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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제10회 김구용 시문학상/박동억/겸허에 이르는 시간 ―윤의섭 시인의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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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제10회 김구용 시문학상/박동억/겸허에 이르는 시간 ―윤의섭 시인의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겸허에 이르는 시간
―윤의섭 시인의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박 동 억 문학평론가
1. 물리적 시간과 기억의 변증법
시간은 어디 있는가. 시간 자체는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관념이다. 그래서 시간을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대개 시계를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시간을 상상하게끔 한다.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속에서, 당신이 눈을 감고 있어도 물리적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시간인가. 많은 예술가는 선후先後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인간의 관념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와 동떨어진 시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류 이전에, 즉 우주의 탄생과 함께 존재해왔다는 물리적 시간은 인간에 관한 한 가장 근원적인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을 ‘위한’ 시간이란 무엇인가. 단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 존재에 기초한 시간은 없을까. 인류가 아직 시계를 발명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과연 시간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없는 장님은 어떠한 방식으로 시간을 느낄까. 시간에 관한 인공적·자연적 도구를 모두 밀어놓고 나면, 어쩌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억인지도 모른다. 빠르게 지나가는 기쁨과 지루하게 반복되는 고통을 내포한 기억의 속도야말로 인간을 위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윤의섭 시인이 바라보는 시간은 그러한 시간들을 예감이라는 차원 위에서 통합한다. 윤의섭 시인은 시 「스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계를 믿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의 내일이 다가오고 있는 이 시계를”. 시계 대신 그가 믿는 것은 무언가를 예감할 때 느껴지는 스산함이다. 그 스산함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단순히 내면의 감상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로부터, 요컨대 “하루는 우수수 떨어진 국화잎을 보다 떨어져서도 가지런히 생전의 꽃송이를 따라 원을 그린/섬뜩한 미련”처럼 온다. 시계를 볼 때 물리적 시간을 떠올리듯, 낙화를 보며 예감하게 되는 시간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스산함이란 시간이 ‘끝나는’ 바로 그 순간에 깨닫게 되는 존재의 한계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떨어진 꽃잎이 ‘생전의 꽃송이’처럼 가지런히 원을 그릴 때, 꽃잎은 마치 여전히 자신이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는 종종 죽음 이후에도 지속하는 어떤 시간이 있다고 예감하게 된다. 다시 말해, 관에 누운 고인의 정갈한 얼굴과 자세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찾아오는 그 스산한 시간은 무엇일까. 죽음을 경험하고 나면, 물리적 시간으로든 기억을 더듬어 보든 우리는 한 존재의 삶이 완수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삶이 완수되어도, 무엇인가 지속하리라는 예감처럼, 묵시처럼, 죽음 이후의 시간이 온다. 약 서른 해, 여섯 권의 시집에 달하는 윤의섭 시인의 시정詩程은 바로 그러한 물음을 관통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자신을 스산한 시간 위에 위치시키고, 스산함을 통해 세계를 증언한다.
붕괴 중인 가을의 노란 발음 나는 그런 예의 일종이다
지평에 닿는 모든 길이 좁아지는 것처럼 나는 누군가에게는 소실점이며
끝장부터 거꾸로 읽어야 하는 책이며
몰락은 모두 수직전인데 낙엽도 하관도 유성도 사라져
사라져 가고 몰락과 소멸 사이는 스산하다
그나마 감정이므로 인간적인
-시 「스산」 마지막 부분
스산함은 타자의 죽음을 목격하며, 자신의 몰락까지 예감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윤의섭 시인의 시선은 죽음 이후를 향한다. 따라서 그에게 낙엽과 하관과 유성의 추락은, 단지 죽음을 뜻하는 상징이 아니라, 죽음 이후로 향하는 ‘소실점’으로 발견된다. ‘몰락과 소멸 사이’, 시인은 바로 그곳에서 세상을 보려 한다. 어떤 의미로 스산함은 물리적 시간처럼 인간 존재 바깥에서 인간을 서술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비인간적이다. 그러나 “그나마 감정이므로 인간적”이기도 하다. 그는 번번이 스산함 속에서 증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때론 자신을 ‘귀신’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로 느낀다.
