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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제10회 김구용 시문학상/윤의섭/감염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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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40회 작성일 22-12-2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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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제10회 김구용 시문학상/윤의섭/감염 외 4편 


감염 외 4편


윤의섭



이건 몸에 쓰이는 후기 혹은 가장 오래 이어진 필사여서

아프기 전에 이미 아픔의 절정을 알고 마는 참어讖語

같은 증세로 저녁의 구름은 노을을 옮겨 적는다

꽃내음은 바람을 적시고 바람은 멀리 한 계절을 끌고 간다

그러니까 나는 네게 복제된 증상이다

비접촉으로도 너의 고통과 결합하는 방식

물들기 쉬운 내력을 앓고 있었으므로 너는 다시 내가 불러낸 처음

어느 살점 속에 말없이 뿌리내리다 떠나가는 유목은 흔적을 남기지 않지

치명적이더라도 내게만 머물기 바라는 난치의 기억

내게서 자라나다 내 안에서 죽어야 하는 너라는 병

전이의 경로를 따라가 보면 달처럼 맴돌았다는 진단이 나올 것이다

한때 월식이 있었고 해독하기 힘든 천문이 새겨졌을 것이다

온몸으로 퍼지는 불온한 증여를 들여다본다

여기에 어떤 병명을 갖다 붙여도 가령

빗방울에 스민 구름 냄새라든가

단풍나무가 머금은 햇볕의 온기라든가

어쩌면 네게서 너무 멀어져 알아내기 힘들지라도

나는 지금 징후와 후유증 사이의 중간계를 통과하는 중이다

나는 아프기도 전에 감동했다는 것이며

물들었으므로 닮아가야만 하는 의례를 따라

그리하여 면역이라는 영역에 들어설 때까지





카드



이 몇 장의 그림 속에 일생의 전모가 들어 있다

그림을 고른 건 나라고 책임을 전가해도

다가오지 않은 날들의 풍경이 고대부터 그려졌다는 거


조금 무서워요


아까부터 들려오는 음악은 사계였다

가을쯤에서 무너질 수 있다고 낙엽 같은 카드를 읽는다


떠나보낼 수 있다는 예언

생기지도 않은 일을 부정하는 건 생겼던 일을 부정하는 것이고


창밖엔 장대비였다 빗줄기로 지워진 길에 물길이 생기고 다시 지워지고 다시 그려지는 미래라면 내가 지워버린 무수한 길은 숙명이며 숙명이 아닌 일방 통로


그날

새소리가 들리면 좋겠다 싶었는데 새소리가 들려왔다

산길이었고 너는 언제부터 걷고 있었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같이 산을 오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만 울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새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언젠가 당신은 이 운세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절망과 포기와 무책임과 궤멸의 때입니다 충분히 지쳤고 영혼마저 죽어 갑니다 그래도 새벽엔 산책 삼아 걷고 싶었나 봅니다 물안개는 승천하지 못한 미련입니다 아직 지지 않은 달은 패착이었습니다 산책은 당신의 의지가 아니라 수순이었을 뿐입니다 저녁엔 창밖을 바라봅니다 눈송이들의 음계에는 후렴이 없습니다 녹아 사라져갈 뿐 찬란한 후생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쓰러질 힘조차 없이 어둠에 묻히고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질식의 아가미를 열어 놓은 채 명운이 다합니다


물고기자리

나는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예언인 듯 산 것이다


꿈을 팔지 말아야 했다 손금을 믿지 말아야 했다 늦게라도 잠들었어야 했다 결코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편지를 쓰지 말아야 했다 일 분이라도 늦게 나가야 했다 우산을 들고 나가야 했다 기차를 타지 말아야 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했다 피할 수 없다고 믿지 말았어야 했다


제비꽃을 좋아하고 몽상을 즐긴다

소음인 체질이고 메말랐다

관운의 사주였다 나는

계획대로였을까


언젠가 당신은 다시 이 운세를 보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면 믿지 않을 것이라고 쓰입니다 말도 안 된다고 하면 부인할 것이라고 적힙니다 당신의 금전운 애정운 직장운 학운 성적운 모두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 갈 겁니다 창밖에 눈이 내립니다 당신은 훗날 저 수많은 눈송이 중 한 송이입니다 찬란한 비상은 없고 질척이는 지상에서 파닥거리다 불운이 다합니다





착각의 연금술



새벽에 처음 들어본 새소리는 새소리였는지

어둔 밤 가지가 흔들리는 수양버들인 줄 알았는데 수양버들이었는지

얼핏 스쳐 간 얼굴이 그 얼굴이었는지


분명 언젠가 본 장면이고 잠시 뒤 무슨 말을 할지 아는 선견도

이 세상에 대한 건 아니다


원본이 어떤지 알려면 일생을 살아봐야 한다


물과 불과 흙과 공기로써 나인지

물과 불과 흙과 공기로 나인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게 사람이어서 슬프면 슬프고 싶어서였고 그리우면 그리움이 앞서서였고 그런 감정

없었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

대문 앞에서 집배원이 죽은 자를 부르듯 이름을 부르다 조용해진다 부재중 메모를 남겼으므로 나는 어딘가에 재중일 것이다 살아 있다고 느끼다 증명할 수 없다고 느낀다


