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7호(가을호)책크리틱/권경아/목소리 가운데를 비우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426회 작성일 13-03-20 14:41

본문

권경아|목소리 가운데를 비우다

 

 

정남석의 첫시집 <검정고무신>에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흔적들이 묻어나고 있다. 차가운 현실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안타까움이 녹아나기도 하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어린 시절의 동심을 기억하려는 시인의 순수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정남석의 시에서 현실은 비록 차갑고 쓸쓸하고 슬프게 그려지고 있으나 절망이나 환멸의 차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의 시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따뜻함이나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삶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 것들까지도.

정남석의 시에서 현실은 차갑다. 신도시가 들어서며 쫓겨나야만 하는 무허가 변두리 집(「21세기 거미」)을 그리기도 하고, FTA에 피해를 입는 농민(「아버지 제삿날」)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시인이 꿈꾸는 것은 고향의 따스함이다. 바다의 소음이 가득한 바지락을 파는 할머니의 온정(「바지락 할머니」)이나 소래포구의 평범한 일상의 모습(「소래포구」)를 담아내는 시인의 시선에는 현실의 쓸쓸함을 고향의 따스함을 통해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인이 현실을 담아내는 시선이다. 「아버지 제삿날」에서는 민감할 수도 있는 FTA와 같은 현실의 문제를 무겁지 않게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는 제사상에 올라온 수입포도를 보고 불편함을 드러내는 형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상의 한 장면을 통해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변환시키는 방식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인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심각성을 뒤로하고 “양놈 포도랑 눈싸움 중”인 형수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 웃음을 통해 농민의 현실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시인이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인 것이다.

 

빙 둘러

희끗희끗한 머리 셋이 앉는다.

속이 쓰리다 꺾던 술잔을 다시 부딪치면서,

야. 뭐 하냐. 원 샷.

비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그가 목소리의 중심을 꺾는다

야아, 됐-어.

이십 년 전,

비틀거리는 골목을 막아서며

나 어떠냐 물은 적 있다.

그가 목소리 끝을 세웠다.

됐어.

아이 둘 손 잡고

백화점 몇 바퀴를 헛돈다.

그가 목소리 끝을 내린다.

됐어어.

나이 쉰의 비누냄새 풍기면서

이불 한 자락 끌어다 덮어주었다.

그가 목소리 가운데를 비운다.

됐~어어.

―「됐어」 전문

 

정남석의 시들은 삶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세 친구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원 샷”을 외치던 친구 앞에서 비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친구는 “목소리의 중심을 꺾는다”. “야야. 됐어-어.”라는 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십 년 전, “됐어”라는 똑같은 말을 했던 친구. 그때는 “목소리 끝을 세웠”던 그가 아이 둘 손을 잡고 백화점을 몇 바퀴 헛돌며 내뱉는 “목소리 끝을 내린” “됐어”. 같은 말이지만 그 억양과 톤으로 친구의 변화를 감지하는 시인의 시선이 섬세하고 또 예리하다. 중심을 꺾은, 끝을 내린, 가운데를 비운 “됐~어어”. 살아가며 변해야만 하는 변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친구. 그가 시인이자 또한 우리 모두의 모습임은 물론이다.

 

초등학교 동창회 가는 길

외곽순환도로가 들뜬다.

도로는 이미 급물살이다.

오픈카 한 대가 휘익 끼어든다.

폭우로 불어난 흙탕물에

요리조리 떠내려가는 내 검정고무신.

저 고무신

어느 돌부리에 제발 걸려다오.

―「검정고무신」 부분

 

시인이 스산한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고향의 따스함과 함께 어렸을 때 그 시절, 그 동심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도처에 고향의 이야기, 어린 시절의 풍경이 그려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고 있다. 폭우가 내리는 도로는 이미 급물살이다. 마음은 급한데 어디선가 나타난 오픈카 한 대가 휘익 끼어들기까지 한다. 급박한 도로 위에 시인은 있는 것이다. 이때 폭우로 불어난 흙탕물에 “요리조리 떠내려가는 내 검정고무신”을 발견한다. 폭우가 쏟아지는 도로가 현실이라면 폭우에 떠내려가는 “검정고무신”은 어린 시절의 추억, 그때의 기억들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급물살에 시인의 어린 시절이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검정고무신을 그냥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돌부리에 제발 걸려다오”라는 마음 속 외침은 그때의 추억이나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같다. 검정고무신이 떠내려가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차갑고 스산한 현실 속에서도 따스한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며 이것은 바로 순수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통해 어둡고 스산한 현실을 이겨내려는 의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정남석의 <검정고무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인간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 삶의 모습들을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시인이 어린 시절의 “검정고무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시인을 그것을 “새콤 달콤 익은 나의 추억”(「살구」)이라 부른다. 벌레 먹은 것도 약이라는 말에 떨어진 살구 하나 남아나지 않게 모조리 먹어치우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생각만으로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는 살구.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모두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그때의 기억이 소중하듯 지금의 시간들 또한 소중한 것임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오늘이 바로 내일 그리워하게 될 추억임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권경아∙2003년 ≪시와세계≫로 등단. 본지 편집위원.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