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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강우식연작장시/마추픽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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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식 연작 장시 ①
강우식
마추픽추
―천여 명의 잉카가 살았다. 감쪽같이 천여 명의 잉카가 사라졌다.
왜?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시인이여 미스터리에 대하여 두려워 마라.
1.
콘도르의 큰 날개가 어둠을 밀어내고
안데스의 하늘이 열렸다.
태양의 햇살을 부채에 가득 실은
콘도르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마추픽추의 하늘 위를 순찰하듯 유유히 돈다.
지금 마추픽추는 텅텅 비어 있다.
그 옛날 융융했던 도시는
태양신의 명을 받은
콘도르가 날카로운 발갈퀴로
몽땅 채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페루드란스* 독사 같은
우루밤바 강*의 급류가 흰 이를 드러내고
밤낮으로 물어뜯는 그 위에
마추픽추는 텅 빈 적막 속에 의연하다.
역사는 늘 페루드란스처럼
음흉한 독을 품고 뒤에서 공격했지만
마추픽추는 폐허가 되어
오히려 신비한 공중도시로 살아났다.
돌로써 황금을 만든 도시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 돌이 황금이 되고
황금이 돌이 되는 도시였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씀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돌이 황금으로 보였다,
안데스를 비추는 황금빛 햇살이
돌에 스미어 황금이 되는 신비를
콘도르킨가*의 백성들은 자연에서 알았다.
잉카들의 삶은 자연연금술이었다.
돌로써 황금도시, 황금보다 더 아름다운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만들었다
*페루드란스;사물을 뒤에서부터 공격하는 독사.
*우루밤바 강;마추픽추산 아래로 흐르는 강.
*콘도르킨가;독수리 황제. 잉카제국의 모든 황제를 총칭하는 의미로 씀.
2.
스스로 안데스의 하늘 아래 어딘가에
돌처럼 황금이 지천으로 쌓인
눈부신 샹그릴라가 있다고 믿는
잉카들이 아직도 많듯이
자고 일어나면 꿈같은 말이 구름으로 퍼져
발을 달고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었다.
소문은 날개를 활짝 편 콘도르,
황금에 눈이 뒤집힌 침탈자들이 날아들었다.
마추픽추도 그런 도시였다.
나는 천만 년을 잠자는 돌 틈에 돋은 쪽풀의
강인한 생명력도 보지만
역사의 옛 자취도 없이 사라진 도시의
잔인한 피의 얼룩과
슬프고도 처절한 사랑의 무늬도 예감한다.
태양을 위하여
돌로써 태양의 신전이 세워지고
태양과 하나 되기 위하여 해시계를 만들고
하늘이 무너져도 끄떡없는 움직이지 않는 돌로써
움직이는 태양을 잡아두고자 한 잉카였다.
인띠와따나, 태양을 잡는 천문관측소가 있던
신의 도시 마추픽추였다.
도시의 한쪽 콘도르킨가의 황금 소문은
안데스의 바람을 타고 흘러, 흘러
바다 건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산을 무너뜨리고 밤잠을 설치게 했다.
갈증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이다.
물을 찾아 사막을 헤매는 나그네처럼
황금 물에 눈이 뒤집히고 먼 자들은
소경의 지팡이로 이리저리 땅을 더듬으며
천만 길 황야를 휩쓰는 바람이 되어
마추픽추를 싹쓸이로 비질했다.
황금은 어디 갔을까.
잉카들이 아무리 머리를 흔들고 손을 저어도
황금이 돌이고 돌이 황금이라 해도
감쪽같이 숨겼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침탈자들의 숙명.
황금이 아닌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슬픈 무리들이었다.
돌은 아무 쓸모없는 돌일 뿐이었다.
끝없는 고문과 피의 살육이 시작되었다.
황금으로 온몸을 휘감듯이 잉카의
피로 매대기 하는 밤과 낮의 연속이었다.
내던져진 인육들의 피냄새는
안데스의 굶주린 콘도르들을 꾀게 하고
마추픽추는 텅 빈 바람의 도시가 되어 갔다.
그리고 세월이라는 망각의 긴 시간이 흘렀다.
피의 황금이 다 사라진 그 자리에
태양의 황금인 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마추픽추의 산처럼 쌓인 돌들은
오랜 바람의 시간과 눈보라의 공간 속에서
피의 얼룩들을 다 씻고 닦아낸
구도자의 뼈처럼 정화되어
다시 시작하는 사역의 역사였다.
모든 삶과 죽음은 태양을 따라
밤과 낮으로 순회하고
하늘의 돌인 별의 운행을 아는 황제 콘도르킨가는
하늘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별자리를 본떠
마추픽추의 돌집들을 만들어갔다.
모든 슬픔을 가슴에 품고도 내색이 없는
망각 속의 백치였던 잉카의 돌들이 부활했다.
