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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정우영의 시평/시는 약이다, 하루에 한 편씩 씹어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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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959회 작성일 13-03-2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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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영의 시평

시는 약이다, 하루에 한 편씩 씹어 먹자

 

 

1. 우리 아이들이 죽어간다

오늘 여기, 하늘에 왜 이렇듯 많은 우울이 떠 있는가. 사람들을 동시적으로 찍어 누르는 이 우울은 도대체 어디에서 뿜어져 나온 것인가. 어떻게 해야 동시대 집단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어둔 우울, 말끔하게 지워버릴 수 있을까. 사람의 가치, 삶의 의미를 깨달으면 가능해질까. 사람이 수단이 아니라 존재 자체임을 알게 되면 다 흩어질까.

아닐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우울, 좀체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동시에 한 마음으로 한꺼번에 휙 날려버리지 않는 한, 쉽게 가셔지지 않을 터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왜 새삼 우울을 이처럼 들먹이고 있는 걸까.

우리 아이들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이같은 우울에 사로잡혀 시들어가고 있는 까닭이다. 충동적인 에너지로 활기차게 들끓고 있어야 할 우리의 아이들을 보라. 애처롭게 파리하지 않은가. 몸피는 성인이지만 정신은 아직 유치한데, 물질과 탐욕은 이미 그들을 좀먹고 있다. 벌써부터 돈과 권력과 계급과 눈치에 길들여져 간다. 무한한 가능성의 시야 펼쳐야 할 아이들이 고개 꺾여 제 발등만 찍고 있다. 제도를 뛰어넘는 새로운 모색에 미쳐야 할 청춘들이 제도의 맨 밑바닥에서 제도에 깔려 신음하는 중이다.

현대사회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건 비단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청소년들이 가장 비참하게 착취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채 피기도 전에 꺾여버리는 꿈들이 얼마나 많은가. 며칠 전 또 아이 둘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 최근 대구 지역 한 곳에서만 목숨 버린 아이가 열 명이나 된다지 않는가.

이렇게 될 때까지 우리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저 가녀린 아이들이 목숨 바쳐 우울사회 이렇듯 고발하고 있는데, 우리의 눈과 귀는 어느 쪽으로 열려 있는가. 일신의 안락과 돈의 맛 아닌가. 부끄럽고 참담하다. 울분과 치욕이 동시에 치밀어 오른다.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우리 사회가 얼마나 끊임없이 퇴행하며 패악을 저질렀는지. 우리가 정의라고 믿었던 가치들은 쓰레기통에 처박혔으며 부도덕과 부조리가 온당한 가치인 것처럼 설쳐댔다. 숨이 막혔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시대였으며 후안무치厚顔無恥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나날이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환경, 심지어 사상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게 없다. 다 왜곡되거나 짓찢겼다.

그런데 누가 이 정권에게 이런 특권을 쥐어주었나. 우리들이다. 변명하지 말자. 우리들이다. 우리 손으로 뽑았으며 잘못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철저하게 맞서 막아내지 못했다. 어느덧 우리 맘속에도 탐욕이 치고 들어와 불감증의 고름이 차오른 것이다. 이쯤에서 어깨 힘 빼고 맘 편히 말하자. 나는 우리가 다소간 타협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타협이다. 적어도 군부는 아니잖아. 부도덕하긴 하지만 경제는 나아질 거야. 이와 같은 우리의 착각이 우리를 찌른 것이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은 불행하게도 오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내일을 넘어 저 먼 미래에까지 손길을 뻗쳐 우리 아이들의 희망마저도 모조리 빼앗아버렸다. 우리 아이들에게 암담한 미래를 펼쳐놓은 것이다. 아이들은 일생을 빚으로 시작해서 빚으로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 달리 풀어낼 방도를 찾지 못한 아이들은 그리하여 서로에게 적의를 겨누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현재의 자본과 권력에게 자신들의 앞날을 볼모잡힌 셈이다.

하지만, 이제 유예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목숨 끊는 아이들이 너무도 많다. 두려울 만큼 숱한 아이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곳곳에서 떨어져 내린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국가 중 제일 높다고 하는데 아이들 자살률은 어떨까.

