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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특선/김서은/거룩한 잠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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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787회 작성일 13-03-20 17:56

본문

신작특선

김서은

거룩한 잠 외 5편

 

 

물속이다

황홀한 곡선, 아득하다

 

시선이 켜지는 곳에 옹기종기 앉아있던 아이들이

홀연히 사라지고

나를 뒤덮는 커튼 속의 검은 커튼들

구름시계가 삭제 됐다

 

a커튼이 b커튼과 겹쳐진다

a는 b 속으로 스며들지만 b는 a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번뜩이는 눈알들이 그윽하게 울려 퍼졌다

 

사방으로 휘어진 바람 냄새를 맡는다

검은 피륙으로 짠 풀밭이 펼쳐졌다

내 몸속으로 흘러드는 비릿한 향내들

 

발목을 적시며 긴 머리카락을 출렁거리고 있었다

이 도시를 탈출하려는 것일까?

얼음같이 매끄러운 날개를 팔딱 거리면서

 

그때 나는,

새같이 황홀한 곡선을 그리며

나로부터 분리되고 있었다

햇빛 속에서 뜨겁게 춤추고 있었던 나는

 

몇 겹 구름 두꺼운 외투를 껴입고

편안하게 침몰하고 있었다

 

 

 

 

 

라벨 속으로 스미는 자전거

 

 

여기에선 바다가 보일까

뜨거워진 발바닥으로 미끄럼을 타네

 

필사적으로 날개를 버둥대는 바람같이

내 정수리로 쏟아지는 푸른 돌맹이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이름을 불러보았어요

한때는 당신의 몸에서 구름사탕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지요

 

별무덤 도시를 몰래 빠져나와

가만가만 당신의 어깨를 안아보고 싶었으니까요

 

하루 종일 비 내리는 검은 숲을 지나

무모하게 쏟아 붓는 햇살을 사랑이라 믿은 적이 있지요

 

마음의 문들이 열렸다 닫히는 동안

장엄했던 음악들이 농담같이 흩어집니다

이윽고 푸르고 시린 시간들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내안에 뜨거운 바다가 공기같이 스미고

 

그대의 검은 머리 위에 누군가 던지고 간

하얀 꽃잎들이 바퀴 속으로 쏟아집니다

 

아무리 달려가도 몇 겹의 허공들

 

물비린내 번지듯 슬픔의 냄새를 풍기며

어디쯤

흘러가 벼렸을 까요

 

어제의 은빛 바퀴들은,

 

 

 

 

 

사라진 꼬리뼈의 안부가 궁금한 오후3시

 

 

나는 한 번도 녹아보지 못한 단단한 불꽃주머니를 매달고 있다 작은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빛처럼 종이와 잉크가 없이도 내 속은 자욱하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머나먼 나라로 가고 싶었다 깊은 어둠 속으로 도르르 말려드는 한낮 사실 당신에게 정해진 순서는 없다. 뜨거운 손끝에서 마모되어 낙하하는 시간의 푸른 입자들 같이 낡은 페이지 속으로 걸어간다 아니, 환한 어둠 속으로 떠밀려간다 그렇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오후 3시의 햇살들과 창밖으로 녹아내리고

 

오래 전 꿈을 찾아 흔적을 지워버린 발자국들, 손바닥에 묻힌 밀가루 알갱이같이 공기 속을 부유하는 먼지 속에 먼지같이 반짝거리는 것들은 꼭꼭 숨어있다고 누군가 말해주었지

 

풍경 속으로 당신이 녹아든다 유랑하는 길고양이의 오른 쪽 눈과 왼쪽 눈 틈새로 한 겹 씩 두꺼워지는 별들의 세계, 아득한 것은 아득하게 넘겨버립시다 침묵합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소란스러움을 낭비해 버립시다. 밤낮 없이 서로의 눈망울 속에서 넌출거리던, 쨩쨩거리던, 먼 바다 이야기는 이제 덮기로 하지요 풍경 속으로 모두가 스며들어간 지금 그림자들이 모르스부호처럼 몰려 온다 퍽퍽 소리를 지르며 하늘 끝으로 증발해 버린 검은 새들까지도

 

한 호흡이 또 한 호흡에 떠밀려 상상의 세계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쯤에서 우리 모두 놓아버리기로 하지요

이만, 총총……

 

 

 

 

 

 

 

허공그네를 타고 있는 절벽 아래

다리를 끌고 사라지는 그 여자의 등 뒤로

쏟아지는 화살비

 

빗방울 속에 하얀 손가락이 꼼지락 쥐고 있는

햇살 한 올이 당신의 눈동자 속에

투명하게 흐르는 시간

 

얇은 유리창이 덜컹거리네 바닥으로 쏟아낸

소음들이 웅크리고 앉아서 상처뿐인

맨발을 쓰다듬는 밤,

 

미안하지만 우리들의 기억창고는

너무 아득해 뭉텅 뜯겨져 나간 솜이불 같이

갑자기 쪼그라진 웃음소리

 

혀끝에서 녹아버린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밤이었던가

뒤돌아보면 측백나무 검은 그림자같이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 없어

 

허공그네가 바람 속에서 버둥거리는 속도와

구름 밖을 빙빙 도는

새들의 빈 날개 짓들 사이를

 

이 슬픈 음절은 지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네

어쩌면

내 몸속에서 나 몰래 잉태된 것들인지도 몰라

 

입을 벌릴 때마다

푸르고 시린 뱀들이 쏟아지네

천길 벼랑 위로

푸르고 시린 뱀들이 기어오르네

 

 

 

 

 

스틸녹스*

 

 