돌은 황금이면서 때로는 폭력의 공포였다.
콘도르킨가는 새 한 마리도
그의 명령이 아니면 날지 못하도록
신의 목소리와 계율로 돌의 제국을 만들었다.
잉카들은 모두 지상에 얽매인 돌이었다.
돌이어서 신의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가끔 안데스의 돌들은 꿈을 꾸었다.
하늘의 별자리에 떠 있듯이
신 앞에 매인 몸들인 잉카의 꿈.
돌들은 한자리 박혀 오래 살기보다는
우루밤바 강에 춤추며 떨어지는 꿈을 꿨다.
꿈꾸는 돌들은 자유를 희망했다.
하늘의 별들이 우박처럼 떨어지는
낙하는 비상의 다른 의미다.
누가 하늘 높이 자기의 꿈을 싸서 돌로 던진 것일까.
그 안데스 산맥 위로 잉카의 꿈이 날았다.
돌이 새가 되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새가 되었다.
유성 같은 새가 하늘로 솟구쳤다.
유유히 안데스를 지배하듯 나는 콘도르였다.
하늘을 날 수 있는 돌은 콘도르뿐이었다.
콘도르가 없는 잉카를 어찌 노래할 수 있으랴.
돌이 떨어지거나 솟구치거나 하는 것 같은 새.
콘도르는 안데스의 하늘이고 돌의 날개다.
어찌 콘도르가 하늘을 그냥 날겠는가.
털끝만치 미세한 바람의 흐름도 다 감지하고
그 느낌대로 호흡하며 기류를 타는
콘도르를 사랑한다는 것은 페루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로 나는 콘도르의 심장을 사랑하는 것이다.
피리와 노래의 숨결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 앞에 자유로웠던 콘도르의 심장 잉카의 꿈.
비상하는 돌이여 숨을 쉬자.
돌 속에 사는 잉카의 후손들은
늙은 마누라와 오래 해로해 왔듯이
누구나 늙은 돌산 봉우리 마추픽추를 가지고 산다.
돌산이 바로 신비한 신의 도시이고 집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같은 안데스다.
3.
페루 잉카들이 신비롭게 살았던
마추픽추에 안개가 첩첩 오리무중이다.
누구나 마추픽추에 오면 생각에 잠겨
지난 시간을 재생하듯이 꿈속을 더듬는다.
안개의 미로를 따라 옛날로 거슬러 오른다.
나는 마추픽추라는 지명이
성인동화 속 주인공과 닮았음을 안다.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
마추라는 이름의 늙은 총각과
픽추라는 꽃 봉우리 같은 처녀와의
사랑의 역사에서 따 온 이름이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원시의 하늘이었던
전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은
마추와 픽추가 살아있는 환상에 사로잡혀
이 텅 빈 돌의 도시를 걷는다.
반복되었던 살육의 역사가 깨끗이 사라진
적막한 땅속에 다시 시간의 돌기둥을 박는다.
까치발 뜀처럼 재깍재깍 반복되는 초침이
폐허의 도시를 활기찬 도시로 바꾸자
혼미한 안개는 걷히고 마추픽추가 드러난다.
태양문을 지나며 들른 무당의 집에서는
늘 굿거리장단과 주술소리로 가득 차 있다.
둥둥 두둥둥 무녀가 북을 친다.
안데스 하늘의 새벽살결이 떨리듯
마추픽추의 정상에서 태양신을 맞이하는
신성한 하루의 북소리다.
사람의 살갗을 벗겨 만든 그 소리는
마추픽추 잉카들의 나날의 삶을 점지해 주는
하늘의 울림이다. 어느 땐가는
신에게 바쳐질 운명으로 태어난
공동체 속의 마추와 픽추의 노동도
그 소리의 흐름 따라 시작된다.
모든 꿈같은 만남이란
광활한 우주공간을 유영하다
도킹하는 우주선처럼 맺어지는 순간인가.
마추는 남자의 거시기에 좋다는 마카를
남몰래 먹는 스물다섯의 노총각.
화성에 기적처럼 착륙한 탐사우주선이듯
픽추의 땅에서 흙맛은 좋은지
물은 있는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잉카.
픽추는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와나바나 잼 같은 열네 살 꽃처녀.
라일락 꽃향기가 빗속에 물드는 저녁이면
그 빗물에 치렁한 머리를 감던 잉카 처녀.
처음 인연은 선인장 밑동에서
가느다란 실뿌리가 나오듯이
봄이 되어 여리고 앳된 사랑이 돋고
안데스의 초록바람이 살랑살랑 마음에 일어
세상천지가 온통 어질머리로 흔들리고
처음에는 마추의 이마에 빛나는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 한 손 눈가리개 하고 쳐다보고,
처음에는 픽추의 흑요석 신비한 눈동자 속에
천만 년 꿈꾸듯 잠들고 싶은
마추와 픽추의 만남이었으리. 봄이었으리.
