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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집중조명/박정규/개망초꽃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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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702회 작성일 13-03-20 17:46

본문

집중조명

 

박정규

개망초꽃 외 6편

 

 

용문사 가는 길에

야인들의 묵언수행 같은

지천을 밝히는 작은 생명들이 있었다.

 

이 땅의 어둔 곳을 가리고

노동의 새참 같은 프라이

계란꽃들이 속살을 보시하고 있었다.

 

화려한 국화꽃 관심 밖에서

가녀린 몸을 일제히 던져

민초들의 하얀 눈물을 대변하고 있었다.

 

 

 

 

 

밤의 무덤

 

 

빛은 왜, 저만치서 오는가.

누구의 허락으로 몰려오는가.

 

검은 파도 푸른 손등이 목선의 발목을 잡고

밤하늘 깊숙한 음부로 뛰어내린다.

 

누구를 위한 허방이지

밤은 허방의 주인을 물색하는 중이지,

 

불침번 별들의 틈새

영혼의 시체들이 쉬어가는 곳.

 

우주의 허리를 베개 삼아

육신을 눕히는 하루가

스멀스멀 사라지는 곳.

 

허락된 빛,

다른 생을 잉태하며

신음이 소리 없이 몰려오는 곳.

 

 

 

 

 

문자메시지

 

 

어머님,

밤늦게 도착하겠는데 늦어서 미안해요.

괜찮겠지 뭐. 가다가 버스에서 다시 전화하겠지.

주인을 잘못 찾아온 문자가

들판에서 일하는 내내 논두렁을 서성거렸다.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시어머니와 신세대 직장며느리가

서로의 살아온 길을 진분홍으로 저울질하는,

아내의 일일연속극을 뒤에서 훔쳐보는데

문자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아무래도 시아버지 기일 같은데,

며느리의 문자가 제사상에 올라갔을까.

어쩌랴, 시어머니의 곧추세운 눈초리를

아내의 핀잔이 두려운 내 우유부단이

문자의 주인을 찾아 유통기한을 서성인다.

 

 

 

 

 

한량한 내가

 

 

아무래도 해님이 달거리를 하나보다 아침부터 고슴도치마냥

저렇게 날카롭게 제 깃을 따갑게 세워 찌르니 하는 말이다.

이랑에 늘어선 다래덩굴 이파리도 더위를 겨워내며 헉헉거리고

참새들도 깃에 찔려 파닥거린다.

 

이유 없이 토라진 애인처럼 제 몸을 달구어 찌르니

눈이 따가워 나서지 못하고 피부 웅덩이 전부를 개방하는데

수년 전 달거리와 이별한 아내는 덧모자도 없이 뙤약볕쯤이야

일 없다고 맨살 같은 밭이랑을 꿰매고 있다.

 

처녀 적이 그리워 해님의 깃을 사랑하게 되었나,

땀 냄새 푹푹한 땀방울 찜질을 좋아하게 되었나,

아내의 달거리를 가져간 해님의 깃은 마치 맞는 배필이었나,

한심하다, 뙤약볕 아래에서 김매는 아내의 노동을 시샘하는

 

 

 

 

 

가족 평장묘지

 

 

삼봉산 기슭 남향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는다.

열 평 남짓에 오십 명이나 살 수 있다는 계단식 집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함께 살 수 있는 삼생모델로

한 집안의 족보가 오롯이 함께 살 작은 집을 짓는다.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 손자

한 가계가 마르고달토록 살아갈 집을 짓는다.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의 방이 있고

죽지도 않은 내 영정이 있는 묘오한 집

죽어야만 비로소 살림 차릴 수 있는 집

아파트도 아닌데 청약금에 예매 회원가입제라

그렇다고 스스로 비회원으로 할 수도 없는

오십 명 한정에 선착순 입주라 늦게 가입할 수도 없는

죽음이 취하고 싶은 이랑 같은 계보의 집을 짓는다.

나는 언제 입주해야 하나, 몇 단쯤에, 몇 번째 방에

내 작은 오늘의 흔적을 넣어야 하나

복잡한 미로의 입주 방정식을 넷으로 찾아야 하는,

여전히 옥빛 하늘에 태양은 살아가고 발 아래 아득한

쪽빛 바다에는 조각배 하나 오늘을 싣고 가는데

할아버지는 계단식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까

쓸쓸히 외로웠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고 계실까

죽은 자, 산 자, 태어날 자 모두의 상봉일이 다가온다.

