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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하종오연작시/님시경 제3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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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연작시
하종오
제3시경 제1작품 외 11편
하루는 님께서 거리로 나서시면 해가 뜨고 거리를 뜨시면 해가 졌습니다. 님께서 누군가를 찾으러 나돌아 다니시면 모두가 누군가를 찾으려고 나돌아 다녔습니다. 그 누군가가 똑같은 사람인지 영 다른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거리에서 마주치거나 스쳐가도 알 수 없지만 모두에게 님께서 누구신지, 님께 모두가 누구인지는 더욱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했기에 한낮에도 한밤에도 님도 모두도 자신에게만 자신이었고 남에게는 남이었으므로 누군가도 님을 남으로 알고 모두를 남으로 알 것입니다. 저마다 남으로 살아가는 길바닥에 그래도 남을 위하는 누군가는 있을 거라고 믿으신 님께서는 서로가 남이어도 서로에게 누군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시었습니다. 그래서 해가 떠서 아침이 되고 해가 져서 저녁이 되었습니다.
제3시경 제2작품
하루는 님께서 전신주 아래 서 계셨습니다.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인지 님께서는 숨을 고르셨고 전신주들이 그림자를 내렸습니다. 간격마다 아스팔트길을 당기고 선 전신주들을 님께서는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세어보다가 어디에 가도 님께로 빨리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하고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러자 아스팔트길이 일어나 님을 밟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끌려서 가다가 쓰러져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님께서 일어나 먼지를 털며 뒤따라가셨지만 아스팔트길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녔고 사람들이 닦아놓은 아스팔트길마다 전신주들만 제자리를 차지하고 그림자를 옮겨놓았습니다. 님께서 도시에서 사신 뒤로 날마다 생기는 일상사였습니다.
제3시경 제3작품
하루는 님께서 지하철 입구 계단에 꿇어 엎드려 계셨습니다. 머리맡에 둔 플라스틱바구니는 텅 비어 있었고 사람들은 님을 보지 않고 지나갔습니다. 헌옷 걸쳐 입은 등때기 위로 흙먼지가 날려 와 풀썩거릴 때 가난한 걸인들이 와서 동전을 던져주고 가면 더 가난한 걸인들이 와서 그 동전을 주워 갔습니다. 그것이 거기 꿇어 엎드리신 이유인양 님께서는 속으로 흐뭇해하셨습니다. 하지만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빚에 시달리는 자식을 죽인 아비가 달아나는지 남편한테 매 맞는 아내가 집을 나와 서성이는지 늙은 부모를 잊어버린 아들 내외가 숨어 다니는지 님께서는 아셨으므로 고개 들지 않으셨습니다. 이 부끄러운 사태마저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님을 외면하였습니다. 플라스틱바구니에 발자국 소리만 잔뜩 쌓여서 시끄러워지자, 님께서는 일어나 지하철 입구 계단을 밝고 올라가셨습니다.
제3시경 제4작품
하루는 님께서 무료급식소 앞에 줄을 서 계셨습니다. 햇빛은 줄 밖으로만 내려서 멀리까지 비추었고 어둑한 줄 안에서 노숙자들은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제 식구의 먹을거리도 부족한 사람들이 조금씩 모아낸 밥과 찬을 얻으려고 님께서 서 계시는 동안 조금도 줄은 앞으로 당겨지지 않았습니다. 너무 허기진 노숙자들이 몰려와서 뒤에 서는데도 님께서는 조금씩 밀려나기만 하셨습니다. 끼니는 남이 먹어야 배불러진다고 님께서 생각하시기 때문인지도 몰랐습니다. 훤한 길거리마다 즐비한 음식을 차려놓고 나누어 먹지 않는 사람들을 님께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슬퍼하다가 줄에서 빠져 나오셨습니다. 그러고 나자 일시에 노숙자들에게 밥과 찬이 수북한 식판이 주어졌습니다. 무료급식소 앞으로 햇빛이 쏟아져서 어둑한 줄이 없어지니 님께서는 다른 무료급식소로 가셨습니다.
