방식은 고도의 정치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긴장을 늦추거나 실패하면 평면적 열거에 그칠 수도 있는 방식이기도 하므로 신중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임의로 실패한 예를 들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어떤 시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가 그러하다는 것을 표본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본다.
점층법은 강조법의 한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았듯 점층법은 의미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의미의 심화를 이끌어내며 시적 지평의 확산 내지 가치화에도 작용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표현 방식은 활달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웅장한 문체를 형성한다. 우리가 시의 표현 방식에 좀 더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진술의 평이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나 시적인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쓰이는 시는 너무 흔하다. 상투적인 은유나 환유에 의존하여 쓰이는 시도 흔하다. 그러나 어휘의 배치, 문장의 조직, 전개 과정의 구조화에 좀 더 다른 시도, 좀 더 실험적인 표현 방식을 시도한다면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문체를 구사할 수 있다. 문제는 다시 감각이다. 어떠한 표현 방식이든 자신이 쓰고자 하는 시의 의도를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감각적인, 거의 조건반사적인 과정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개입되면 개입될수록 작위적이고 조악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의 표현 방식을 과감히 파헤쳐 보고 또 다른 방식을 모색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에 얻어지는 표현의 감각은 거의 초감각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표현의 기술은 이 초감각을 경유해야 할 것이다. 이 초감각적 표현 방식은 어떠한 지향성이라도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유도해낼 것이 분명하다.
윤의섭∙1968년 경기도 시흥 생, 1994년 ≪문학과 사회≫로 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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