그는 다른 시에서 “모든 유예는 이미 끝 이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머리카락」)고 말하기도 하고, “이미 종말 이후였고 끝자락에 사는 중이다”(「워낙」)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미 끝 이후’라는 특별한 시간성은 무엇인가. 윤의섭 시인이 바라보는 시간이란 바로 ‘이미’ 주어진 삶이고, 존재의 ‘끝’이며, 그 끝 ‘이후’에도 계속되는 시간이다. 다시 말해, 그는 존재를 담보하는 시간 전체를 들여다보려 한다. 한 존재의 일생을 넘어서는 시간 이전과 이후까지 모두 상상해보려 한다.
바로 스산한 시간의 ‘예감’을 통해 윤의섭 시인은 ‘기억’이라는 체험적 시간과 무한한 물리적 시간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한다. ‘예감’의 시간은 때론 헤아릴 수 없이 큰 우주적 시간을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물’과 ‘비’와 ‘구름’과 같은 자연물로 상징화되기도 한다. 보다 시적인 인상을 남기는 것은 자연 상징 쪽이다. 시집의 제목처럼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예후」)라고 물을 때, 시인은 시간의 방향을 묻고 있다. 시인의 방식으로 ‘비’를 해석해보려고 노력한다면 어떨까.
수많은 몰락과 마찬가지로 비는 추락 운동이며, 비는 ‘이미’로부터 와서 ‘끝’에 떨어져 ‘이후’로 간다. 즉, 비는 구름으로부터 와서 땅에 떨어지고 물로 흐른다. 그는 내리는 비의 이미지로 한 존재가 생성되고 파열하고 흔적을 남기는 존재 순환의 전체성을 풍경화한다. 더 나아가 시인은 이렇게 묻는다. “구름을 떠난 눈송이가 창가에 내려앉을 때까지 세상은 몇 번을 종말했던 것일까”(「신비」). 한 존재를 이루는 시간의 전체성은, 그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전체성과도 이어져 있다. 이처럼 ‘예감’이라는 단어는 시인이 한 존재가 감당하고 있는 시간과 한 존재를 둘러싼 모든 시간을 들여다보려는 마음을 뜻한다.
윤의섭 시인은 하나의 현상이나 느낌으로부터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려 한다. 이를테면 그는 “어떤 느낌은 신의 영역에 속해 있다”(「느낌」)고 쓴다. 스산함이나 ‘비’의 예감은 시인에게 신의 영역에 속하는 느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윤의섭 시인의 이러한 관점을 전적으로 형이상학에 환원하고 싶지는 않다. 반대로 나는 한 시인이 형이상학이나 신비를 추구할 때에도, 일상적 삶과 무관해 보이는 장소에 닿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도리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게 되는지 말하고 싶다.
윤의섭 시인의 ‘이미 끝 이후’라는 시간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는가. 모든 삶은 하나의 죽음을 완수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을 어느 정도로 감당하는가는 질적으로 다르다. 윤의섭 시인은 낙화와 낙엽, 일몰과 하관 속에서 항상 타자의 죽음을 본다. 아니, 타자의 죽음 이후까지 기억하려 한다. 그러한 의미로 그는 어떠한 사람보다 타자의 죽음을 깊이 감당하는 시인이다.