제3시경 제5작품
하루는 님께서 거리에서 욕보고 계셨습니다. 일거리를 찾으러 가다가 어깨 부딪친 사내가 님께 덤볐습니다. 다짜고짜 사내가 씨부렁거렸고, 님께서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서 입 앙 다무시자 그게 싫은 사내가 삿대질하였고, 님께서 시시비비하고 싶지 않아서 눈을 슬쩍 내리까시자 그게 싫은 사내가 주먹질하였고, 님께서 맞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시자 그게 싫은 사내가 멱살 잡았고, 님께서 대거리하고 싶지 않아서 사과하시자 그제서야 사내는 손 털며 지나갔습니다. 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 한 행동이 잘한 처신인지 잘못한 처신인지 님 스스로도 알지 못하셨습니다. 다만 사람은 싸워야 산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어도 님께서는 이기고 지는 짓에 얽매이지 않으셨습니다.
제3시경 제6작품
하루는 님께서 빌딩을 올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거기 오르려면 여기까지 걸어온 길거리를 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걸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님께서는 가만히 서 있었으나 한 번쯤 날아오르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자신을 일으켜 세워서 하늘을 향하게 할 데가 어디에도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너나없이 고층을 세움으로써 가장 넓게 허공을 차지하고 남들을 함부로 가두고 부릴 수 있었습니다. 님마저 빌딩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더 이상 땅에서 거두어 먹어야 할 거리가 님께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에서 서로 통하려고 하지 않고 바닥에다 입출구를 낸 빌딩들을 님께서는 그저 올려다보았을 뿐, 길거리를 버리진 않으셨습니다.
제3시경 제7작품
하루는 님께서 길에서 잠들어 계셨습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하는 구걸이나 위에서 내려다보며 하는 적선이나 매한가지인지 님께서는 모로 누워 바닥을 걷는 사람, 바닥을 기는 사람,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을 보다가 잠에 드셨습니다. 한 청년이 다가와 발로 툭툭 차보고 지나가고 한 중년사내가 다가와 손가락으로 쿡쿡 쑤셔보고 지나가고 한 노인이 다가와 손으로 살살 흔들어보고 지나가도 잠에서 깨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가까이 와서 맑은 목소리로 뭐라고 뭐라고 부르다가 떠나가자, 님께서 흔연히 두 눈 뜨고 일어나 뒤따라갔습니다. 님께서 잠들어 계셨던 길이 일어나 님을 뒤따라가고 바닥을 걷는 사람도 바닥을 기는 사람도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도 뒤따라가고 나니, 도시에는 뒤따라가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 쓰다 남긴 물건들만 넘쳐났습니다.
제3시경 제8작품
하루는 님께서 일거리를 구하려고 다니셨습니다. 님께서 가실 수 있는 데라곤 사람이든 물건이든 팔고 팔리는 시장이었습니다. 님께서 태어나시기 전부터 님의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시장은 님의 자식이 죽고 난 뒤에도 남을 것입니다. 시장이란 팔 때는 사람과 물건이 서로 닮으려는 곳, 팔릴 때는 사람과 물건이 서로 같아지려는 곳이지만 님께서는 서로 닮으려고도 하지 않고 서로 같아지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으므로 자신을 팔 수 없는 님께서는 그저 님이셨고, 팔리지 않는 님께서도 그저 님이셨습니다. 님께서 님 이상도 님 이하도 아니신 시장에서 님께서는 사람도 물건도 아니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거리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하신 님께서는 종일 시장을 돌아다니셨습니다.
