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8호(겨울호)특집/현대시의 구술성과 문자성․2/윤의섭/음유吟遊에서 독유讀遊로의 시적 무경계
페이지 정보

본문
특집
현대시의 구술성과 문자성․2
윤의섭
음유吟遊에서 독유讀遊로의 시적 무경계
1. 고려할만한 가치성
어떤 시인은 시를 쓰고 나면 몇 번이고 읽어보고 나서야 발표를 한다고 한다. 시를 읽어보는 과정에서 꺼림칙한 게 조금이라도 있으면 고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때 꺼림칙한 요소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거기엔 마음에 들지 않는 단어, 문장 표현 등이 포함되겠지만, 읽는다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뭔가 매끄럽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우선일 것으로 보인다. 즉, 시를 읽을 때 시인의 입에 착착 감기지 않으며 리듬감 없이 딱딱하게 전개되어 구술 행위를 방해하는 부분이 문제인 것이다. 이 경우 예의 위 시인은 분명히 시의 구술성을 중요한 시적 요소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어느 한 시인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필자 역시 시를 쓰면서 한 행을 서술형으로 끝낼 것인가, 명사형으로 끝낼 것인가, 이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배합할 것인가, 한 어절의 글자 수가 너무 많아 읽기 불편하지 않은가, 문장 연결어가 너무 반복되고 있지는 않는가, 중요한 문장을 의미와 감정의 고저에 따라 어떻게 배치할까 등등의 고민에 늘 부딪치는데 이는 결국 시의 리듬, 율격, 음악성 등을 고려하고 있는 것이며 결국은 시의 구술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결과인 것이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대시는 곧 ‘읽히는 시’이다. 청중에게 시를 낭송하고 천하를 주유하며 시를 음유하던 시절은 벌써 몇 백, 몇 천 년 전의 일이다. 호메르스의 서사시 역시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시가의 가창 방식은 문헌으로만 남아있고 시조의 가창도 맥이 끊겨가고 있다. 시가 문자로 기록된다는 것은 그것이 일정한 원형으로 고정됨을 의미한다. 가창자에 의해 시의 내용이 임의로 첨삭될 수 있는 가변성이 현대시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시는 특히 노래로서의 구술성을 망각한 채 태어나고 있다.
시가 ‘읽히는 시’로 정착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은 낭만주의 시의 청각적 감각을 거부하고 모더니즘 시의 시각성을 강조했던 1930년대의 사조적 경향을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이러한 풍조는 이미지, 상징 등이 시각적으로 ‘읽히는’ 가운데 구상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과거처럼 음유시인에게 돈을 주고 시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문학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 인쇄기술의 발달도 그 이유 중 한 가지로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활자화된 시의 양이 많아지고, 그것들을 구술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무엇보다 바쁜 현대사회의 환경에서는 여럿을 모아놓고 시를 낭송하는 기회를 얻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이 경우 우리는 순전히 시의 구술성에 기댈 수는 없는 것이다. ‘읽히는 시’의 고착화는 생산성, 재생성, 속도, 시공간의 제약성 등등에 의한 현대사회의 복합적 구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구술되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노래로서의 구술성을 망각했다고 해서 시의 음악성, 즉 리듬, 율격, 강약고저장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즉 시의 문자성은 여전히 시의 구술성을 내재하고 있다. 시의 구술성에 대한 기억은 표면적으로는 망각되었지만 무의식의 심층기저에 여전히 남아있어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 구술성을 자각할 수도,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시는 이미 스스로 구술성이라는 유전자적 요소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의 구술성이란 ‘노래’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읽히는 시’가 갖고 있는 ‘발화성이 내재된 시’로서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현대시는 구술성과 문자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그것은 현대시를 음유에서 독유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때의 독유란, 음유가 음악적 요소가 부각된 가변적인 가창에 가깝다고 볼 때, 문자를 있는 그대로 소리 내어 읽되, 시의 내재된 구술성에 따르는 음송 방식을 일컫는, 독서와 음유의 합성어 정도로 보면 된다. 이 글은 이러한 현대시의 구술성과 문자성의 경계가 어떻게 지워질 수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고, 나아가 현대시의 구술성이 문자성과 일여를 이룰 수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비단 시의 구술성 논의를 통한 시의 보급성과 접근성 확보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의 지배적 성격인 문자성과 함께 구술성을 고려해보는 것은 흔히 말하는 ‘좋은 시’에 있어서 우리가 한 번쯤 재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2. 음유와 독유, 무경계의 영토
얼마 전 한 문학제 행사에서는 한 가수가 신동엽 시인의 시 「조국」을 노래로 불렀다. 어느 정도 운율이 갖추어져 있는 시이지만 분량이 사뭇 많고 일정한 박자를 맞추기엔 불규칙하게 전개되는 시를 노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수는 그 시를 감동적인 노래로 승화시켰다. 그런데 이어 부른 다른 노래를 들으면서 같은 가수여서 그런지 몰라도 시노래 「조국」과 비슷한 음조를 가진 것으로 들렸다. 어쩌면 시를 사설조로 노래한다는 것은 리듬과 박자에 있어서 일정 부분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음악에 문외한인 필자로서 그러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아무튼 시를 노래로 그렇게 구성지게 부를 수 있다는 것에는 감탄하였다.
