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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신작시/김지윤/상처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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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502회 작성일 13-03-2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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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상처 외 1편

 

 

이사 갈 집에 페인트를 칠한다

몇 명의 주인들이 거쳐 간 벽들엔

몇 번의 사연이 지나간 자취가 얼룩져 있지만

서툰 붓질 몇 번으로도 손쉽게 지워져버리는 흔적들

하지만 깔끔한 페인트칠로도 덮을 수 없는 게 있으니

못자국만큼은 도무지 없앨 방도가 없다

깊이 박혔던 못일수록 더 많이 패인다

모조리 뽑아내도 못자국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누추한 제 얼굴을 죄다 드러내고

깨끗해진 벽에서 어쩐지 못자국만 더 자꾸 보인다

남의 상처는 왜 이리 낯선 것인가

떠나온 집에 남겨둔 내 못자국들은 이제 누가 바라보고 있을까

지나온 내 정든 벽들을 애잔하게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휴가

 

 

떠나라 무거운 밥숟가락일랑 고이 내려놓고

삶의 얼룩들일랑 빨랫감처럼 빨랫줄에 널린 대로

뜨거운 여름 햇살에 혼자 잘 마르게 놔두고

깨끗한 새 옷 입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데로 가자

가을걷이 끝내고 토끼사냥 가던 농한기 농부들처럼 짐 꾸려서

푸른 하늘 푸른 산이 일상까지 삼키는

끝없이 펼쳐진 도로로 달리는 차에 올라

차창 밖 속력에 온갖 무게들을 다 버리고

가벼워진 시간이 음악이 될 때까지 바람소리를 높이자

가계부 숫자도 고지서 날짜도 쓰다만 글도 모두 잊고

나뭇잎 수만 헤아리다 저녁노을이 그려내는

강물 위의 눈부신 무늬만 읽자

사람에게 영원永遠이 없다면 짧은 휴식이란

사막의 여행자에게 한 모금의 단물 같은 것

걱정도 생각도 모두 줄이자

오직 한없이 늘려야 할 단 한 가지는

서로 사랑하는 시간.

 

김지윤∙200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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