바다가 없는 마추픽추에서 봄하늘을
바다 보듯이 하는 그리움이었으리.
하늘의 별과 지상의 꽃들과 흐르는 구름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만남이었으리.
자연의 섭리 같은 첫사랑이었으리.
바람 속에는 설레는 꽃향기가 잠겨 있고
몸은 꿀통에 꿀이 차듯 사랑의 단물로 차올라
점점 둥근 보름달 속의 수박빛으로 붉어진 항아리거나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구릿빛 몸의 잉카의 사랑.
사랑은 익어 뜨거운 돌판이 되고
여름날의 사랑놀이로 서걱댔을 옥수수밭이여.
잉카들도 우리가 살 비비며
자주 보리밭에 숨어들어 파릇한 보리잎들을
초록물 넘치도록 짓뭉개듯이
자기키보다 더 큰 옥수숫대를 서걱서걱 무너뜨리며
서걱소리 나도록 어기찬 사랑을 나눴으리.
영근 옥수수를 따며 서로 사랑하는 노래를
옥수수술 거르듯이 몸에 배도록
안데스의 햇살과 더불어 내리 받았으리.
옛날에, 옛날에
원시의 옛날에, 돌아가고픈 옛날에
태양만큼 따뜻한 옥수수 열매가 익으면
하늘에 바쳐지는 생명으로서
마추는 픽추와 손잡고 결혼을 하고
곳간마다 하늘만큼 가득히 옥수수를 채우며
마추와 픽추는 발효된 사랑을 하고
픽추를 데려와 픽추를 닮은 아이를 낳을 꿈을 꾸며
마추픽추로 늙어 가리라 소망했으리.
잉카라면 누구나 가졌던 사랑의 서약
누구나의 가슴에 마추픽추가 되리라 빌었으리.
4.
처음 내 상상 속 재생된 마추픽추는
너무 소박한 신의 도시였다.
태양은 늘 따뜻하고 하늘은 넓디넓었지만
공동체 속의 잉카의 하루는
과연 화평한 일상이고 행복하기만 하였을까.
모든 삶은 늘 바람이 길을 낸다.
해 뜨면서 시작되는 기도와
온갖 소통이 단절된 돌의 공간에서
탈출하고픈 잉카들의 나날에 바람이 길을 냈다.
사랑은 한 번 시작되면 나팔꽃 줄기 같이
어디든 휘감아 오르며 하루가 무섭게 자라는 것이다.
마추와 픽추의 사랑은 일상의 일탈이었다.
태양은 뜨거운 피로 들끓는 용광로
따뜻한 피로 충만한 자궁이다.
만물은 그 피의 빛을 받으며 자란다.
인간도 태양의 혈류를 받은 자손이다.
피의 시작도 끝도 없는 흐름이 이어지는 강을
인간은 누구나 가지고 죽을 때까지 산다.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었던가.
받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지인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흰 피를 받아먹으며
흰 피가 차차 붉어지는 사랑을 마시며 자랐다.
흰 피의 순수가 붉은 태양을 닮아가며
피보다 진한 혈연을 마추와 픽추는 깨달았다.
모든 사랑에는 근친상간이 들어 있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은 생존만이 아니었다.
먹는 것과 혓바닥으로 젖꼭지를 희롱하는
유희가 내 옹알이 속에 같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 또한 기꺼이 젖을 물리는 것은
자신의 분신 같은
아기와의 달콤한 근친이 있어서였다.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혈연의 근친이다.
세상의 모든 남자는
여자의 젖을 빠는 한 아기가 된다.
여자는 자기의 젖을 내주고 남자를 품어
아기로 만드는 어머니가 된다.
근친이 묻어나는 원죄다.
스카알렛 빛 낙인 찍힌 원죄가
마추와 픽추의 사랑에도 깃들었다.
강우식∙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호 水兄, 老平, 果山. 시집 <사행시초>(1974), <고려의 눈보라>(1977), <꽃을 꺾기 시작하면서>(1979), <물의 혼>(1986), <설연집>(1988), <어머니의 물감상자>(1995), <바보산수>(1999), <바보산수 가을 봄>(2004) 발간. 시극집 <벌거숭이 방문>(1983), 시에세이집 <세계의 명시를 찾아서>(1994), 시론집 <육감과 혼>, <절망과 구원의 시학>(1991), <한국분단시연구>, 시연구서 <한국 상진주의 시 연구> 발간. 현대문학상(1975), 한국시인협회상(1985), 한국펜클럽 문학상 시 부문(1987), 성균문학상, 월탄문학상(2000) 수상.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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