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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신작시/고창수/추사 김정희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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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수
추사 김정희 외 1편
동숭동 어느 극장에서 k시인의 낭독을 듣고 온 다음날 아침부터 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영락없이 그 언젠가 도봉산을 오르면서 k시인이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찬양하다가 낸 그 신음소리였다. 추사 김정희의 서체를 설명하다가 막힌 그의 목청에 걸린 낱말의 신음이었다. 그 낱말은 추사를 회상하다가 막힌 나의 꿈 어디엔가 걸려 있다가 드디어 나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나서 추사의 형상은 통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 기억의 강물 어딘가에 떨어진 달빛처럼. 그리하여 k시인과 나는 부득불 추사체로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말문은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정성스레 가꾸어온 그 고요만큼 응어리지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함자를 김자 정자 희자 외워보아도 떠오르지 않는 추사의 모습이여. 그 함자는 처음에는 박쥐만큼 하다가 k시인과 내가 추사 글씨의 어떤 동행이 된 다음부터 박쥐는 점점 커지면서 추사글씨에 한이 맺힌 k시인은 추사가 조선의 먹을 풀었던 그 강물에 자기의 한을 더러는 풀고 있었다. 이제 추사체는 k시인이 사는 수유리와 내가 사는 분당 사이를 내가 키워온 그 고요로 시원히 틔워주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수 백 년의 시간에 말문으로 막혀서 k시인과 나 사이를 가깝게 하는 추사여. 당신이 조선 여인의 칠흑머리 같이 시간의 강물에 풀어놓은 조선의 먹이여. 시간의 강물에 풀어놓은 신들린 글씨여. 사약을 받는 눈치도 보이는 신들린 글씨여. 박쥐 같이 내게 속삭이는 추사체여. 지워지지 않는 기억처럼 끈덕진 추사체를 찾아 길을 떠난 날은 k시인과 나의 말문은 얼마간 풀려 그 틈으로 내가 키워온 고요가 흐느끼고 있었다. k시인의 목청은 다소곳이 트여, 고요의 흐느낌을 음미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도 나름으로 어떤 고요를 키우는 기색이었다. 고요의 숲 어딘가에 추사는 삿갓을 길섶에 내려놓고 쉬고 있겠지 하는 기색이었다. 추사글씨에 한이 맺힌 k시인은 추사가 조선의 먹을 풀었던 그 강물에 자기의 한을 더러는 풀고 있었다. 어느새 나도 그런 것 같았다.
소년
한 소년이
빈 들판에 서서
내게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하여
길게 길게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는 내게는 들리지 않는
누군가의 대답에
움찔 움찔 놀라곤 합니다.
마치 가청주파수 밖의 어떤 소리가
끝없는 심연을 울리는 듯합니다.
나는 끝내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없습니다
고창수∙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파편 줍는 노래>, <몇 가지 풍경>, <원효를 찾아>, <씨네포엠>, <소리와 고요 사이> 외. 시문학상, 정문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바움문학상 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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