요즘 시의 형태성이나 전개 방식을 볼 때 모든 시를 노래로 부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 때문만이 아니라 시의 노래로서의 구술성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므로 잠시 유보시키고자 한다. 대신에 ‘소리 내어 읽는 시’, 즉 ‘음송되는 시’에 대해서는 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어떠한 시든 그것이 문자로 쓰일 때는 소리를 내든 소리를 내지 않든 구술의 방식으로 발화가 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면이든 외계이든 그것을 시화하고자 할 때는 대상의 언어화를 거칠 수밖에 없는데 그 순간 뇌리에 떠오르는 단어나 어절이나 문장은 상형문과도 같은 문자 기호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음성보다 문자가 먼저 있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물론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는 그 문자를 사진 붙이듯 백지 위에 옮겨놓지 않는다. 생각을 앞서 하지 않고 문자를 쓰면서 시를 쓴다하더라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짧은 순간에라도 음성 발화의 과정은 발생한다. 그러므로 시를 포함한 모든 문자 기술 행위에는 암묵적 발화라는 구술성이 내재되어 있다.
또한 시는 시상 전개 과정에 따라 일정한 호흡과 리듬이 형성된다. 이는 시가 단순히 문장들을 나열한 것에 그치지 않고 체계적이고도 유기적인 구조를 이루는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는 각 문장의 어미 처리, 각 문장의 길이, 각 단어의 음절 수, 각 조사의 변용 등등이 고려된 형태를 갖는다. 이는 음운, 단어, 어절, 문장 반복 등의 외형률로 나타나는 시의 음악성과는 조금 다른 형태이다. 어쨌든 모든 시에 구술성은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만약 어떤 시가 부드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고 막힘없이, 묵독으로든 음독으로든 읽힌다고 할 때 그 시는 구술성을 확연하게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문자로 쓰인 시를 읽을 때에는 구술 방식에서 나타나는 독법이 요구된다. 따라서 시의 문자성과 구술성은 서로 독립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시를 소리 내어 읽느냐 소리 내어 읽지 않는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소리 내어 읽을 경우에는 시의 구술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고, 소리 내어 읽지 않는 경우조차도 구술성, 다시 말해 발화되는 방식에 의한 읽기의 방식에 따르게 된다.
현대시는 대부분 묵독으로 읽힌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익숙해져 있고, 많은 양의 시를 읽을 때에는 그것이 편리하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의 방식이라고 해서 시의 구술성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가끔 시를 읽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각할 때가 있다.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이미 시의 구술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를 읽을 때 시의 자연스러운 발화 방식에 따라 시의 구술성을 같이 호흡한다. 이러한 읽기 방식은 아주 자연스러운 형태로 보인다. 특별한 읽기 방법, 음송 방법을 고려하지 않고 시에 쓰인 문자를 따라가며 자연스럽게 읽은 방식은 곧 평범한 구술 방식을 따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주유하며 시를 읊던 음유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인쇄의 바다를 넘나들며 자연스런 발화 방식에 따라 시를 읽는 독유의 시대인 것이다.
이렇듯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음송이든 묵독이든 시의 함께 공존하는 구술성과 문자성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으로, 구술성과 문자성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3. 현대시, 노래 아닌 노래
최근 들어 시노래의 생산과 보급이 확대되고 있다. 그 전달력과 대량 수용의 동시성 등등에서 시노래는 매우 고무적인 효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노래가 더 많은 시에 적용되지 못하고 일반적인 인식이 미흡한 까닭에 아직 헤쳐 나가야 할 면이 많다고 보인다.
일반적으로 노래는 가요나 팝송처럼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 어울린 전문적인 음악 영역에 속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대중적인 노래를 진정한 노래의 형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노래도 있는 것이다. 판소리, 창, 단순한 리듬에 맞춘 웅얼거림 등등도 노래이다. 가사가 위주이든 멜로디가 위주이든 리듬을 타며 흥얼거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노래일 수 있는 것이다. 전문 음악가가 아닌 어떤 사람이 제 멋에 겨워 가사를 읊조리며 리듬에 맞춰 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것이 노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한 노래의 방식에 현대시도 포함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시는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대로 시에 내재된 발화의 성격, 구술의 성격에 일정한 리듬감이 형성될 때 시는 노래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리듬이나 박자가 없더라도 시를 읽으면서 감흥이 일고 경쾌한 읽기의 느낌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노래에서 느껴지는 흥취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는 아니지만 노래의 성질을 언제든 갖출 수 있는 것이 현대시이다. 다만 이는 현대시를 노래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렇다는 것이지 현대시가 노래라는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래의 순기능을 고려한다면 시를 노래와 함께 사유한다는 것 또한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의 문자성은 구술성보다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노래와 일정 영역을 공유한다는 것이 힘들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자 읽기에 내재된 구술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 읽기는 시의 구술과 그 기원을 같이한다.
윤의섭∙1968년 경기도 시흥 생, 1994년 ≪문학과 사회≫로 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 이전글48호(겨울호)특집/특집|현대시의 구술성과 문자성․2/강정부/구술성의 현대적 재배 13.03.20
- 다음글48호(겨울호)권두칼럼/장종권/숲속의 사냥꾼들에게 13.03.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