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8호(겨울호)집중조명/해설/권경아/스러지는 것들을 위한 소묘―박정규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834회 작성일 13-03-20 17:48

본문

집중조명 해설

권경아

스러지는 것들을 위한 소묘―박정규론

 

 

박정규의 시들은 잊혀지고 있는 작고 사소한 그 무엇을 향해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작고 여린 것들이 뿜어내는 생명의 빛에 시인의 시선은 머문다.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탈춤 추는 사람들>이나 최근의 시집 <검을 땅을 꿈꾸다>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시인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작고 여린 것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여린 불빛이 곧 ‘우주와 자연’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 진리”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검은 땅을 꿈꾸다> 자서) “세상의 모든 걸 사랑”하겠다는 시인의 말은 어두운 곳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그들의 삶에 주목하고자 하는 의지라 할 수 있다.

 

2.

 

용문사 가는 길에

야인들의 묵언수행 같은

지천을 밝히는 작은 생명들이 있었다.

이 땅의 어둔 곳을 가리고

노동의 새참 같은 프라이

계란꽃들이 속살을 보시하고 있었다.

화려한 국화꽃 관심 밖에서

가녀린 몸을 일제히 던져

민초들의 하얀 눈물을 대변하고 있었다.

―「개망초꽃」 전문

 

용문사 가는 길에 조용히 피어있는 들꽃을 바라본다. “야인들의 묵언수행”처럼 묵묵히 피어 “지천을 밝히”고 있는 작은 생명들. “화려한 국화꽃”에 모두의 시선이 머무는 것과는 달리 어두운 곳에 작게 피어있는 꽃들. 그러나 그들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이겨내고 있는 진정한 강자이다. 제 몸으로 “이 땅의 어둔 곳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가녀린 몸을 일제히 던져 민초들의 하얀 눈물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빛은 왜, 저만치서 오는가.

누구의 허락으로 몰려오는가.

검은 파도 푸른 손등이 목선의 발목을 잡고

밤하늘 깊숙한 음부로 뛰어내린다.

누구를 위한 허방이지

밤은 허방의 주인을 물색하는 중이지,

불침번 별들의 틈새

영혼의 시체들이 쉬어가는 곳.

우주의 허리를 베개 삼아

육신을 눕히는 하루가

스멀스멀 사라지는 곳.

허락된 빛,

다른 생을 잉태하며

신음이 소리 없이 몰려오는 곳.

―「밤의 무덤」 전문

 

어둠이 밀려오는 밤에도 시인은 빛을 찾아내고 있다. “검은 파도 푸른 손등”에서처럼 검은 밤에 몰아치는 파도에서도 푸른 빛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허방의 주인을 물색하는 중”인 밤은 끊임없이 어둠을 쏟아내고 있다. 그 깊은 어둠 속에서도 “다른 생을 잉태”하는 “허락된 빛”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날을 예견하는 빛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빛이라 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꿈꾸는 빛인 것이다.

 

어머님,

밤늦게 도착하겠는데 늦어서 미안해요.

괜찮겠지 뭐. 가다가 버스에서 다시 전화하겠지.

주인을 잘못 찾아온 문자가

들판에서 일하는 내내 논두렁을 서성거렸다.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시어머니와 신세대 직장며느리가

서로의 살아온 길을 진분홍으로 저울질하는,

아내의 일일연속극을 뒤에서 훔쳐보는데

문자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아무래도 시아버지 기일 같은데,

며느리의 문자가 제사상에 올라갔을까.

어쩌랴, 시어머니의 곧추세운 눈초리를

아내의 핀잔이 두려운 내 우유부단이

문자의 주인을 찾아 유통기한을 서성인다.

― 「문자메시지」 전문

 

작고 여린 것들에 보내는 시인의 시선은 자연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소한 삶의 한 순간도 그는 놓치지 않는다. 들판에서 일을 할 때 “어머님, 밤늦게 도착하겠는데 늦어서 미안해요” 라는 문자가 찾아온다. 주인을 잘못 찾은 문자하나에 시인은 불편하다.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아내와 일일 연속극을 보는 중에 또 다시 찾아온 문자. 아무래도 시아버지 기일인 것 같은. 시인은 며느리의 문자가 제사상에 올라갔을지 염려한다. 자신에게 잘못 온 것을 보면 시어머니에게 가 닿지 못했을 텐데. 며느리는 어찌 되었을까. “어쩌랴, 시어머니의 곧추세운 눈초리를” 받을 며느리가 걱정이다. 시인은 일상의 작고 사소한 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서성인다”. 잘못 온 문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아내의 핀잔 또한 두려운 시인은 서성일 뿐이다. 그러나 그 서성거림이 삶의 사소한 것들에 보내는 시인의 사랑일 것이다.

 

아무래도 해님이 달거리를 하나보다 아침부터 고슴도치마냥

저렇게 날카롭게 제 깃을 따갑게 세워 찌르니 하는 말이다.

이랑에 늘어선 다래덩굴 이파리도 더위를 겨워내며 헉헉거리고

참새들도 깃에 찔려 파닥거린다.