흔히 언론매체에서는 이와 같은 사회현상을 아이들 자신의 나약함이나 현실도피라는 말로 덮으려 애쓴다. 사회의 치부를 가리려는 얄팍한 수작이라는 생각밖에는 안 든다. 어찌 이것이 개인적인 문제일 수 있는가. 나는 아이들이 일찍이 우리 사회가 몸서리치는 약육강식의 세계임을 알아채버린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레 질린 아이들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유폐시키거나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려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특히 옥상이라는 곳에 눈 집중한다. 왜 하필 요즘 아이들은 죽음의 장소로 옥상 같은 높은 곳을 선택할까. 옥상은 그야말로 출구도 없고 퇴로도 없는 수직의 정점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끊임없이 요구하던 상승 핍박의 벼랑 끝이 옥상인 것이다.

자,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쏟아지는 죽음이 ‘정신력이 모자라서’라거나 ‘가정사 때문’이라고 여전히 우길 것인가? 나는 ‘자본주의사회의 밀어붙이기식 스트레스’와 ‘계급 상승 제일주의가 가져온 탐욕’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들이 옥상에서 떨어지는 걸 참담한 상징적 항거로 읽는다. 사회적 타살에 대한 아이들의 눈물겨운 투쟁인 것이다.

 

2. 슬픈 인사의 그늘

나는 이제 아이들을 그만, 그만 핍박하라고 외치고 싶다. 불쌍하지도 않느냐고. 저 여리고 순한 것들의 목숨 건 투쟁이 소름끼치지 않느냐고.

저 아이들이 옥상에서 신음으로 내지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사」가 당신 귀에는 들리지 않느냐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인사

잘 살아요―

여기서 따로 가면서

당신은 내일을 살 수 없고

내일은 나 혼자 가면서

아무도 뒤에서 지켜보는 이 없는 거리를 혼자 가야 하는

가서는 돌아올 길을 잃어버리는

뒤가 텅 비어버리는 그 인사

잘 살아요―

잘 살았어요? 그간의 얘기 나눌 기약도 없고

어디선가 같은 시간에 있을 거라는 환상도 가질 수 없는

뒤가 휑하니 뚫려버리는 그 인사

삶은 이미 벼랑 끝에 있었다는 말

그대라는 실낱에 전부가 매달려 있었구나

잘 살아요―

아, 인간에게도 뿌리가 있었구나

등뒤에 깊은 심연이 있었구나

잘 살아요-

푸른 나무가 공중에 던져지는

아, 자유라는 이 공포!

―백무산, 「슬픈 인사」 전문(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2012)

 

“잘 살아요-”라고 하는 당부는, 언뜻 들으면 격려 같다. 하지만, 어조를 늘어뜨린 채 처연하게 “잘 살아요―” 하면 섬뜩하다. 인생을 하직하는 자의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는 까닭이다.

백무산은 기막히게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다. 그러고는 수많은 아이들의 하직 인사를 “잘 살아요―”라는 말에 담아 대신 전한다. 내가 최근 들은 인사 중 가장 슬픈 인사이다. “나 혼자 가면서/아무도 뒤에서 지켜보는 이 없는 거리를 혼자 가야 하는/가서는 돌아올 길을 잃어버리는/뒤가 텅 비어버리는” 그런 인사이다. 나는 그 인사에서 “어디선가 같은 시간에 있을 거라는 환상도 가질 수 없는/뒤가 휑하니 뚫려버리는” 삶의 안타까운 마감을 본다. 가슴 먹먹하다.

어디 아이들뿐이랴. 나는 죽음을 앞에 둔 모든 이가 남은 자들을 향해 이와 같은 인사를 띄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스로는 얼마나 무섭고 쓸쓸했을 것인가. 나는 삶에서 공포스러웠던 자가 죽음을 통해 자유로울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없다. 그의 결행에는 “등뒤에 깊은 심연이” 남을 수밖에는 없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푸른 나무가 공중에 던져지는” 그 순간, 아마도 그는 “자유라는 이 공포!”에 처절하게 쓸릴 것이다.