장마에 떠내려간 집에서 살아남았다거나 저수지 물을 다 빼냈어도 익사한 친구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개인사를 새삼 들춰내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사후에 가깝다 교통사고로 잃었던 기억을 다시 찾은 후에 나는 더욱 귀신에 가깝다 내가 보인다면 내가 너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시 「기연」 부분
우리는 한 편의 시에서 담담한 개인사적 고백의 목소리를 발견한다. 시인은 자신의 일생이 ‘사후’와 ‘귀신’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시인은 한때 익사할 위기를 넘기고, 또 교통사고로 일시적인 기억상실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를 잃었다. 이렇게 그는 특별히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던 경험들이 있다. 그러나 아직 귀신은 아니다. 그는 타자에게 눈 돌리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자신이 삶과 멀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보인다면 내가 너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어떤 죽음이 우리를 삶으로부터 떼어놓을 때, 어떤 만남은 우리를 조금이나마 살게 한다.
죽음 이후의 영원성을 들여다보려 하는 시인은, 때론 “안부와 소식과 정념이 사라지기란 그렇게 간단치 않다.”(「사라진 편지」)라고 쓰기도 한다. 안부, 소식, 정념은 시인이 사유하는 신비한 섭리에 비하면 순간의 사소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일상적 삶과 타자와의 관계를 지속하게끔 해주는 토대다. 여기서도 우리는 시인에게 ‘그나마 감정이므로 인간적인’ 것이 가치 부여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의 배려는 넓다. 우리는 그가 타자의 안부조차 죽음 이후까지 짊어지려 한다는 사실 또한 확인한다. 따라서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위한 고독한 방이 아니다. 그는 배려는 깊다. 그는 ‘이미 끝 이후’라는 숭고한 시간을 응시하면서도 ‘너를 보고 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인간의 사소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2. 유비類比의 상상력
이전의 시집들을 살피면 윤의섭 시인의 사유는 주로 불교와 물리학에 기초한 듯 보인다. 특히 이번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에는 유난히 물리학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 불확정성의 원리(「모호」), 캐시미르 효과(「성간」), 카오스이론(「아, 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적 세계를 다루는 물리학부터, 평행 우주 가설이나 사상의 지평선(「신비」)처럼 우주를 다루는 거시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에 물리학적 지식이 중요하게 인용된다. 이것은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시와 물리학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시는 일상적 체험을 시인의 주관적 체험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물리학은 현실에 관찰자로서의 거리를 두고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중립적 세계를 재현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적 체험과 물리학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윤의섭 시인에게는 유비의 관계로 묶인다. 예컨대 시 「모호」에서 불정확성의 원리와 예지몽의 원리는 ‘닮았다’고 표현된다. 시인은 “능소화가 피어서 여름은 고사 중인” 꿈을 꾸고 ‘아는 사람’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죽음의 발생이라는 사건은 알 수 있지만, 죽음의 장소라는 위치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불확정성의 원리란 양자 수준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관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현실에서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의 차의 위치와 속도를 우리는 내비게이션을 통해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아주 작은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양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관측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논의할 핵심은 이러한 물리학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윤의섭 시인이 본래는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양자의 움직임과 일상적인 꿈에서 ‘유사한’ 원리를 발견하고 있으며, 그것은 시인의 의식 속에서 소립자-인간-우주라는 서로 다른 차원이 하나의 섭리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과학에서는 거시세계의 법칙(고전물리학)과 미시세계의 법칙(양자역학)을 전혀 다른 분야로 간주하지만, 윤의섭 시인에게 아주 작은 존재와 가장 큰 존재는 서로 동질적일 수 있다. 마치 천체의 운동을 바라보며 인간의 운명을 점치던 점성술사처럼, 미셸 푸코에 따르면 서구 사회에서는 16세기까지 존재했으나 그 이후에는 사라져버린 ‘디비나티오Divinatio’(점술, 예언)의 방식으로 그는 말한다.
