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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추천/이닥/휘프노스를 만나다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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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384회 작성일 13-03-2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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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시부문)|

이닥

휘프노스를 만나다 외 4편

 

 

불면의 밤은 낮보다 더 하얀 얼굴이다.

어떻게 하면 휘프노스를 만날 수 있을까

뒤로 걷다가 앞으로 걷다가 하는 사이에도

서가에 책들은 명료한 눈으로 빼곡히 정렬된다.

벌러덩 누워 거꾸로 열을 센다. 스무 번 열을 센다.

숫자를 쫓아갈수록 밤은 더 하얀 얼굴이다.

숨어있던 활자들이 덩달아 걸어 나온다.

중얼중얼 풀어 놓는 간, 무, 청, 지, 노, 순, 개……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른다.

지금은 간신이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부른다.

그리고, 그리고, 무인도에 개나리꽃이 피고,

자꾸만 튀어나오는 활자들이 음절이 되고

음절들은 걷잡을 수 없는 노래가 된다.

불면이 불면을 삼킨다. 삼킨 불면이 불면을 소화한다.

드디어 휘프노스를 만나다.

 

 

 

 

 

꿈꾸는 지하공방

 

 

지하공방에는 창을 낼 수가 없다.

창이 없는 지하공방에는 하늘이 없다.

산들거리는 바람의 노래가 없다.

토닥거리는 비의 자장가가 없다.

낡은 의자와 작업대가 삐걱거리고,

오래된 형광등만이 하늘을 흉내내고 있다.

손목에서부터 통증은 스물거린다.

어깨로 등으로 허리로 허벅지로 미끄럼을 타고

두통은 그림자처럼 그 놈들을 따라다닌다.

막사발에 커피 가득 말아 물처럼 마신다.

종이 위에 불빛, 불빛 위에 종이, 종이 위에 통증,

통증 위에 구름, 구름 위에 별, 별 위에 꿈,

꿈 위에 다시 종이, 종이 위에서 벌거벗는 꿈,

해도 달도 출입 금지된 통로를

꿈은 열 수 있다고 밤새 도전적인 자세다.

시린 바람이 풀 죽인 몸뚱이에 비타민을 투여한다.

밤보다 밤 같은, 낮보다 낮 같은,

지하공방의 맥없는 꿈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린다.

 

 

 

 

 

한증막

 

 

경고, 빨래를 널지 마시오. 매일 패기처분 합니다. 한증막 안에 걸려 있는 경고문 위에 위풍당당한 팬티와 브래지어가 날이 갈수록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바싹바싹 오그라들고 있다. 아무 데나 내걸어도 기분 좋게 마르던 것들이 빨래터를 잃고부터 생기를 잃었다. 그럴 때마다 고향의 빨래터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온다. 오다가 끝내 자진한다. 너무 멀다. 도무지 올 수가 없는 거리이다. 그 사이에도 빨래는 아무리 빨아도 때가 빠지지 않는다. 온갖 세제를 뿌려 봐도 헛일이다. 세월 탓이다. 세상 탓이다. 뜨끈뜨끈한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빨아도 때가 지지 않는 빨랫감으로 걸려 있으면서, 나는 매일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있다.

 

 

 

 

 

자두의 기억

 

 

지독한 맛을

모르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완벽한 굴복.

 

맛이 사라지고도

일 년 삼백 육십오 일

떨쳐내지 못하고 부르르 떠는

한밤의 몸살.

 

 

 

 

 

껍질의 마법

 

 

늘어진 뱃살을 연신 주무른다.

늘어진 뱃살이 무거울수록 수다는 가볍다.

헹굴 필요가 없는 진짜 이야기들이

별똥처럼 떨어져 수채구멍으로 사라진다.

껍질이 없다는 것이다.

탕 안에서 마주 앉으면 누구나 친구다.

어떤 허물도 자랑으로 변한다.

기분 좋게 쏟아져 나와 가볍게 사라진다.

껍질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 만난 이의 가슴도 어깨도 낯설지 않다.

낯선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아 편안하다.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깝기도 하다.

껍질이 없다는 것이다. 알맹이는 다 똑같다는 것이다.

껍질 한 겹 벗었다고 이토록 같아지는 알맹이가

껍질 뒤집어쓰는 순간 무섭도록 달라진다.

늘어진 뱃살도 사라진다. 안면몰수다.

껍질의 마법이다.

 

 

 

 

 

소감/평안과 위안을 주었던 시인들을 기억하며

 

백 번의 손길이 닿아야 비로소 한 장의 종이로 태어나는 한지는 만드는 과정이 참으로 고단하고 힘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천 년을 숨 쉬는 종이로 태어나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소중한 재료가 되어 또 다른 창의적 예술품을 탄생시키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한지공예를 하면서 느꼈던 일들을 시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시를 쓰는 일은 한지작품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허둥대지도 초초해 하지도 않으며 천천히 쫓아가고 싶다. 마음에 평안과 위안을 주었던 시인들의 시를 기억한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깨우침을 준 낡은 작업대에 의지하여 시간을 뒤로 걸으며 시의 그림자를 쫓으려 한다. 송구스러운 작품을 추천해주신 강우식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이닥

 

 

추천평/현대인의 병적 신드롬으로 이어지는 세계

 

이닥의 「휘프노스를 만나다」 외 4편의 시들은 모두 개인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개인이 겪은 경험이나 일상사를 시로 만드는 경우가 우리들에겐 많은데 그런 시에서 우리는 많이 동질성적인 공감을 가진다. 이닥의 시 「꿈꾸는 지하공방」은 지하공방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작품을 해야 하는 예술가로서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난 시다. 막사발에 가득 커피를 마시며 ‘종이 위에 불빛, 불빛 위에 종이. 종이 위에 통증, 통증 위에 구름’으로 이어지는 시는 너무나 리얼하다. 「휘프노스를 만나다」는 불면증을 극복하는 단계를 그린 작품이다. 불면증 또한 현대병이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시달리고 있는 증상인데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하고 질서가 무너지는 상태에서 불면이 불면을 먹어 소멸되는 힘으로서 노래를 삽입한 휘프노스(잠)로 가는 단계의 발상이 좋았다. 즉 이 작품이 내보이고자하는 메시지는 현대인에게 잠이 필요하고 잠이 휴식뿐만 아니라 꿈을 가져오는 것을 비치고 있음이다. 「껍질의 마법」은 목욕탕에서 다 벗어버린 알몸, 껍질이 없는 알맹이는 너와 내가 다 똑같다는 것을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이 테마는 문학의 영원한 과제이기도한 가면의 변형으로 껍질을 가져온 것이 공감을 주고 있다. 나는 이닥의 이런 개인사적인 작품이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인이 가진 병적 신드롬까지 이어지는데 주목하고 있음을 밝힌다./강우식(시인, 글), 장종권(시인), 고명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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