그런 절규를 가슴으로 느끼며 나는 “잘 살아요―” 하는 인사를 다시 곱씹게 된다. 이 인사는 정말 단순한 하직 인사일 것인가. “삶은 이미 벼랑 끝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대라는 실낱에 전부”를 매달아 두고 있는데. 아니다. 나는 그 인사에서 기구祈求를 듣는다. “잘 살아요―”는 그대에게 내미는 생환生還의 몸부림인 것이다. ‘나, 너와 함께 우리 같이 잘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그 말속에는 들어 있다.

나는 옥상이라는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저 아이도 그러할 것이라고 여긴다.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나도 너랑 같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신호.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는 없다. 스스로 발 내리기 전까지 그는 오직 혼자다. 나는 그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속 그늘을 벗어버리길 바란다. 사회가 그에게 각인시킨 ‘루저’ 곧 ‘실패자’라는 그늘은 가볍지 않은 형벌이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사회도 생물이어서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 오늘 그늘이 반드시 내일도 그늘이지는 않다. 실로 그렇지 않은가. 그늘 없이 어찌 양지가 있으랴.

그늘은 곧 땅이고 바닥이다. 삶을 온전히 튼튼하게 하는 바탕인 것이다. 양지를 지향하는 건 모든 생물의 꿈이지만 그늘 없이는 양지도 없다. 더욱이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는 양지 되는 게 만물의 이치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그늘인 자는 반드시 내일이거나 혹은 미래 그 어느 날 틀림없이 양지가 된다. 그늘이라고 비탄에 내몰려 삶을 파탄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새들도 갈 데가 있어 가지를 떠나고

때로는 횡재처럼 눈이 내려도

사는 일은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하다

그걸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다

―이상국, 「그늘」 전문(시집 「뿔을 적시며>, 창비, 2012)

 

이상국은 말한다.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라고. 누군가에게는 그늘이 벗어나고 싶은 족쇄이겠지만, 그에게 그늘은 시이다. 얼마나 긍정적인 루저인가. “나의 시는 나의 그늘이”라니.

그의 말대로 “사는 일은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상처를 위무하고 조잔한 심사를 달래주는 것이다. “혼자 버려두면 가엾으니까.”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혼자인 날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위로 받고 싶지만, 위로 받을 수 있는 손길은 너무 멀지 않은가. 나는 말하고 싶다. “누가 뭐라든 그의 편이 되어주”라고.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의 말대로 “누가 기뻐서 시를 쓰”겠는가. 슬픔을 덜어보려고 외로움을 이겨보려고 너를 만나 사랑하려고 시를 쓰는 것 아닌가. 그럴 때 그늘은 무엇이겠는가. 시적 에너지 아닐까. 나는 이것이 그늘의 긍정성이라고 여긴다.

 

3. 먼지가 아니라, 애콩이다

그러나 여전히 저 아이는 배반당한 삶의 뒷면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웬 ‘그늘론’이냐는 눈빛이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겠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황규관의 「먼지」를 들려주고 싶다. 그늘이 마뜩찮다면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먼지는 그럼 어떤가.

 

우리는 먼지로 이루어진 존재다

연애라는 먼지 햇볕이라는 먼지

눈가에 머무는 꽃잎이라는 먼지

그래서 먼지를 마시고

먼지를 세고 먼지 가득한 가방을 들고

먼지투성이인 현관문을 나선다

당신과 잠깐 나눠 가졌던 입술도

다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뜨거움도 식으면 먼지가 되고

세상이 정전되어 털썩 주저앉을 때

허공을 나는 것도 먼지다

그러니까 칠 년이나 산 집에

먼지만 가득하다 상심하지 말아다오

자고 일어나서 남긴 것도 뿌연 먼지뿐

아무것도 아닌 먼지 탈탈 털어보면

바람 따라 눈앞에서 사라지는 먼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먼지

그게 바로 우리의 부분들이고

또 돌아가게 될 미래다

―황규관, 「먼지」 전문(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2011)

