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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산문/김영식/대두大頭 두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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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431회 작성일 13-03-2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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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대두大頭 두봉이

 

 

일본종합상사 서울지점에 들어와 이삼 년 쯤 되었을 때, 고교 동창 두봉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다리 건너 그의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직접 전화가 온 것은 좀 의외였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보니 얼굴도 모르는 선후배가 전화해서 인맥을 팔며 뭘 사달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얼굴 아는 동창의 전화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두봉은 무역에 관해 상담할 것이 있다며 사무실로 찾아온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지만 고교 때 그가 출연한 기억의 장면을 떠올리니 아무래도 두봉이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머리가 커서 대두라는 별명을 가진 두봉이는, 몸이 좀 땅딸막하였지만 ‘깡’이 있어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같은 중학을 나온 건철이 말로는 중학교 때 반장도 할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었다고 하는데, 고교 때 처음 한 반이 된 두봉이는 공부나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학년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를 하고 있는데 집에 간 줄 알았던 두봉이 교실 뒷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손에는 맥주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맥주병을 청소함 위에 올려놓고 두봉은 잠시 누구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잠시 후에 옆 반의 키가 크고 껄렁거리는 하마가 교실 뒷문을 걷어차고 들어왔다. “그래, 네가 날 보자고 했냐? ××놈아.” 하며 서서히 걸어 들어와 두봉의 앞에 섰다. 그러자 두봉은 몇 초의 시간을 둔 후, 씩 웃더니 청소함 위의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놈아!” 외치면서 맥주병을 들어 자기의 이마를 쳤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병의 반이 날아가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반토박의 맥주병이 손에 남았다. 두봉의 이마에는 한 줄기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마는 당황한 듯 “어, 이 새끼가!”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금세 몸을 돌려 교실 밖으로 도망쳤다. 후다닥 뒤를 쫓아 나갔다가 곧 돌아온 두봉은 이마의 피를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잽싸기도 하군. 별 것도 아닌 놈이 까불어. 이번에는 병을 잘못 깼군.”

두봉은 다음 학기 어느 날, 머리에 반창고를 붙이고 학교에 왔다. 사정을 들어보니, 어제 종로의 학원에 나갔다가 누구와 시비가 붙었다고 한다. 재수 없게도 중동고였다. 종로는 중동고 주간 및 야간 학생들이 우글거리는 동네라 나도 언젠가 건철이와 둘이서 중동 3학년들에게 돈을 뜯긴 적이 있었다. 두봉과 마주하여 노려보던 그 중동고가 갑자기 “중동 나와라!” 외치자 여기저기 골목에서 중동고가 뛰쳐나왔다. 두봉은 길가의 가게를 등에 지고 중동고에게 포위되었다. 혼자 힘으로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두봉은 몸을 뒤로 돌려서 가게의 쇼윈도를 머리로 들이박았다. 와장창! 깨지는 유리 소리에 놀란 가게 주인이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이미 중동고와 두봉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저만치 도망치고 있었다.

