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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책크리틱/오은/어떤 아름다움, 어떤 시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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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218회 작성일 13-03-2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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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어떤 아름다움, 어떤 시름다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쓸모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를테면, 백합과 공작새처럼.”

―John Ruskin(1819~1900)

 

소년은 왜 나빠졌는가. 왜 나빠질 수밖에 없었는가. 왜 잠자코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가. 허연의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위의 질문들에 대한 성실한 답변이었다. 그 답변은 변명이라기보다는 고백이나 반성에 가까웠다. 그래서 구질구질하지 않고 처연했다. 허연은 자기 자신을 열심히 포장하는 대신, 불온不溫한 세계에서 불온不穩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잔뜩 일그러진 이 세계에서, 삐딱함은 그를 살아 있게 해주었다. 그는 종래에 거의 언제나 혼자 남았고, 단독으로 고독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평생을 소년처럼 살고 싶었다. 나이를 먹은 소년은, 그러나 슬프게도,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소년이 아닌 상태가 되자, 소년은 더욱더 소년―되기를 꿈꾸게 된다. 영영 소년으로 머무르기를 바란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더 큰 탐욕이 생기듯, 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동경은 더욱더 커진다. 꿈은 있지만 겁은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모든 것을 아는 듯 행동했던 시절은, 갔다. 저만치 가버렸다. 반쯤 늙은 소년에게, 혹은 반쯤 젊은 중년에게, 기다렸다는 듯 허탈함이 찾아든다. 어느새 그는 “인생을 생각하는 내내 힘이 빠”(「마지막 무개화차」)지는 나이에 접어든 것이다. 순리를 거스를 수 없어서, 소년은 나빠진다. 더 나빠지기로 작정한다.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한다는 점에서, <내가 원하는 천사>에서도 이전 시집들의 도정이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는 양상에는 차이가 있다.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에서 세계는 머리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타협은 옳지 않은 선택이었고 그래서 끝끝내 불가능했다. 그는 세상의 한구석에서 간단없이 들끓고 불타올랐다. 이 공간에 시간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시인은 나이가 들게 되었다. 취직을 하고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속屬하게, 복속服屬하게 된 것이다. 한구석에서 한복판으로 나아갔지만, 그것은 결코 기쁜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쓰게 되는 일이 많았고, 가슴 답답한 일도 면면히 벌어졌다. 여기서 비롯된 인지 부조화로 인해,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는 시종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천사>에서도 시인의 고투는 계속된다. 이 고투는 보통 고투苦鬪의 형식을 띠지만, 시인이 고수해왔던 원칙과 충돌할 때는 고투故鬪로 돌변하기도 한다. 마치 전자의 고투를 견디기 위해서는 후자의 고투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듯이. 그러나 사회인에게 이 고투는 처음부터 지는 싸움, 불가능한 싸움이다. 그는 번번이 고개를 숙인 채 집에 돌아와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본다. 소극적이지만, 그래서 이 도피는 더 눈물겹다. 사회와 최대한 동떨어진 채널을 찾아 헤맨 결과이리라. 허연은 “뒷다리 사이에 꼬리를 감춘 채 죽은 자가 살아야 했던 긴 시간을”(「다큐멘터리를 보다 2」) 자신의 것인 양, 함께 더듬는다. 위무는 번번이 처량하기 이를 데 없다. 초원과 바다와 하늘은 자연스레 거울이 된다. 그는 물끄러미 거울을 바라보며 오늘, 자신이 저지르거나 당했던 일들을 찬찬히 되짚어본다. 아, 낯부끄럽다.

이번 시집에 동물들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다 이 때문이다. 허연에게 동물들은 사람보다 못하거나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투명하고, 질서疾徐와 질서秩序를 지키며 살아가는 순수한 존재다. 어떤 동물도 욕심이 탐욕에까지 미치는 동물은 없다. 인간만이 선을 넘는다. 인간만이 도를 지나친다. 인간만이 끝까지 간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그들의 욕망은 외려 순수한 데가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동물들은 흔히 일차적 욕구라 불리는 기본 욕구에 충실하다. 그것은 생리적 욕구로, 의식주의 문제, 즉 생존의 문제에 맞닿아 있다. 물론 안전의 욕구와 사회적 욕구도 추구하지만, 야생에 가까울수록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경우가 많다. 생존하기 위해, 그들은 필사적으로 삶에 가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우산을 쓴 채 득의양양하게 거리를 거닐 때, “오늘도 뭔가 포기하지 않은 새들만 비를 맞는다.”(「삽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동물들은 주어진 일을 묵묵히 다한다.

