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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책크리틱/김정남/슬픈 꿈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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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145회 작성일 13-03-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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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리틱(서평)

김정남|슬픈 꿈을 찍다

 

 

미적 자율성에 대한 해묵은 이야기를 꺼낸다. 칸트에게 미적 판단이란 “이해득실에서 벗어난” “사회성을 거부”하는 최적의 장소였다.(Pierre Bourdieu, La Distinction. Critique sociale du jugement) 이것이 미적거리로, 혹은 무관심성으로, 무목성으로 불리면서, 미학의 자리에 예술을 배치하는 분리의 원칙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는 이러한 시적 정의를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이름으로, “낭만적 축하 안에 연루된 (반)철학에 자신의 진리를 종속”(Jaques Rancière, 주형일 옮김, <미학 안의 불편함>, 27면)시킨다고 보고, 이를 배격한다. 결국 랑시에르가 지적하는 것처럼 미학은 단순히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예술의 사물들을 규정하는 것을 허용하는 모순적인 감각중추에 대한 생각이다.”(위의 책, 39면) 따라서 예술이 재분배하는 감각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미학은 옹호될 수 있다.

고형렬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는 미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현실 사이의 삼투와 길항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추구하는 미학적 저항은 단순하게 재앙의 시대를 증언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감각적 실존 안에 보존하고, “재앙의 기억을 유지하는 보초병”(위의 책, 80면)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메타-정치적이며, 시인은 그러한 과정 속에 역동적인 언어의 질서를 부여함으로, 재영토화라는 역설적 구속을 피해 “이견적dissensuelle 형태”를 만들어 나간다.

 

먹고사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는 시인의 시는 어떤 것인가

이런 제목의 시도 있을 수 있는가,

사회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유형流刑과 연결된 시인들이

아닌 시인들이 있는가, 기이한 이름의 저 素月, 李箱으로부터

그렇다면 지금까지 언어만을 매만지는

이 땅의 시인은 모두 사회적이며 심미적인 존재인가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는 것인가, 이것이 현대시의 영예인가

그 숨은 영욕이 진정한 한 인간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시인의 사업―양평에서」 전문

 

그리하여 이와 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 모든 시인은 유형banishment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심지어 일요화가와 같은 사이비 예술가들조차도? 이에 대해 화자는 말한다. “언어만을 매만지는 이 땅의 시인들은 모두 사회적이며 심미적 존재인가”라고. 언어만을 이리저리 꿰맞추며 유희를 즐기는 것이 곧 절대적 미의 지평이고, 예술의 고유성이며, “현대시의 영예”인 것처럼 착각하는, 예술의 식별체계에 대해 시인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사업이란 무엇인가. “먹고사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는 시인의 시는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 담긴 묵시적 부정은, 바로 예술을 숭고의 온상 속에 보존하고, 그 어떤 비참함이나 치명적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방기하는 사이비 예술에 대한 거부가 담겨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 후, 불쾌해서 이곳을 지나갈 수가 없다

나는 어디서부터 막히기 시작한 것일까

언제부터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게 됐을까

이 도시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킨 것일까

손이 머리보다 먼저 허공을 받쳐 올렸다

그 손은 빈 도자기의 고배苦杯로 떠 있다

표어가 구두 옆에서 야비다리를 친다

나는 도시를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가장 짐승적인 것을 영구히 감춰버린 까닭

전 역에서 다음 역까지 내리지 못한다

후각은 환승하고 못 잊을 불쾌감을 경험한다

오늘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다시 올라가는 아침 계단에서 웃을 수 없다

오장을 토할 듯 입을 막고 뛰어나간다

인간의 탈을 즉시 바꿔 쓴 직립의 새들이

건너편 승강장으로 날아가기 시작한다

* 지평역에서 청량리역까지 열차로 와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종각역에서 내려 다시 3호선으로 환승하려고 지하 계단을 올라가다가 꿈처럼 ‘계단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문장을 읽었다. 최근에 내가 찾던 문장이었다. 2011년 7월 14일 목요일.

―「나는 계단에서 웃을 수 있다?*-경복궁 2층 시강詩講을 가며」 전문

 

이 시에 나타난 화자의 ‘불편함’이 곧 고형렬 시집에 담긴 시의 동력학적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계속되는 환승의 과정에서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계단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교시적 표어는 그 자체로 기만적이다. 현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수 있다” 식의 언술은 이데올로기와 같은 허구적 관념체계의 일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웃을 수 없으며, 이 불쾌감에 대한 신체적 반응은 “오장을 토할 듯 입을 막고 뛰어나”갈 정도에 이른다. 이 도시는 사람들을 이렇게 교육시킨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을 수 있다고. 그리하여 마땅히 분노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한다. 이는 부정하고 비판해야할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개인의 힘과 인내로 견딜 수 있고, 심지어 즐길 수 있다고 끊임없이 설득하는, 지배담론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안한 일은 아니다

이 차선에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도.

그들은 애인*들이 아니다, 기술경쟁사회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실용이고 정의이고 조직이어야 하는 도시에선.

현대 시인들의 꿈은,

언제나 헛된 꽃의 날갯짓으로 떨어지는 것

입문을 허락지 않는다, 그 어떤 선도 그리움도.

하얀 책 속 홀수 페이지에서 언어들만

자신의 길을 혼자 걸어간다.

* 사람을 사랑한다는 ‘애인愛人’이란 말은 묵자墨子가 처음 사용하였다.

―「한 고층빌딩의 영지靈地」 전문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본의 상징으로서의 고층빌딩! 이곳을 신령스러움이 깃든 땅을 뜻하는 영지靈地로 표현한, 지독한 패러독스를 어찌할 것인가. 이 발화의 뒤에서 아프게 이 시대를 견디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기술만능사회에서 모든 것이 “실용이고 정의이고 조직”이 되어가고, 그런 도시의 현실에서 시인의 꿈은 “언제나 헛된 꽃의 날갯짓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자본의 대지에 서 있는 기술공화국에서는 그 어떤 선도 그리움도 없다. 善도 없고, 더욱이 禪도 없는 곳에서 ‘사람을 사랑한다’는 애인愛人도 있을 수 없고, 선적인 사유의 무아적 공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 기술이 인간을 진보시킨다고 믿는 이상, 인간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물질적 분자’(박이문, 「과학 기술과 인간」, <과학, 축복인가, 재앙인가>, 이화여대 출판부, 2009, 96면)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표백된 책 속의 사유는 혼자 걸어 나가고, 불온한 담론은 자본의 영지에서 퇴출당하고, 시대는 해독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시대의 혜안을 지닌 진정한 시인은 언제나 “쓸쓸하고 멀리 있”으며, “눈 뜬 봉사들만 떠드는 잡지의 나라”에서, 장님 천재는 언제나 “슬픈 꿈을 찍는다”(「장님 천재」) 이것이 자본과 기술만능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이 그려낸 우리 시대의 초상일진데, 진정 우리 시대는 어디로 가는가.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김정남∙1970년생. 2002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평론이, 200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소설부문) 수혜. 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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