화초나 나무를 심는 그릇 같은 것인데 같이 자라지를 못해
뿌리의 밀도는 점점 높아진다 새로운 별들은 이렇게 생겨난다
어쩌면 식물계에서는 백삼십칠억 살이라는 우주의 나이만큼 늙었을 골동품
햇살이나 풀벌레 소리를 담았더라도 그러니까 사계를 품었더라도 몸무게는 그대로고
눈과 코와 귀와 입을 한곳으로 벌리고 선 이 애절한 몰두
-시 「분盆」 도입부
뿌리가 자라는 초목의 운동은 별들이 탄생하는 천체의 운동을 닮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위 시의 내용을 조금 비약하자면, 가장 근본적인 의미의 그릇으로서 생명의 뿌리는 대지일 것이다. 대지는 수많은 생명이 자라고 다시 묻히며, 수많은 뿌리를 수확해온 뿌리의 뿌리이다. 따라서 모든 뿌리는 화초에 관한 한 가장 오래된 ‘골동품’이고, 생명에 관한 한 ‘사계’를 아우르는 모든 체험이며, 우주에 관한 한 오직 태양만을 향하는 ‘애절한 몰두’일 것이다. 유비로서 윤의섭 시인은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예감할 수 있는 우주의 섭리에 관해 증언한다. 우주 또한 저 뿌리처럼, 수많은 존재의 탄생과 죽음으로 조금씩 ‘높아지고’ 무언가를 향해 몰두할 것이다.
이 밖에도 주목하게 되는 것은 ‘늙다’ ‘몸무게’ ‘눈과 코와 귀와 입’ ‘애절한 몰두’와 같은 의인화 표현이다. 그것은 사물을 이해할 때 우리 자신에 비추어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가 인간 존재이며, 우리 자신을 척도로 삼아 세계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한계를 비춘다. 그런데 유비의 원리는 과연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을까. 화초와 뿌리가 ‘애절한 몰두’에 속해 있는 동안, 그것을 발견하는 인간 역시 그러한 몰두 안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미 시인은 인간 역시 화초와 별을 아우르는 섭리 안에 인간을 함께 놓아둔 셈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예감을 해석하려는 인간의 간절함에 관해 말하기도 한다.
새벽에 눈이 올 줄 미리 알려면
남태평양으로부터 흘러온 난류처럼 항상 애끓어야 하지(애달아야 하지)
어떤 눈구름이라도 벌써 국경을 넘어섰겠지
간절하였으므로, 간절도 측정치에 넣을 수 있다면, 간절하였으므로
그렇게 눈의 점문을 이미 읽었으므로
-시 「아, 눈」 마지막 부분
세상에 섭리가 있다 한들, 우리는 그 섭리 자체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은 끝없는 탐구를 통해 이 세계를 일부나마 이해했고, 해일에 방파제를 세우듯, 일어날 사건을 예측하고 대처하려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편 윤의섭 시인에게 예감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미 다가올 무엇인가를 예감하는 애끓는 바다가 인간이다. 눈이 내리기 전 눈을 예감하는 마음으로 들끓는 간절함이 인간이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을 가치중립적으로 이해하려는 객관적 사고와는 정반대인 세계 이해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것은 애끓는 마음으로 세상이 ‘눈’을 던져주는 맞이하는 기쁨의 자세이다.
앞선 장에서 이야기했듯 윤의섭 시인은 타자를 깊이 배려하며, 사소한 소멸조차, 즉 눈송이가 내리고 사라지는 순간조차 내밀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눈의 점문’이란 애끓는 마음으로 세상을 응시할 때 발견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언어다. 그리고 그것은 유비의 상상력에 기초한 세계 이해를 연다. 그리하여 그는 점성술사처럼, 양자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와 천체를 잇는 마음의 지도를 얻는다.
다른 시에서 시인은 “나는 별자리 지도를 골목길과 맞춰 본다”(「지경」)라고 말한다. 그에게 지반 아래 침잠한 하수관과 궤도를 벗어난 별의 형상은 닮았다. 그것들은 경로를 벗어나 좀 더 깊고 고독한 장소로 향한다. 어쩌면 그것은 삶에 지극해지는 대가로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시인의 마음과도 닮았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나는 귀가 왜 꽃송이 모양인지 안다/모든 소리는 귀에서 난다”(「화음華音」)라고 말한다. 꽃과 귀는 닮았다. 꽃이 활짝 열려 있듯, 귀는 활짝 열려 있다. 귀가 소리를 듣듯, 꽃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몸짓이다. 이렇게 꽃처럼 윤의섭 시인의 예감은 피어나고, 꽃의 몸짓처럼 그는 세계를 간절히 맞이한다.