내 창문을 두드리던, 머리칼 풀어헤친 바람소리

밤새 짐승의 울음소리들 어디서 태어났을까

왜 내 가슴팍을 뱅뱅 돌아치는 것인지

 

“이봐요, 그만 날 좀 놓아줘요. 왜 느닷없이 천장 가득 노란 알전구를 풀어놓는 거예요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구요 A부터 Z까지 숨차게 불렀구요. 양 한 마리, 양 스물아홉 마리, 양 백 두 마리 혓바닥에 멀미나게 숨은 그림 찾기만 했다니까요”

 

밤새 정수리에선 나사가 빠져나가고 있었지

마침내

헐거워진 내 몸을 돌돌 말았어

끝없는 레일 위를 달려갔고

벽과 벽을 통과하기도 했어

 

내 몸을 접었다 펼쳤다

귀속에선 꼼틀거리는 애벌레들

방 안 가득 꼬치를 뽑아내고 있어

 

* 수면유도제.

 

 

 

 

 

우로보로스

 

 

언제부턴가 죽은 나무에 꽃이 핀다는 전설 따위를 믿게 되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사지를 버둥거려야 했다 달콤한 은유와 올무는 한 뿌리였으므로 잽싸게 몸통을 부풀리며 공간이동을 해야 한다 그들은 비명을 날렸고 내 몸을 짓뭉겠으며 침을 뱉고 돌아섰다 나는 뱀눈 같이 혀를 날름거렸다 밟히면 밟힐수록 꼼틀거려야 했다 그들이 일용할 양식이나 부드러운 첫날밤 침대 위에 오물을 숨겨놓았다 난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것들로부터 나는 사라지고 또 삭제되고 도저히 아무것도 도착할 수 없는 곳에서 은밀히 존재했다 너의 심장에서 너의 심장까지 백만 년이 걸렸으며 아득히 먼 곳에서 내 발등까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시작메모

예詩몽

 

1. 시, 내 주머니 속에 박트리아 낙타가

폭풍 속이었나봐. 전화번호부 같이 펼쳐진 사막은 아니었지만 뜨거운 호흡소리가 들려 왔어. 바람은 바람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칼날을 내리쳤지. 발바닥이 달라붙는 계절이 돌아왔어. 내가 키우는 어린 것들은 손톱만큼씩 자랐어. 어린 것 하나가 폭풍 속을 탐험하러 떠났던 거야. 폭풍 속에는 검은 별들이 박혀 있었어. 닳고 닳은 내 주머니 속에는 박트리아 낙타가 꼬물거리고 있어. 안이나 밖이나 울퉁불퉁한 것들이 내 안에 새카맣게 좀을 슬고 있지. 무협영화 배우 같이 얼굴이 우르르 쏟아졌지. 쏟아진 머리들이 바람개비 같이 돌아가고 있었어. 화면을 바꾸고 있지. 그대의 사막을 보았던 거야. 내 안의 낙타는 눈꺼풀을 밀어내고 있었어. 슬쩍슬쩍 세상을 컨닝하고 있었지. 모래폭풍이 휘몰아치는 그 때 내 주머니 속에 박트리아 낙타가! 낙타가! 하나의 생각만으로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황량한 마음속을 달리는 시마와 사막을 횡단하는 박트리아 낙타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2. 시, 그를 위한 변명

녀석은 염치없게도 꼬리를 좌우로 팔랑거리며 방안으로 스며들었지. 내 안에서 서랍이 하나씩 열리고 있었어. 온몸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어. 검고 푸른 달을 품고 있던 나는 거북이처럼 뿔 하나는 움켜쥐고 살고 싶었어.

어찌나, 마구 찔러대는지 구름밭이 온통 핏물이었네. 달 속엔 가시가 너무 많아.* 아직도 많은 가시고기들이 내 몸 밖으로 우레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네. 몸 밖으로 흩어지는 하얀 비늘들 좀 보아 서슬 푸른 날개와 퍼덕이는 가시고기 떼!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늙어가네. 날마다 거울이 금 가는 소리도 들리네. 별빛 수군거리며 너 같은 건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었어. 묵언수행을 하던 그림자들마저 하나둘 사라지네. 아이들도 내 품안에서 사라지네.

블라인드 쳐 진 방안으로 감추었던 뿔 하나가 튀어나왔지 나는 그걸

지상으로 솟은 무덤이라고 생각했어 뜨거웠던 날 우리가 심어놓은 달이라고 생각했어. 우리 함께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을래? 너에게 보낸 마지막 메일이었어

 

3. 내 시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만 걸어 다녔지. 몸에 붙인 액세사리들, 주어, 동사, 형용사를 탁탁 털어내고, 내 몸을 끌고 다니는 목소리의 빛깔이나 자잘한 소음들을 사방에 흩뿌리면서, 아스팔트가 기우뚱거리자 한켠 어둠을 움켜진 손이 부르르 떨리면서 허공으로 굴러 떨어졌어. 엎치락뒤치락 왼발을 디뎌 보지만 그 벽은 너무 깊어. 살려줘! 살려주세요! 그림자들이 넌출거렸어. 주어, 동사, 형용사를 털어버린 내 몸은 너무 가벼운데도 아무도 날 뜨겁게 안아주지 않았지. 너는, 뿌리 깊은 우물 속에 입술을 부비고 있지만, 나는, 늘 허기지고 목이 마를까? 너를 한 번 안고 난 후 난, 단잠을 잘 수 없는 날들의 시작이었어. 하지만 ‘all I ask of you’ 내 방식대로 그렇게 o.k 걸어 갈 수밖에.

 

김서은∙2006년 ≪시와세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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