 

황규관은 존재도 먼지, 세상도 먼지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먼지로 이루어진 존재”로서, “먼지를 마시고/먼지를 세고 먼지 가득한 가방을 들고/먼지투성이인 현관문을 나선다.” 이뿐만 아니다. 심지어는 지고지순해야 할 사랑마저도 먼지와 같다. 사랑하는 “당신과 잠깐 나눠 가졌던 입술도/다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가 “연애라는 먼지 햇볕이라는 먼지/눈가에 머무는 꽃잎이라는 먼지”라고 쓰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에 의하면 세상은 ‘먼지의, 먼지에 의한, 먼지를 위한’ 공화국이니까 말이다. 도리어 그가 “그러니까 칠 년이나 산 집에/먼지만 가득하다 상심하지 말아다오”라고 쓰는 것이 더 낯설다. 뭘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것인가 싶다.

하지만, 이 진술은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 여기가 이 시의 착상 포인트인 까닭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이 다 먼지인데, 집에 먼지 좀 쌓여 있다는 게 대수이겠느냐. 상심하지 말아라’ 하고. 오랫동안 낡은 집에 살면서 투덜거리는 가족들을 향한 시인의 어줍잖은 변명이 여기에는 스며 있다. 그런데 그 사소한 변명이 부풀려져 아주 색다른 시적 인식인 ‘먼지론’과 ‘먼지적 연기관緣起觀’을 낳았다. 그늘이 뒤집어져 양지가 된陰地轉 陽地變 명백한 실례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의 먼지는 오늘만의 것이 아니다. “바람 따라 눈앞에서 사라지는 먼지”는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먼지”이며 “그게 바로 우리의 부분들이고/또 돌아가게 될 미래”이다. 세상 만물은 다 먼지일 뿐만 아니라, 과거와 오늘과 미래가 다 먼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주의 주인이 먼지인 셈이다.

이제 알겠는가, 황규관의 전언을. ‘먼지인 인간이여, 까불지 말고 겸손하라’쯤 되지 않을까. 한즉 아이야, 우리는 그저 먼지일 뿐이니 세상 무거워하지 말아라. 먼지처럼 티끌처럼 가비얍게 몸과 마음을 열어보자.

세상을 크게 보면 내 마음의 그늘도 커지고 나는 작다고, 먼지처럼 작다고 여기면 그늘도 작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작고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 살피기. 그것들과 나를 동일시하기. 그래야 그 마음에 자리한 무거운 그늘 걷혀질 테니.

하지만 저 아이, 부유하는 먼지에서 가치 없는 ‘부유浮游’만 받아드는지 얼굴색이 밝지 않다. 생명의 온기라곤 전혀 없는 먼지로 내가 뭘 어쩌라고? 하는 물음표를 머리 위에 띄우고 있다. 그렇다. 생명력 없는 먼지로 더 이상 그가 뭘 어쩌겠는가. 먼지는 그저 먼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먼지라는 입자에서 우주를 보고 생명력을 보는 것은, 시인이나 할 짓이다.

이처럼 내 생각도 부옇게 부유하고 있을 때, 이은규 시인이 「애콩」을 들고 온다. 먼지 그만 뒤집어쓰고 애콩이나 까라는 것일까. 아니면 “덜 여문 것들에게선 왜 날비린내가 나는지” 궁리해보라는 뜻일까. 나는 그가 말하는 “덜 여문 것들”의 “날비린내”에서 우리 아이들의 가엾은 몸부림을 읽는다.

