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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겨울호)신작특선/김보숙/혀를 들키다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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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선
김보숙
혀를 들키다 외 5편
새벽기도를 다녀오는 길 건널목에서 차에 치인 만순이 아줌마는 부러진 앞니를 기부라 말한다. 하늘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진 성경책 속에서는 그날의 헌금이 쏟아졌는데 만순이 아줌마는 그날의 헌금을 구경꾼이라 말했다. 입 밖에 살던 혀가 입안으로 들어간다. 어른이 될 수밖에 없어 어른이 된 어른들은 어른이 될 수밖에 없어 어른이 된 어른들에게 혀를 보이고 말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구경꾼은 혀가 없어도 말을 전할 수 있었다. 만순이 아줌마가 찬송을 부를 때마다 나는 새로 해 넣은 앞니가 하얗게 반짝이는 것을 본다. 신에게 미분류 되어 고아처럼 울다가도 만순이 아줌마의 하얀 앞니를 볼 때면 혀를 굴리어 말하고 싶어진다.
가족의 탄생
금방이라도 저 천장은 무너질 것만 같아. 그렁그렁한 천장을 나는 며칠 동안 바라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나는 천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거야. 비라도 내리면 어떡하니, 가장도 없는 안방이 들통 나면 어떡하니, 그러면 나는 다시 아버지의 셔츠와 흰 팬티를 찾아 빨랫줄에 걸어놓길 반복해야 하쟎니, 방이 여러 개라면 가족을 여러 명 만들어 방을 나누어 주겠어. 가족과 함께 그렁그렁한 천장을 뚝 그치게 만들 수도 있겠어. 친구 아버지의 관을 들어주다가 허리를 삐끗한 오빠는 아버지의 관을 들어 줄 수 없어서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허리 근처에 맴돌던 식욕을 잡아 뽑지 못해 그렁그렁한 날들이 많았지 머니,
어떤 시절
지붕 위로 던져진 유년의 치아가 궁금한 밤이다. 실에 묶인 송곳니는 어느 집 지붕 위에 심어졌을까. 빠진 이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면 놀이가 되던 저녁, 은퇴한 구름 주위로 몰려오는 별자리의 이름들은 나의 첫 비문이 되었다. 유산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는 시차를 잃고 어지러워했다. 한 여름, 밍크담요 속으로 들어간 어머니의 발을 따뜻한 물로 닦아주면 먼 시차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 아가야, 아가는 별이 되었단다. 입 안에 고인 물방울은 아무리 삼키려 해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날 오빠의 일기장에는 ‘달이빨간데’ 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이 이빨을 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개와 새
개에 관한 시를 검색하면 새에 관한 시가 연관검색어이지. 나의 시를 읽은 너의 소감은 시집에도 주의사항이 필요해. 노약자나 임산부는 보지 마시오. 개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마는 나의 시는 개와 새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개에 관한 시를 검색하지 않은 너에게 개와 새에 관한 나의 시는 ‘우울을 유지하는데 요긴하게 쓰인 파란칫솔’처럼 연관이 없는 것들이었겠지. 지금도 노약자나 임산부를 염려할 테지. 듣지 못하여
* 딱한 귀는 거울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야. 네가 딱한 귀를 가지고 개와 새에 관한 시를 듣고 있으니, 시여, 참 딱하기도 하지.
* 이상의 거울.
생명의 나무
하필 할머니는 언니가 올해 가장 아끼던 클림튼의 생명의 나무에 똥칠을 하고 만 것이다. 퇴직금을 받아 세운상가로 간 언니는 복제품제조공장장에게 퇴직금을 다주고 클림튼의 생명의 나무를 샀다. 그날은 빵을 먹어도 좋을 만큼 날씨가 화창했지만 언니는 우비를 입고 나갔다. 비는 언니만 쫒아 다녔다. 언니는 어제까지만 해도 다림질을 하던 남색 유니폼을 접어 클림튼의 생명의 나무를 닦았다. 복제품제조공장장 아저씨는 생명의 나무 옆에 친절하게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복제품제조공장장 아저씨는 자신의 이니셜을 지우고 나면 생명의 나무가 지워질 것이라는 주의사항을 언니에게 전달했지만 언니는 이니셜을 지우기 위해 칼을 들었다가, 사포를 들었다가, 결국 지우지 못하는 이니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니가 지우지 못한 복제품제조공장장의 이니셜이 적힌 클림튼의 생명의 나무에 할머니가 똥칠을 한 오늘은 빵을 먹어도 좋을 만큼 화창한 날씨이다.
오늘의 운세
아버지는 나간일 없어 흙이 묻지 않는 랜드로바를 오늘도 털어낸다. 아버지의 발자욱이 찍힌 곳이 없어 나는 골목에서 길을 잃을 때가 많았다. 더듬어 귀가를 하면 묻지 않는 흙을 털어낸 랜드로바가 나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나는 세상의 흙 대신 세상의 소식을 묻히고 돌아왔다. 안방은 인큐베이터 안처럼 조용했다. 숨 쉬는 소리만 새근새근 들려왔다. 조간신문을 버리지 않고 그 저녁이면 나는 아버지에게 오늘의 운세를 읽어 주었다. 랜드로바를 신고 나갈 수 있다고 하니? 네, 아버지 오늘밤에는 랜드로바가 달을 볼 수 있다고 해요. 아버지 몰래 랜드로바를 신고 마당으로 나온다. 고갤 쳐드니 보이는 아버지라는 달.
시작메모
글피에 눈이 내리네
글피엔 눈이 내립니다. 미귀가자를 찾는 전단지에 포장되어있는 호떡이 미귀자자의 얼굴에 기름을 칠합니다. 귀가하였을지도, 귀가되었을지도 모를 미귀가자의 얼굴들이 종일 호떡을 포장합니다. 나는 이면을 바란 적 없으나 나의 시는 미귀가자를 찾는 전단지처럼 이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접혀지거나, 구겨지거나, 더럽혀지거나 하여, 정면의 기억마저 소멸되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에게로의 귀가가 늦추어지는 시절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절을 악다구니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이 시절이 아니었다면, 나의 시는 정면도, 이면도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보숙∙2011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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