3. 고독과 겸허
지금까지 윤의섭 시인의 시에 관해 두 가지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다. 먼저 그는 삶을 크게 본다. 한 존재의 시간 전체를 끝까지 응시하려는 노력이 행해진다. 시인은 한 사람이 ‘이미’ 살아왔고, 아프게 ‘끝’을 맞이했으며, ‘이후’에도 그의 안부와 소식이 쉽게 잊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깊이 삼킨다. 또한 그는 세계를 크게 본다. 그는 양자와 인간과 천체의 섭리 속에서 ‘닮음의 표상’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모든 존재는 추락한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 이것은 일몰과 관官과 낙화가 공유하는 분명한 법칙이다. 인간은 자신보다 작고 큰 세계로부터 스산함을 예감하고 애달프게 고대하는 존재, 그 간절함 속에서 섭리의 일부를 ‘눈의 점문’처럼 어렴풋이 움켜쥐는 존재다.
이렇게 나는 시인의 시야에 관해서 말했을 뿐이다. 그는 별처럼 세상을 높이 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낮은 두 발을 생각해보자. 한 시인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 그의 두 발이 어떠한 현실을 디딜 수밖에 없는지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필연적으로 그의 자세는 고독에 이를 수밖에 없다. 시간 밖의 시간, 인간 이상의 섭리를 탐구하는 시인의 자세는 결국 지리멸렬한 삶과 거리를 둘 때에만 견지될 수 있다. 세속과 거리를 둘 때, 그는 오래 자신의 마음을 홀로 돌보아야 한다. “좀 더 앙상해져야 하는 것이다”(「운주雲住」)는 문장처럼, 마음은 높아질수록 앙상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영혼은 별 가까이서 기거하고
창밖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한 채의 옥탑방
죽은 줄 알았는데 품은 것이다 그리고 목이 말라서
스스로 눈물이 된 신들이 흘러가다 어디든 괜찮아 멈추었듯
불은 켜지지 않았다
오래 흐느꼈고 그걸 삼켜야 했다
-시 「옥탑방이 있었고 흐느꼈다」 부분
이 시에 관해서 많은 해설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별’의 높이에 이르려는 마음이 있으나 그의 두 발은 ‘한 채의 옥탑방’에 머물러 있으며, 갈증을 견디며 괜찮다고 말해보았으나 “오래 흐느꼈고 그걸 삼켜야 했다”. 갈증으로 갈증을 삼키는 이 외로운 시간을 시인은 시집에 거듭 고백한다. “다가올 날의 시간이 모조리 모여들어 영원 너머에 이른 듯 순식간에 늙어 버린다”(「전열戰列」)라는 문장처럼, 그는 고단함을 견디고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 쪽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흐린 날에 갇혀」)고 말하기도 하고, “마감 없는 고독 나는 언제부터 여기 격벽을 세워 두었는가”(「국도에 내리는 비」)라고 탄식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결에 이르도록 외로웠다”(「사람 속의 벚꽃」)라고 말할 때, 나는 한 시인의 마음 앞에서 침묵하게 된다. 그가 감당하는 고독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깊은지 대신 증언하는 일에 머뭇거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가 받아들인 고독이 우리에게 얼마나 높은 풍경을 제시하는지만 암시하려 한다. 그것은 그의 고독한 형이상학, 그 별빛처럼 희미한 ‘눈의 점문’을 좇는 그의 고독한 자세가 열어놓는 풍경이다. 일단 거대한 풍경을 상상해보자. 아주 멀리서 세상을 한눈에 보려 할수록 인간은 작고 앙상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시선을 지평선으로 옮기면, 아니 더 높이 우주로 옮겨놓으면, 지구조차 점으로 보일 만큼 작다. 윤의섭 시인은 바로 그 숭고한 풍경 속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는 인간의 왜소함을 직시한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인간이 어떠한 자세로 올려다봐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낙엽도 빗방울도 눈송이도 입 밖으로 튀어 나간 말도 느린 눈물도 벤치에 수그리고 앉은 몸도
지구도
성하도
끝내는 숭배의 자세다
-시 「파편」 마지막 부분
숭배란 숭고한 대상을 향한 지극한 존경을 뜻한다. 우리는 숭배의 감정을 느낄 때 대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 앞선 시에서 낙엽이나 빗방울이나 눈송이, 이 모든 몰락들은 죽음을 직감하게 하는 추락 운동의 표상이었다. 시인은 시 「파편」에서 이러한 추락 운동을 숭배의 자세와 일치시킨다. 죽음보다 정확한 숭배의 자세가 있을까. 죽음은 어느 생명체이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을 향해 가장 낮고 홀가분하게 엎드리는 존경의 자세다. 이러한 자세로 윤의섭 시인의 시가 떠받치는 것은 지구나 성하보다 큰 무한성이다. 우러러볼 수밖에 없으며, 그 거대함에 비추어 인간의 미욱함을 깨닫게 해주는 무한성이다.
