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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특선/이정모/여백에 대하여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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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이정모
여백에 대하여 외 4편
중심 없는 것들은 늘 지분을 고집한다
지워진 한숨과 눈물의 증거가
무게 없는 세계 속으로 우물쭈물 사라지면
돌아갈 수 없는 길이 다가선다
희망이 스러질 때 일어서는 나무들
기다림의 소리 없는 절창으로 다시 만난다
매일 이별을 고하는 애인처럼
익숙하게 빈 칸을 채우고 있다
온갖 약속을 즐기면서도 심심한 공간은
바꿀 자리가 없다
빠져나가도 보이지 않는다
눈치 챘겠지만, 이 시대 불확실성의 등에는 눈이 없다
공포와 슬픔의 눈빛만 흔들리며 계단을 내려간다
거품을 세우며 중심을 잡고 있는
바다를 따라가고 싶은 것이다
나도 바람에 머리채 내어주고
파도 따라 눕고 싶은 배로 산다는 것은 물드는 것이지만
어린 새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그 門을 나올 때
누구라도 가져갈 게 있다면 열어 놓겠다
여백에 세드는 투명한 바람을 위해서
집으로 가는 길
마지막 햇살이 산등에 엎드린다
소리 없이 일어서는 그늘의 뼈들이
실루엣으로 일상을 삼키면
시장기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어
고개 숙인 저녁과 연민으로 젖는다
자꾸만 높아가는 가을하늘이
허공에 달린 홍시에 시선을 풀면
저것도 열매니 꽃을 볼 수 없었겠구나 생각하니
엄마 재봉틀 돌리는 소리 들린다
모든 생명이 깃든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를 가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돌아가고파도 열리지 않던 세계가
여인의 치마폭에 숨겨져 있었다
그 때는 몰랐다는데 어쩔 것이냐고
웃음 한 술 떠서 시부저기 넘기려 하는
목구멍의 허물을 용서한다
계곡은 소음을 헤아리지 않고
물소리에게 귀를 빌리고
구름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허기처럼 돌아올 날들은 계속될 것이다
공간
지난 일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나
기록하지 않는 책
엿들을까 흔적조차 지운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둘러보아도 변한 게 없어
기대를 접는 텅 빈 흰 벽
기다리는 꽃대와 봄날, 그 사이에서
긴장이 팽팽해도 실행할 수 없는 버퍼링
사라지는 꽃을 지켜보고만 있다
가뭇없이 꽃들이 피어
꽃대궁에서 웃자라더니
미끄러지다가 매달리면
내 기억 속의 꽃은 사라진다
끊임없이 시도하는 흔들림은 살아있어
우주와 대화하는 통로로 이어진다
매 순간 구성하고 움켜쥐지만
끝내 무위로 흐려지는 꽃잎
무심과 무결심으로 허공을 아우른다
차마고도
오르는 길인가 내려오는 길인가
세월을 가로지르며 가는 것이다
돌부리마다 시름인 듯 밟으며 가는 길목
조각난 물소리가 햇살을 키운다
배고픔과 욕심을 떨어뜨리니
절벽 위의 집이 깃털처럼 걸려있다
한 번도 앞선 적 없는 바람을
사다리로 걸어놓고 휘파람 불며 간다
사랑하는 것을 죽여라*
설산 위 구름에서 들리는 소리
먼 천둥처럼 옷자락 끌며 오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수척해진 질문이
두리번거리며 발자국 소리를 죽인다
모든 게 지나가고 사라져도 좋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길이
산과 계곡을 소개하니
같이 가는 이야기조차 손을 내민다
너무 많은 몸의 촉수
등산화 끈처럼 조여도
머리카락 따라 흘러내리는 외로움이
순박한 연애처럼 자근자근 밟힌다
*신정민 시집 <티벳 만행>에서 인용.
까마귀
너는 수의처럼 낯설어
내가 산산이 부셔질 즈음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네게 말을 건넬 때마다 모래처럼 흩어지는
너는 기억의 가지에 앉아 검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어조는 비아냥으로 들리고
내가 키워온 유랑극단의 추억 속에서
노래 없는 악보를 찢는다
너는 애써 흥미 없는 영화의 엔딩을 노리다가
숨을 쉴 때마다 조바심을 절정으로 끌고 간다
느끼고 가지려 않는 바람처럼
너는 곁눈질하며 그림자 없는 흔적으로 남아
내 등 뒤에서 적막을 덧칠한다
불길이나 물길처럼 뒤에 남아
고요를 헤집는 부리는
죄의식 없는 절망을 기르고 날을 세우지만
햇살에 거덜나서 날아가고 마는
저 짐승이 내 품속에서 또 수태되고 있다
시작메모
삶을 응시하는 울림을 꿈꾸며
무작정 시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나를 그렇게 가도록 만들었다. 어린 학생의 서툰 창작에서 성인 시의 영감에 이르기까지 삼십 년이 걸렸지만 나는 행복한가? 행복 추구야말로 인간의 본성인데 나는 이 말에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왜 시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을까. 어찌 보면 너무나 단순한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왜 이리 어려울까. 시인이 시인다우면 행복할까. 인간이 인간답기가 힘든데 나는 왜 이 경계에서 헤매는 것일까. 정직하게 꿈꾸고 반성하면서 아픔과 현실을 넘어서고 싶을 따름이지만, 사람으로 잘 살아내지도 못하면서 시인으로 잘 살려는 나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공부하고, 믿고, 사랑하면서, 자아를 성취하도록 시를 쓰면 길은 열릴 것인가. 운남성 이틀길을 걸으면서도 내내 생각했다. 해질녘 어스름 속에서도 끝없이 생각했다. 제도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모색으로 모자람이 없는 것이 시라는 나의 믿음을 믿고 싶다.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시의 길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대중과 호흡하면서 삶을 응시하는 울림이 있는 시, 이것이 나의 마지막 공부일 것이라는 예감이다. 어쨌거나 탐미의 도가니에 들었으니 무엇을 녹여서라도 새로운 창조를 건져 올려야 하리라. 세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나는 세상을 사랑할 것이다. 나의 마지막 자존심과 더 높은 행복을 위하여!
이정모∙2007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제 몸이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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