반면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의 욕구는 무한에 가깝다. 우리는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다음 끼니에는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다음 발령 때에는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한다. 당장 다음 달부터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인간의 욕망에 충분함이란 없다. 그것은 언제나 모자란다. 걸신들린 자본주의는 그런 인간을 떠받드는 척하며 교묘히 조종한다. “세상엔 새로운 날이 올 것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일을 열심히 하니, 과연 새로운 날이 찾아왔다. 또 다른 “지긋지긋한 어떤 날이.”(이상 「천국은 없다」) 일이 끝나면 우리는 “빠르게 제 몸을 익혀 하루를 팔고 돌아가는 사과 알갱이”(「낯선 막차」)가 된다. 이 과정에서 도태되는 이들도 존재한다. “계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잘 닦인 구두에 짓밟”(「계급의 목적」)히게 마련이므로, 어떤 사과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난다.

매슬로의 분석에 따르면 하위단계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을 경우, 인간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동시에 이미 충족된 욕구는 인간의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기 부여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잣대가 아직도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가진 자들은 어떻게든 더 갖고자 하게 마련이다. 이미 명성을 얻은 자들은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쓴다. 이처럼 인간의 욕심은 가없다. 그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좀체 제어되지 않는다. 길게 보면 고작 “손톱깎이 같은 걸로/육중한 회벽에 구멍을 내는 일”(「신전 3」)에 불과할 텐데도, 당장의 쾌락에 눈멀어 새 손톱깎이를 손에 넣으려 아득바득 애쓰는 게, 다름 아닌 인간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아름다움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깡그리 다 잃어버렸을 때, 그제야 인간은 한숨을 내쉬게 된다. 지난 인생을 반추하며 이렇게 읊조릴지도 모른다. “무념무상으로 살지 못했던 날들을 나는 후회한다.”(「무념무상 2」)

허연은 신념보다 더 견고한 체계가 인간을 이 상황까지 밀어붙였다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의 말을 조금 바꿔 표현하면, 체계보다 체계의 성격이 그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그 망연자실”(「내가 원하는 천사」)의 심정으로, 그는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죽음의 배경, 그것으로 족한 마을에 오늘도 바람이 분다.”(「바람의 배경」) 바람이 부니, 어쩔 수 없다. 흔들려야 한다. 맞서야 한다. 하다못해 주저앉기라고 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칠비칠 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언제나 품고 있어야 한다. “뼈아프게 서 있는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나무”(이상 「자라지 않는 나무」)가 되고 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을 줘야 한다. 시의 결구에 으레 ‘나’가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현상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쁜 소년이 세계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풍문은 마침내 사실이 되고 상처 부위에선 비릿한 냄새가 났다.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프고, 그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사방팔방에서 온갖 종류의 욕구들이 들끓고 있는데, 허연은 귀퉁이에 서서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미 아무것도 아니어서 쪼갤 수 없는 것들”(「지독한 슬픔」)을, 자기 자신을, 지하철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군중들을. 시인은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인간에 대해 생각하며 시름에 잠긴다. “선사시대로부터 내려온 아름다움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잔혹함에 대해서”(「어떤 아름다움」) 곰곰 곱씹어본다. 요컨대, 시름다움은 사람다움이 아닌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초원에서는, 바다에서는, 그리고 하늘에서는 쓸데없는 걱정이 없었다. 쓸데없는 욕구가 없었다. 거기는, 더불어 거기에 사는 피조물들은, 마냥 속절없이 아름다웠다.

첫 시의 첫 문장과 마지막 시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는다. “남자는 사랑이 식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마지막 무개화차」) “그대의 날들은 너무 길고 길어서.”(「別於曲」) 남자는,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갈급이 나 있다. 참지 못한다. 참지 못해서 결국 일을 그르친다. 한참을 후회하고 다시 욕망하기 시작한다. 시름하며 시나브로 아름다움을 잃는다. 그렇게 세계의 복판에서 점차 지워진다. 모르긴 몰라도, 다음 생에 그는 새鳥로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부단히 날갯짓할 것이다. 초원으로, 바다로, 하늘로. 쉬지 않고 “세상이 몹시 좋았다고 짹짹대”(「새들이 북회귀선을 날아간다」)며, 그렇게 쓸모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오은∙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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