이유 없이 토라진 애인처럼 제 몸을 달구어 찌르니

눈이 따가워 나서지 못하고 피부 웅덩이 전부를 개방하는데

수년 전 달거리와 이별한 아내는 덧모자도 없이 뙤약볕쯤이야

일 없다고 맨살 같은 밭이랑을 꿰매고 있다.

처녀 적이 그리워 해님의 깃을 사랑하게 되었나,

땀 냄새 푹푹한 땀방울 찜질을 좋아하게 되었나,

아내의 달거리를 가져간 해님의 깃은 마치 맞는 배필이었나,

한심하다, 뙤약볕 아래에서 김매는 아내의 노동을 시샘하는

―「한량한 내가」 전문

 

아침부터 햇살은 뜨겁게 내리쬔다. “고슴도치마냥 저렇게 제 깃을 따갑게 세워 찌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해님이 달거리를 하나보다”. 뜨거운 햇빛에 이랑에 늘어선 다래덩굴 이파리도 헉헉거리고 참새들도 파닥거리고 있다. 이렇게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것을 보면 해님이 틀림없이 달거리를 하는 것을 게다. 그런데 “수년 전 달거리와 이별한” 아내는 이제 더 이상 날카롭지 않다. “덧모자도 없이 뙤약볕쯤이야 일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김을 매고 있다. 눈이 따가워 나서지도 못하는 시인과는 달리 아내는 햇살 아래에서 거침이 없다. 처녀 적이 그리워 해님의 깃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땀방울 찜질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아내의 달거리를 가져간 해님이 그 날카로움을 다 가져간 모양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내는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을 무겁기만 하다. 뙤약볕 아래에서 김매는 아내의 노동을 시샘하는 자신을 한심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시선 속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그 뜨겁고 날카로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참아내며 묵묵히 일하는 아내의 무던함은 달거리와 이별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내의 강한 의지이리라. 삶을 향한 그녀의 강인한 의지가 시인은 미안하고 고맙다. 진정한 강자는 아마 아내라는 이름일 것이다.

 

3.

 

삼봉산기슭 남향 양지바른 곳에 집을 짓는다.

열 평 남짓에 오십 명이나 살 수 있다는 계단식 집을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함께 살 수 있는 삼생모델로

한 집안의 족보가 오롯이 함께 살 작은 집을 짓는다.

고조, 증조,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 손자

한 가계가 마르고달토록 살아갈 집을 짓는다.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의 방이 있고

죽지도 않은 내 영정이 있는 묘오한 집

죽어야만 비로소 살림 차릴 수 있는 집

아파트도 아닌데 청약금에 예매 회원가입제라

그렇다고 스스로 비회원으로 할 수도 없는

오십 명 한정에 선착순 입주라 늦게 가입할 수도 없는

죽음이 취하고 싶은 이랑 같은 계보의 집을 짓는다.

나는 언제 입주해야하나, 몇 단쯤에, 몇 번째 방에

내 작은 오늘의 흔적을 넣어야 하나

복잡한 미로의 입주 방정식을 넷으로 찾아야하는,

여전히 옥빛 하늘에 태양은 살아가고 발 아래 아득한

쪽빛 바다에는 조각배 하나 오늘을 싣고 가는데

할아버지는 계단식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까

쓸쓸히 외로웠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고 계실까

죽은 자, 산자, 태어날 자 모두의 상봉일이 다가온다.

―「가족 평장묘지」 전문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 주목하는 박정규의 시세계가 잘 드러나는 것이 「가족 평장묘지」이다. “열 평 남짓에 오십 명이나 살 수 있다는 계단식 집” 가족 평장묘지. 시인은 가족이 함께 살 집을 짓는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함께 살 수 있는 삼생모델”로 한 집안의 족보가 오롯이 함께 살 작은 집이다.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이어져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만이 집이 아니다. 죽음 뒤의 삶을 준비하는 시인의 마음에 가족은 이미 모두 함께 하고 있다. 고조, 증고,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죽지도 않은 시인의 영정이 있는 집, 또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의 방까지. 죽어서야 비로소 살 수 있는 집. 삶과 죽음이 진정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집을 준비하며 시인은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생각한다. “죽은 자, 산자, 태어날 자 모두의 상봉”이 이루어지는 그 곳. 가족 평장묘지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의 섭리를 다시금 생각하는 것이다.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 진리”라는 시인의 믿음이다.

 

지워지는 것, 그믐으로 가는 길.

붉은 겨울이 지워지고 암탉의 울음소리가 하얗게 지워진다.

어머니의 무게가 지워지는 동안 개미집은 튼튼한 성이 되었다.

―「그믐으로 가는 길」 부분

 

죽음은 또 다른 삶으로 가는 길이다. 보름달이 지워지며 그믐으로 가는 길.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또 다시 떠오를 달을 향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무게가 지워지는 동안 개미집은 튼튼한 성”이 되고 있다. 죽음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삶. 이것이 시인이 믿고 있는 “우주와 자연의 섭리”이다. 박정규는 스러지는 것들을 그려내고 있다. 아니 스러지는 것들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생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권경아∙문학평론가. 2003년 ≪시와 세계≫로 등단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