 

어느 마을에선 완두콩을 애콩이라 부른다

덜 여문 것들에게선 왜 날비린내가 나는지

푸른 날비린내가 나는 이름, 애콩

생의 우기를 건너다 눅눅해져 애를 태우는 것들

엄마는 왜

이 밤에 콩을 까실까, 콩을

불도 안 켜고

꼬투리를 세워 깍지를 열었는지

텅 빈 시간 몇 알 후둑, 후두둑

그릇 위로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잠시 한숨을 고르고

알맹이들을 한쪽으로 쓸어모으는 손길

알맹이라 착각하고 싶은 둥근 시간들이

꼬투리라는 최초의 집을 떠나면

차오른 허공을 바라보며 허부렁해질 저 꼬투리

열린 방문 사이로 말없이 묻는다

엄마는 왜

이 밤에 콩을 까, 콩을

문틈의 빗줄기 너머로 말없이 들린다

잠이 안 와서, 잠이

철없는 애콩이

꼬투리 잡힐 과오들을 푸르름이라 착각하며

날비린내의 몸을 말아 둥글게 누워 있다

최초의 몸이면서 집인 꼬투리

덜 여문 날들을 다독이느라 푸른 물이 들었을 손

그 손이 인기척도 없이 방문을 닫는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나는 닫힌다. 한 철

―이은규, 「애콩」 전문(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2012)

 

“어느 마을에선 완두콩을 애콩이라 부른다”는데 왜 그렇게 부를까. 그 콩의 여린 빛깔과 여릿여릿함을 표현하는 데 ‘애콩’이 더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완두콩보다는 애콩이 훨씬 더 풋것의 느낌, 어설픈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는가.

바로 그 “푸른 날비린내가 나는 이름, 애콩/생의 우기를 건너다 눅눅해져 애를 태우는 것들”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우리 애들, 청소년들, 젊은것들이 보이잖는가, 그 “철없는 애콩”들이. 그들은 “꼬투리 잡힐 과오들을 푸르름이라 착각하며/날비린내의 몸을 말아 둥글게 누워 있”는가 하면, 또 톡톡 튀어나가 세상 무서운 것 모르고 날뛰기도 한다. 그러할 때 애콩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애간장이 녹을 것이다. 그와 같이 “덜 여문 날들을 다독이느라 푸른 물이 들었을 손/그 손이 인기척도 없이 방문을 닫는다.” 어머니는 아마도 이 밤중에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손에 쥘 것이다. 밤이나 낮이나 바지런히 놀리는 저 어머니의 노동 없이, 어찌 우리의 집이 따뜻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느껴지는가, 아이야. 어머니는 너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너를 가꾸고 있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최초의 몸이면서 집인 꼬투리”이다. 물론 어머니는 “알맹이라 착각하고 싶은 둥근 시간들”인 자식들이 “꼬투리라는 최초의 집을 떠나면” “차오른 허공을 바라보며 허부렁해질” 것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영양과 삶을 다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너라는 존재의 가치를 알겠는가, 애콩이여. 너는 결코 하찮은 먼지가 아니다. 적어도 너는 어머니에게서 세상의 전부를 받았다. 그런 네가 훌쩍 몸 날려 떨어진 뒤, 너를 보게 될 어머니를 떠올려봐라. 어머니의 상심과 참담함이 도대체 얼마나 클지. 아마도 세상이 끝나버린 것 같잖을까.

 

4. 시가 곧 약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아직도 내 말이 미심쩍은 듯 애콩의 꼬투리만 만지작거린다. 꼬투리에서 어머니 영상을 그러쥐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권덕하의 「생강 발가락」을 보여준다. 그러자 이땅의 꼬투리인 아내와 어머니가 안쓰럽게 아이를 올려다본다.

 

저건 뿌리다

무른 진흙 딛고 참은 울음이다

너덜겅 걷다가

배운 다리품이 감췄다가

비어져 나온 생각,

식구들 잠 보듬고 가만히 나가

어둑발 훔치며 좌판 펼치는

아내의 걸음새에

땅을 미는 힘으로 솟은 햇귀가

속 깊이 쟁여 준 가락이다

―권덕하, 「생강 발가락」 전문(시집 <생강 발가락>, 애지, 2011)

 

권덕하는 발가락에서 생강을 본다. 나는 무릎을 친다. 대단한 발견이다. 발가락에서 생강을 보다니! 삶의 맨밑바닥에서 간난고초艱難苦楚를 겪어낸 사람은 발가락이 생강처럼 되어버릴 것도 같다. 그렇게 되면 그 발가락, 생강처럼 맵고 아리겠다. 그런 점에서 이 대비는 묘하게 어울린다. 부조화 같지만 조화롭다. 잘 살펴보면 생강이란 건 뿌리이기도 하고 묵혀 두고 쓴다는 점에서 “무른 진흙 딛고 참은 울음”이기도 하다. 발가락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뿌리이면서 동시에 삶의 애환을 참고 견디어가는 중심축 아닌가.