이학년 때 새로 부임한 젊은 영어선생님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머리가 벗겨지고 입술도 아프리카 토인처럼 두툼하여 별로 호감을 주는 인상도 아닌데다가 수업시간은 지루해서 조는 아이들이 많았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 적고 있는데 누군가 하품을 했다. “누구야, 하품한 놈 나와!” 그러자 두봉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품이 아니라 그냥 아― 했는데요.” “뭐라고, 이놈이.” 선생은 두봉의 뺨을 갈겼다. 얻어맞은 두봉이 “에이 씨”하고 내뱉자, 선생님은 더욱 화를 내며 두봉의 얼굴과 머리를 마구 연타하였다. 두봉이 선생님의 손목을 잡고 엉겼다. 그러자 선생님은 두봉을 끌고 복도로 나갔다. 우리는 우르르 밖으로 따라 나갔다. 반장과 부반장이 두봉을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두봉은 계속 머리를 선생님의 얼굴에 들이댔다. “이 자식이, 그래 한 번 박아봐.” 그러자 두봉은 “야, 너희들 들었지. 박으라고 분명히 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두봉이 선생님의 얼굴을 쿵 들이박았다. 이내 “어이쿠” 하며 선생님은 입에 손을 갖다 대고 주저앉았다. 선생님의 이빨을 와장창 깨뜨린 이학년 일학기 때의 이 사건으로 두봉은 용서받을 여지가 없이 곧바로 퇴학당했고, 그 후로 오랫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동창 아무도 오랫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제대 후의 복학생 때, 명문 S대학에 다니던 민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학교에서 두봉이를 봤는데, 그 대학 대학원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즉 두봉은 2학년 때 퇴학을 당한 후에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서울의 H대학을 졸업한 후에, S대학 무역대학원에 다닌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특수대학원이라고 해도 두봉이가 그렇다고 하니 참으로 놀랄만한 대견한 일이었다. 고교 때 뒤에서 놀던 아이치고 제대로 된 대학에 간 아이가 없었고 대학원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봉이가 중학교 때 반장도 하고 공부를 잘했다는 건철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 전설 속의 대두, 두봉이가 사무실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마에는 과거의 흉터가 두세 개 남아 있었다. 무역대학원을 나와 액세서리를 수출하는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독립하여 직접 무역을 하고 있단다. 그런데 요즘 일본 쪽이랑 무역을 하는데, 내가 일본회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움을 청하고자 왔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온 팩스를 들고 와서 내용을 묻고 그에 대한 회신을 써달라고 하였다. 나로서는 그 정도는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는 간단한 일이므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써서 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두봉이는 종종 일본에서 받은 팩스를 내게 전송하여 내용을 알려달라고 하고, 자신이 일본에 보낼 내용을 번역하여 달라고 하였다. 좀 귀찮았지만, 그래도 두봉이가 퇴학을 당하고도 조폭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 대학원까지 공부하고 나와 번듯한 일을 하고 있으니 도와줘야겠다는 선의로 담담히 처리해 주었다. 전화도 가끔 대신 해주고, 어느 날에는 일본에서 온 바이어를 명동의 식당에서 함께 만나 통역도 해 준 적이 있다. 크게 도와주지는 못해도 그래도 두봉의 일이 잘 되기를 바랐지만, 몇 달 후 두봉은 일본에서 받은 팩스를 들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찾아왔다. 팩스 내용은 수출한 물량 전체가 주문 사양에 어긋나는 불량이라 전량 반품하겠다는 통고였다. 해결 방법은 둘 밖에 없었다. 네가 돈이 많으면 다 교체해 주고 계속 거래하고, 돈이 없으면 무시하고 소식을 끊으라고 하였다. 그 다음부터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다. 일본 쪽과의 무역은 그것으로 접은 듯하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할 때에도 두어 번인가 사무실에 찾아온 적이 있었고 전화는 한 달에 한두 번 이상 걸려와 무언가 상담을 구했다. 두 반 밖에 없었던 문과 동창 중에 ‘무역업계’에 있는 친구가 나와 너 밖에 없어서 ‘고수’인 내게 많이 묻는다고 하였다. 전화를 받으면 늘 “Long time no see”의 영어 인사로 시작했고 끊을 때는 “Out” 이나 “See you again” 이었다. 어느 때는 일부러 시험 삼아 나의 서툰 영어로 길게 말을 하자 곧 동문서답이 나오며 어물거리기에 실력을 짐작하고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무역을 혼자 하기에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어느 때는 김치 수출을 한다고 하고, 몇 개월 후에는 갑자기 수출을 그만두고 인테리어 사업을 한다고 하였다. 다음에 전화 왔을 때는 어느 회사에 취직을 했다가, 다음 전화 때는 회사에서 싸우고 나와 다시 혼자 무역을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전화가 올 때마다 하는 일이 계속 바뀌었다. 점점 세월이 갈수록 두봉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가 늘어났다. 한 번은 미국의 어느 유명 브랜드의 국내 대리점권을 미국에 계시는 어머니가 따서 내게 넘겨주었는데, 국내 대리점을 어떻게 모집해야 할지, 인테리어는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등등 고민이 많다고 하였다. 말을 들어보고 단번에 거짓인 줄 알았지만, 내가 한가한 때는, 이런저런 어드바이스를 해주며 농담식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동창 모임에 나가 어쩌다 두봉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글쎄 그 자리에 있는 친구 대부분이 두봉이 전화를 받았거나 사무실로 찾아와 만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S대학에서 두봉이를 처음 봤다는 공인회계사 민재에게는 자신의 세금 및 재무 관계를 상담한다고 회사로 집으로 전화가 수시로 왔고, 경찰인 욱환이에게도 전화를 하여 누가 돈 떼먹고 도망갔는데 찾아달라고 하거나 누구 전과를 조회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두봉이는 그동안 고교 선후배 중에 각 업계에서 성공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인맥’을 쌓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는 무역업계의 고수랍시고 찾아오고 전화하였던 것이다. 그날 동창들의 결론은, 귀찮긴 하지만 두봉이가 학교 때 놀던 가락으로 어두운 세계로 빠지지 않고 그래도 건전하게 뭔가 하려고 하니 어려운 게 아니면 도와줘야지 하는 것이었다.