봄이었고 나는

떨어지는 꽃잎인 줄 알았는데 나비였다





당신이 잠들었을 때



덮여있는 책은 자기 몸을 읽는 중이다

먼지 같은 묵독이었다

서랍 속에서 오래 묵은 만년필은 스스로를 쓰고 있다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데 너무 아프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을 걸으며 길은 자꾸만 눕고 싶고

죽다가 동사인 건 계속 죽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밤 유성을 보았고 장례식장에서 유년에 대한 잡담을 나눴다

언젠가는 아프지 않을 것이고

신의 길을 따라간 순례자가 도착한 곳이 이 별이라고 적혀 있는 경전대로

지구를 찾아 나설 것이고

누군가에게 잊히고 나면 끝없이 살 수 있다는 용서

당신이 잠들었을 때 잠은 잠을 자야 했고

깨어날 때까지 몇 번이고 천문을 정독했고

생존이라는 말 쓸쓸하다

가로등이 꺼지는 시간

당신은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못해서

경전 어느 페이지쯤에선가 헤매는 꿈에 젖어 들고

나는 빨래 건조대를 비워놓는다





심사평



너머의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



계간 《리토피아》(주간 장종권)가 주관하고 인천뉴스, 문화예술소통연구소가 후원하는 제10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자로 윤의섭 시인을 선정했다. 윤의섭 시인은 1994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한 이후 이번 수상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민음사)에 이르기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상재한 중견시인이다. 


윤의섭 시인은 ‘시’가 자신이 파악하고자 하는 세계에 접근하게 해 주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고 믿는 시인이다. 첫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공 너머의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이제 자신만의 확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아프기 전에 이미 아픔의 절정을 알고 마는 참어讖語/같은 증세로 저녁의 구름은 노을 옮겨 적는다/꽃 내음은 바람을 적시고 바람은 멀리 한 계절을 끌고 간다/그러니까 나는 네게 복제된 증상이다/비접촉으로도 너의 고통과 결합하는 방식”(「감염」)처럼 우리는 누구나 삶이 죽음에게, 죽음이 삶에게 서로 감염 시키고 감염되어 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시인의 깊은 통찰이 새롭다. 아니, 사랑의 방식으로 읽고 이해한다 해도 그 “복제된 증상”과 “고통과 결합하는 방식”이 오히려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은 처절한 시적 상상력에 의해, 예컨대 “눈이 내리면 꽃피는 소리가 난다/천만 송이의 전생을 듣는다”(「화음華音」)에서 시각과 청각의 조화, “그날/새소리가 들리면 좋겠다 싶었는데 새소리가 들려왔다”(「카드」)처럼 자신이 뽑아 든 카드의 불길함을 넘어선 긍정성 등이 그렇듯 너머의 세계에 대한 신비를 체험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윤의섭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한 “여전히 헤매고 있으므로 이제 조금 다가선 것일까”라는 말을 이해할 것 같다. 윤의섭 시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강우식, 장종권, 허형만(글)





수상소감



우선 기쁘고 고맙습니다.


기쁘다는 건 김구용 시인에 대한 저의 관심 때문입니다. 『뇌염』, 『풍미』, 『시』 등의 시집을 읽었던 때가 10여 년 전입니다. 하지만 미욱한 저로서는 그 후로 김구용 시인의 시 세계를 더 깊이 파고드는 시간을 더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연구자로서의 길도 걷고 있는 저로서는 언젠가 김구용 시인의 시에 담겨 있는 저 구경을 탐해보리라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김구용 문학상>은 저를 다시 한번 마음 동하게 하는 계시라고 여겨집니다. 그것이 기쁩니다.


 고맙다는 건 《리토피아》와 장종권 선생님에 대한 개인적인 인연 때문입니다. 《리토피아》에는 제 시가 실렸고, 산문이 연재되었습니다. 장종권 선생님은 그러한 졸고를 게재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김구용 문학상>을 통해 제 여섯 번째 시집인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를 새롭게 들여다볼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제 수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에도 많은 시집이 나왔고 그런 시집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소중한 것처럼 제 시집도 소중하게 생각해 주신 것 같습니다.


1994년 《문학과 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시집을 여섯 권 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한 편 한 편 써 나가리라는 막연한 의지가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 의지가 새 의지를 굳게 해주며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앞으로도 시를 쓰고 또 시집을 낼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시의 세계는 아직 미완성입니다.


그렇게 또 다른 시, 새로운 시집으로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제가 늘 얘기하고 있는 바, 시는 혼자 쓰지만 혼자라면 쓸 수 없는 것이기에 저와 인연이 있는 모든 분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김구용 문학상> 심사위원 분들과 장종권 선생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윤의섭 1968년 경기도 시흥 생. 아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4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로 등단.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묵시록』,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2009년 애지문학상. 2017년 계간 《사이펀》 우수작품상 수상. 2018년 계간 《딩아돌하》 우수작품상 수상. 현재 격월간 《현대시학》 편집위원. 계간 《시와 경계》 편집위원. 계간 《문학과 사람》 편집위원. 계간 《시와 편견》 공동주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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