그의 시는 숭고한 동시에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것은 모순된 진술일까. 고대에 숭고미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자연을 맞닥뜨렸을 때 자연의 위대함 자체로부터 느껴지는 인상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는 두렵고 존경스럽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오랫동안 아름다움과 숭고는 대립하는 감각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칸트가 숭고함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믿은 이유는 ‘무한함’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무한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라는 생각의 전환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윤의섭 시인이 그려낸 숭고한 풍경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의 시가 숭고한 이유는 그가 화초로부터 성하를 관통하는 자연의 섭리를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한없이 낮은 자세로 표현할 수 있는 겸허의 능력 때문이다. 그는 낙엽으로부터 성하까지의 높이로 세상을 우러러본다. 그는 타자와 세계의 몰락을 누구보다 깊이 목격하려 한다. 그 태도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죽음은 자신을 비우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가 취하는 겸허의 자세는 어떠한 독자라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윤의섭 시인의 시 쓰기는 시작된다. “삶은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지”(「신비」)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항상 삶의 끝을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을 생각하게 된다. 끝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하는 그의 여행은 지극하면서도 홀가분하다.
1)그는 시집의 마지막 시 「극려」에서도 “다락에서 나는 몇 마리의 시계를 죽였다”라고 말한다.
2) 관측 행위 자체가 관측하는 상황을 ‘교란하기’ 때문에, 불확정성의 원리는 발생한다. 비유하자면, 인간은 태양 크기의 입자로 된 우주에서 생활하고, 양자는 개미 크기의 우주에서 놓여있다(실제 차이는 이보다 크다). 태양 크기의 현미경으로 개미를 관측하려는 순간, 현미경의 렌즈에 반사되는 햇빛만으로도 개미는 불타버릴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부분과 전체』에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낱낱의 분자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뉴턴 역학의 법칙에 따라 그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음 순간의 상태를 추론할 수 있는 자연의 객관적인 상태가 외관상으로는 어느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 역학에서는 차원이 다릅니다. 즉 관찰되어야 할 현상을 교란하지 않고서는 관찰할 수 없으며, 따라서 관찰수단에 작용하는 양자효과는 스스로 관찰되어야 할 현상 안에 불확정성을 도입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만족을 못 하고 있는 것이지요.”
3)카를 로젠크란츠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런 구분에서 숭고함은, 칸트 이후 일반적 견해였던 것처럼, 미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로 미의 한 형태로 무한성으로 넘어가는 그런 극단적인 미의 현상으로 간주된다.”(조경식 역, 『추의 미학』, 나남, 2008, 182쪽)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비정형의 상상력」이 당선. 현)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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