 

 

 

 

 

그믐으로 가는 길

 

 

알을 품은 보름달이 누런 진통을 뿜어내고 있다 눈 안에 달을 담은

닭장 속 암탉이 자울자울 눈까풀 주름을 덮어 알을 담는다.

모세혈관 속은 따뜻하다 피의 결, 속으로 드러나는 황톳길.

 

등목을 쳐주던 어머니의 손금을 따라 새들은 발자국을 내며 날아갔다.

창공에 새들의 발자국이 황톳길을 걷는다. 가시덤불 속에서 도둑고양이

덩달아 울음을 보태주며 붉게 울었던 겨울이 오돌오돌 살아난다.

 

달의 눈썹에서 물기가 날아왔다. 어머니의 흐린 동공으로 파문이 일었다.

느티나무가지에 뜬 홍시, 능소화 꽃망울 터뜨리듯 속살이 터졌다.

개미들이 와르르 모여들어 가장자리에서부터 흔적을 지운다.

 

지워지는 것, 그믐으로 가는 길.

붉은 겨울이 지워지고 암탉의 울음소리가 하얗게 지워진다.

어머니의 무게가 지워지는 동안 개미집은 튼튼한 성이 되었다.

 

 

 

 

 

귀가

 

 

새에도,

돌에게도,

바람에게도,

허기는 언제나 투정이었을 뿐,

내 몸은 직립을 위한 허공의 절름발이

부풀은 꿈은 내장처럼 울렁거렸다.

 

열병처럼 욕망의 까꾸막*이 오른다.

쉬이윅, 숲을 스치는 살모사 동맥을 타고 도는

대문자로만 철벅거리는 허방을 채우려던 낱글자들,

새처럼 허공을 떠도는 구름이었다.

 

쉬엄쉬엄 바래길* 허리에 앉아

밀알 같은 기호로 문신을 새기며

내가 사랑하고 미워한 모든 것이 나이므로

에둘러 미래의 허기를 담을 것이라.

 

* 오르막의 남해방언.

* 경남 남해 도보여행길.

 

 

시작메모

시는 언제나 내가 내게 묻는 ?다

 

불러줄 이름조차 없는 풀벌레가 돋을볕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난다. 앞산 애기 등성이가 어둠을 벗어 내리는 동안 나의 또 다른 나는 수탉의 울음소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를 찾아 내 삶터의 언저리를 산보한다. 어제 이루다만 이랑에 직립하지 못한 마늘 한 쪽, 조문하듯 곁에 앉아 밤을 샌 경운기, 듬성듬성 부풀은 낱알들을 힘겹게 달고 서있는 벼이삭, 파도가 찰싹찰싹 꼬드기는 목선 몇 거느린 선창의 푸른 잠. 날마다 진경산수화를 무료로 감상하는 지금은 가을걷이가 한창인 내 삶터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아름다운 결실을 광주리에 담는 때.

시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립而立에 찾아온 내 시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시를 정의하는 일이다”라는 네루다의 말처럼 시란 무엇인가? 언제나 내가 내게 묻는 ?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에서 ‘무의식’을 나는 내 시의 자양분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나에게 정신 나갔나? 라고 하면 알코올, 마약, 치매, 우울…도 아닌데 그냥 내 이웃의 풍경들이 내 정신을 훔쳐갔다고 하겠다. 이렇듯, 내 삶터 주위에 널브러져있는 낱낱의 미물과 풍경과 이웃들이 너무 좋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아닌 내가 구멍 뚫린 글 쓰는 일을 소일거리로 하고 있다. 치열하지 못하고 어쭙잖은 고장 난 시 쓰기를 말이다.

아, 난데없는 소나기에 오늘은 이앙기소리 가프게 헐떡이겠다. 덩달아 내 절름발이 난타극도 막을 올릴지 궁금하다. 왜, 이름 붙이지 못한 풀벌레가 내 정신을 좀 더 가져가지 않는지? 이제부터 그에게 시라는 이름을 붙여 주어야겠다. 김춘수가 꽃이라고 이름 불러준 것처럼.

 

박정규∙1960년 경남 남해 출생.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탈춤 추는 사람들>, <검은 땅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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