거기다가, 이 생강 발가락의 주인공을 떠올려보자. “식구들 잠 보듬고 가만히 나가/어둑발 훔치며 좌판 펼치는/아내”이다. 내 아내이자 내 아이의 엄마인 것이다. 아리고 아픈 동감의 울림 더욱 물결지지 않겠는가.

나는 가슴 싸해진다. 식구들 잠 깰세라 새벽같이 움직이되 가만가만 발걸음 디뎌 나가는 아내의 저 마음씀이 아프다. 그는 그렇게 나가는 아내의 걸음새에서, “땅을 미는 힘으로 솟은 햇귀가/속 깊이 쟁여 준 가락”을 읽는다. 사랑과 의지로 내딛는 발의 리듬이 울려내는 가락이다. 아리지만 달큰하지 않겠는가. 발과 생강과 가락이 어우러져 바닥을 밀쳐내며 키워가는 사랑의 힘. 그 힘, 세상 그 어떤 밀어보다 달콤하리라, 나는 짐작한다.

아이에게도 생강 발가락의 느낌 전달되었는지 얼굴이 조금 씰룩거린다. 내려다본 눈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옆을 둘러보기도 한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옆을 둘러본다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의 관계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출구도 없고 퇴로도 없는 수직의 끝인 옥상에서 그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설 것도 같아 보인다. 그러면 된다. 그 한 발짝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남을 밀치고 위로 솟구치는 세계가 아닌, 남과 함께 옆으로 퍼져가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 그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김선우의 「옆―고구마밭에서」에 가면 보인다.

 

척박한 땅이어서 더욱 단단해진

비구상非具象의 슬픔,

할 말이 너무 많아 입을 꾹 닫은 심장 같다

꾸덕꾸덕한 심장 속에 자기도 모르는

여리고 따뜻한 누군가의 목숨줄이 생겨나

너는 좀 넓은 데서 숨쉬라고 가만히 뱉어놓은,

주먹만한 자줏빛 심장들이

그렇게 밭 하나를 이룬 것 같다

땅 밑 어둠속

옆에서 옆으로 번져간 뿌리줄기

자기 옆의 슬픔에 가만히 기댄 듯한,

꽃을 본 적 없는데 꽃의 향내를 품게 된

내 캄캄한 당신의 옆

―김선우, 「옆-고구마밭에서」 전문(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 2012년)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옆을 둘러보라, 아이여. 네 “주먹만한 자줏빛 심장들이/그렇게 밭 하나를 이룬 것”처럼 너를 둘러싸고 있잖은가.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네 “옆의 슬픔에 가만히 기댄 듯한” 저 이들이 다 너희들이다. “옆에서 옆으로 번져간 뿌리줄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라. “꽃을 본 적 없는”데도 “꽃의 향내를 품게 된” 너희들이 거기에는 있다. 무른 땅에서 자란 것들은 무른 만큼 약하게 마련이다. 너는 “척박한 땅이어서 더욱 단단해진” 곳에서 네 자신을 키운 것이다. 비관하지 말아라. 네 “캄캄한” 옆에서는 “캄캄한” 누군가가 너에게 손 내밀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본다. “여리고 따뜻한 누군가의 목숨줄이 생겨나/너는 좀 넓은 데서 숨 쉬라고 가만히 뱉어놓은” 숱한 시의 숨결들을. 그 숨결을 타고 아이 하나 지상으로 천천히 하강하고 있음을.

이제 저 아이는 날마다 시 한 편 찾아 먹지 않을까. 시가 곧 세상을 살아가는 약이자 영양제일 것이므로.

 

정우영∙1960년 전북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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