어느 때부터는 무역 일보다는 개인적인 상담이 많이 늘었다. 매번 전화가 길었다. 내가 적당한 타이밍에 끊지 않으면 삼십 분도 이어졌다. 말이 횡설수설하며 알맹이가 없고 의심스러운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 요즘 여순경과 교제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상담도 들었고, 어느 때는 공사장 밥집 아줌마가 자기를 귀찮게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이곳에 형이 둘이 있는데 자기를 무시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면서 자기 앞으로 수만 평의 땅을 등기해 주었는데 증권회사 다니는 둘째 형이 그것을 뺏으려고 한다며 심한 욕까지 내뱉었다. 조만간에 미국 어머니한테 가겠다고도 했다.

다시 한 동안 전화가 없다가 오랜만에 전화가 와서, 길을 가다가 쓰러져서 정신을 잃어 입원했다가 나왔단다. 사고 치고 그 동안 감방에 있었는지도 몰랐다. 원래 허황된 말이 많고 시간 때우는 말이 많은지라 그냥 그런가 하며 넘어갔다. 매번 적당한 대꾸를 해주고 전화를 적당히 끊었지만 어느 날 두봉이는 오랜 넋두리 끝에, 그래도 너처럼 상담에 잘 응해주는 사람이 없어. 전화를 받아줘 고맙다고 하며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나는 당장 불러내 술이라도 한 잔 사주고 싶었지만 내일 새벽의 출장 걱정으로 술 먹자는 말을 목에서 삼켰다.

그 후로 오랫동안 전화가 없었다. 간간이 걸려오던 전화가 갑자기 오지 않으니 궁금해졌다.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연락이 끊긴 것은 마찬가지였다. 연락이 한 동안 없어도 두봉은 매년 연말에 직접 붓펜으로 쓴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주었는데 그 해 연말의 크리스마스에는 카드도 오지 않았다. 나는 매번 받기만 했지 카드를 보낸 적이 없었다. 결국 그리운 어머니가 있다는 미국으로 갔는가 보지. 어느 날 갑자기 황당한 프로젝트를 들고 상담하러 나타나겠지 하며 잊고 지냈다.

다음 해에 민재와 통화를 하다가 두봉이 소식을 들었다. “야, 참, 두봉이가 죽었대! 건철이가 두봉이랑 중학교 동창이잖아. 건철이가 어떻게 지난주에 소식을 들었대……. 벌써 작년 가을에 간암으로 죽었는데 연락되는 친구들이 없어서 아무도 몰랐다는 거야. 두봉이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때는 어머니는 딴 사람이랑 결혼해서 미국에 갔다나봐. 그때부터 두봉이가 좀 이상해졌다는 거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갑자기 길에서 쓰러진 적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결국 죽을 때까지 두봉이는 혼자였다. 어머니는 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이곳의 형들은 매번 손만 벌리는 막내 두봉이를 집에 들이지 않았고 돕지도 않았다. 인테리어 사업을 한다는 것은 인테리어 공사 막일꾼으로 나갔다는 말이고, 공사장 밥집 아줌마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두봉이 무역 일이 아니라 공사장 막일을 나갔다는 말이 아닌가.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도 모두 두봉을 멀리 했다. 나도 두봉이와 거리를 두었다. 두봉의 과거뿐 아니라 무언가 정서적 불안이 느껴지는 두봉이를 채용해 줄 번듯한 회사는 없었다. 혼자의 사업도 제대로 할 돈도 능력도 운도 없이, 오랫동안 백수로 지내며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대며 무언가 현실의 끈을 잡으며 고독을 달래던 두봉이었다. 두봉의 마지막 전화가 왔을 때 술 한 잔이라도 사주었다면 하는 후회가 지금껏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두봉아, 미안해. 다음에 연락해. 술 한 잔 사며 상담해 줄게. 달의 토지 분양권을 땄다는 이야기도 좋고, 뭔가 큰 프로젝트 상담 건 있으면 찾아와…….

 

김영식∙2002년 ≪리토피아≫ 신인상. 저서로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비으로 읽는 근현대인물사>(골든에이지, 2009. 문광부 우수교양도서)가 있고, 역서로는 <라쇼몽>(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출판사, 2008), <무사시노>(구니키다 돗포, 을유문화사, 2011), <기러기>(모리 오가이, 문예출판사, 20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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