제3시경 제9작품
하루는 님께서 혼잣말을 하고 계셨습니다. 주방에서 밥을 퍼놓았는데도 식구들이 먹으러 오지 않자 궁시렁 궁시렁, 거실에서 조간을 읽다가 중얼중얼,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서도 주절주절, 님께서는 누구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아마 누가 가까이서 멀리서 계속 소리쳐도 님께서도 그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끓는 시간이 가장 자연스러운 때였습니다. 곳에 따라 할 수 없는 말이 따로 있거나 해야 할 말이 따로 있다면 그 말을 장악한 사람을 위한 말이며, 어떤 소리에는 귀만 기울이고 어떤 소리에는 대답만 한다면 역시 그 소리를 장악한 사람을 위한 소리일 것입니다. 님께서는 누구만 위해서 할 수 없는 말소리가 있기에 혼잣말을 그치지 않으셨는가 봅니다.
제3시경 제10작품
하루는 님께서 무단횡단하고 계셨습니다. 양방향에서 차량들이 일제히 급정거하고 행인들이 멈춰 서서 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모두가 정지한 도로를 님께서 유유히 가로지르실 때, 전후 부딪친 차량에서 운전자들이 내려 삿대질하며 다투었습니다. 구급차와 견인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와서 말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님께서는 돌아보지 않고 곧장 걸어가셨습니다. 님께서 급하게 가셔야 할 곳이 있다고 소리를 치셨다 해도 차량들과 행인들이 길을 틔워주지는 않았을 테지만 모두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 보려는 짓거리에 심사가 뒤틀려 무단횡단하신 님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남들이 알든 모르든 건너는 도로마다 님께서는 계속 그리하셨습니다.
제3시경 제11작품
하루는 님께서 스카이라인을 쳐다보고 계셨습니다. 님께서 양식을 얻으셨던 대지가 사라지고 위안을 얻으셨던 난바다가 없어진 도시에는 이제 허공에 사람들이 세운 건물만 남았습니다. 지평선을 보지 못해서 고개 쳐든 님께서 허기지시는 것도 수평선을 보지 못해서 머리 젖힌 님께서 불안해하시는 것도 당연하였습니다. 하늘을 금가게 하는 일이야 님께서도 하시고 싶었던 일이지만 사람들이 건물들을 높이 더 높이 올리는 짓만은 부정하고 싶으셨습니다. 하늘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려면 그 아래에 손가락으로 밑줄을 그어놓고 오래 잊지 않아야 한다고 님께서는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건물들을 자꾸 올렸습니다. 그러했으니 대지의 바람결도 난바다의 물결도 볼 수 없는 님께서 스카이라인마저 쳐다보지 않으실 순 없었습니다.
제3시경 제12작품
하루는 님께서 폐쇄회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누군가 조종하는 폐쇄회로 속에는 사람 다니는 거리와 사람 다니지 않는 거리도 있고, 낯익은 사람과 낯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풍경과 구분 안 되신 님께서는 폐쇄회로 속에서 식당을 찾아가 국밥을 사먹고 공원 벤치에 가서 앉아 낮잠을 자고 공중화장실로 뛰어가 오줌을 누기도 하셨습니다. 님의 일거수일투족이나 남들의 일거수일투족이나 마냥 같으니 폐쇄회로를 조종하는 누군가도 거리로 나가서 폐쇄회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님과 똑같이 행동하였습니다. 이제 아무도 조종하지 않는 폐쇄회로 속에서 모두가 하루를 평생으로 지냈으므로 님께서는 폐쇄회로 밖으로 나오는 걸 몹시 두려워하셨습니다.
시작메모
이 <님 시경>의 제3시경에는 도시의 다중인 님의 삶을 담았다. 님의 품성이 다중에게 있고 다중의 성격이 님에게 있다. 그러면서도 개별자로서의 님과 특수자로서의 님이 도시의 처처에 있다. 이 시를 쓴 시인도 님이고 이 시를 읽는 독자도 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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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님 시편>, <님>, <님 시집>, <반대쪽 천국>, <지옥처럼 낯선>, <국경 없는 공장>, <아시아계 한국인들>, <베드타운>, <입국자들>, <제국諸國 또는 帝國>, <남북상징어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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