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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가을호)신작시/임효빈/뜨다 만 모자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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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효빈
뜨다 만 모자 외 1편
1.
마침내 모자와 하나인 사내
25시간 받들고 있는
모자가 밥을 먹는다
급체한 날이면
올올 흔들어 바람을 쐬인다
모자가 잠을 자면
악몽 한 뼘 들어오지 못하도록
밤새 불침번을 선다
소화불량, 변비라도 걸릴까
상비약은 허리춤에 대롱인다
절름발이 걸음으로 외팔로
모자의 길을 지키고 있다
늘 완성되지 못한 채
코가 빠진 사내
한 코 한 코 짜올리고 있다
2.
상훈사 공양간, 모자 없는 반야*
절반의 반야심경이다
툭툭 쏟아내는 파열음의 독송
오체투지의 자세로 남아
불온한 모자에 끼어든다
누덕누덕한 고해의 손바닥
아궁이에 펼쳐 말린다
혀를 내두르는 뻔한 깨달음
문득문득 거품으로 도용된다
팽하니 코를 풀자
나가떨어지는 말씀의 한 귀퉁이
팽팽한 올이 풀렸다
* 지리산 상훈사에 있는 불목하니로 지체장애가 있다.
달팽이의 비행
낮은 깔개에 앉아 딸기 따는 여인들
달팽이라 불렸다
붉은 단내 풍기는 비닐하우스에서
차지게 뭉쳐져
마침내 무중력에 든다
살을 파내어 만드는 우주인의 식량
힐끗힐끗 촉수의 몸짓에 따라
영상은 자동으로 송출된다
사나운 눈을 가리는 점액질의 허방에서
속 없는 담보를 깔고 앉아
무기한의 비행을 시작한다
한 알 한 알 검은 씨앗들
눈알 부라리며 독기를 내뿜는다
언제나 불확실한 배설의 시간
누구라도 문을 열어젖히면
둥둥 떠다니는 바람에
아득한 현기증이 인다
행로 이탈 꼬리표 악착같아
우주선의 좌표까지 하얗게 질린다
스스로 무뎌진 달팽이관
누구에게도 교신이 허락되지 않아
‘부재중’만 뜨며 난항을 겪는다
수리불가의 빈 집을 진 채
언제 착륙할지 몰라
기웃대는 기척만 어수선하다
임효빈∙2007년 ≪리토피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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