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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제10회 김구용 시문학상/남현지/김구용론/난해의 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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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494회 작성일 22-12-2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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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제10회 김구용 시문학상/남현지/김구용론/난해의 낙인 


난해의 낙인


남현지 문학평론가



1. 김구용과 ‘난해시’ 담론


‘시가 난해하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독자로서 토로하는 독해의 어려움을 의미한다. 이때 난해성은 작품과 독자 사이에 ‘작품 해설’이라는 전문적인 글쓰기 영역을 창출하는 전제이자 비평가나 연구자에게는 내재적 작품 분석의 계기가 된다. 또한 시의 난해성은 동시대의 지배적 미학을 벗어나 그 독법에 새로운 감각이 요구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20세기 유럽 모더니즘 예술이 재현이라는 전통적 관계에 반기를 든 이후 현대시의 난해성은 모더니즘 미학의 특징으로 수용되었고 영미 ‘신비평’에서는 ‘애매성Ambiguity’을 시의 본질로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개념이 갖는 주관성과 모호성은 부정적인 뉘앙스와 함께 문학장 내 담론 투쟁에서 선택과 배제의 기준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작품의 생산과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두고 일어나는 투쟁은 신념의 재생산을 통해 문학장을 성립시키는 근거이자 그 결과가 된다. 한국 현대시에서 난해성은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의 등장 이래 오늘날까지 문학장 내에서 계속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적 개념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현대시 내부에서 해소되지 않는 어떠한 갈등이 ‘난해시’를 둘러싼 논의에서 표출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경우 시의 난해성은 주관적 해석의 불가능이나 현대시의 미학적 특징이 아니라, 시와 시인의 정체성을 둘러싼 역사·사회적 담론이 된다. 그렇다면 한국 시사에서 대표적인 난해 시인으로 손꼽히는 김구용은, 그가 활동한 당대의 문학장 내부의 담론적 대립을 치열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매개가 되는 셈이다.

김구용은 전통 서정시 경향의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지만 곧 전쟁을 거치면서 그의 작품은 이미지의 파편화와 산문성, 장시화가 심화되었다. 첫 시집 『시집1』(1969)을 거쳐 『구곡』(1978)부터는 점차 운문성이 강화되고 이후 불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 세계로 변화된 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김구용이 활발히 활동한 1950년대에 그의 시에서 난해성을 직접적으로 문제 삼는 비평은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작품이 ‘난해시’로 명명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 ‘사기 논쟁’부터이다. 또 하나, 흔히 문학사에서 1950년대 시문학장은 전통서정시와 모더니즘의 양분된 대립 구도로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김구용의 난해한 시가 당시 서정주와 조지훈 등 전통계승파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설명은 힘을 잃는다. 1950년대와 60년대 시의 난해성 수용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 김구용 시의 난해성을 전통계승파가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현대성을 담보한 신진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시에서 난해성을 역사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리라 본다. 또한 그의 시에 대한 비평을 텍스트 삼아 한 시인에 닿으려는 이 거꾸로 된 시도는 한 시대와 문학의 자장 속에서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가늠해보는 일일 것이다.   


2. 1950년대 시문학장의 ‘현대성’ 담론과 김구용의 ‘현대성’


문학사에 남겨진 김구용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1956년 당시 ‘한국문학가협회’의 상임위원이었던 기록, 1955~56년까지 잡지 《현대문학》의 편집기자로 근무했으며 제1회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자였다는 점 등이 1950년대에 남겨진 그의 이력이다. 하지만 이 이력은 당시 문학장의 지형을 다시 보게 만든다. 《현대문학》은 전후 남한 문단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청년문학가협회’ 출신의 조연현, 서정주, 김동리가 주축이 되어 1955년 창간한 순문예지이다. 문학적 전문성과 자율성을 담보하고 범문단적 잡지를 표방하며 출발한 《현대문학》은 당시 출판 환경의 변화, 성장하는 아카데미즘과 문학과의 관계, 새로운 문학 담론의 요구 속에서 ‘전통의 계승과 현대성의 지향’이라는 이중적 매체 전략을 수립한다. 이때 ‘현대성’은 시류나 서구의 첨단 의식이 아닌, 전통이라는 역사의식을 통한 현대성이다. 이는 흔히 1950년대 시문학사를 전통서정시와 모더니즘 시의 대립으로, 현대성을 모더니즘의 이념으로만 보는 시각에 균열을 낸다. 조지훈은 1950년대를 실험의 연대라 칭하며 50년대 시인들을 다섯 부류로 분류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시인들을 전통파의 율격을 현대화한 시인, 현대 서구시의 방법을 수용해 새로운 서정을 연 시인, 현대적 감각으로 문명과 도시의 파토스를 담으려 한 시인, 문명 비판적이고 지성적 서정을 가진 시인, 그리고 협의의 모더니즘 전통파로 나누지만, 동시에 ‘현대성의 지향’이라는 동일한 이념을 공유한 것으로 파악한다. 1950년대 후반 ‘한국시인협회’가 창립되었을 때 그 기관지 역시 《현대시》의 제호였던 것 또한 당시 ‘현대성’이 ‘후반기’ 동인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계열의 전유물이 아니라 범문단적 담론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현대문학》이 내세웠던 ‘현대성’의 이념은 최초의 신인상을 김구용에 수여함으로써 구체화된다. 김구용에 의하면 50년대 초반 조연현과 서정주는 그의 산문시에 대해 시가 아니라거나 전통이 없는 것은 안 된다는 등의 혹평을 내린 바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후인 1956년, 이들은 《현대문학》의 ‘전통의 계승과 현대성의 지향’이라는 매체 이념을 담보하는 신인으로 김구용을 상징화한다. 서정주는 이때 심사평에서 1950년을 전후해 문단에 진출한 이들 중 김구용을 가장 높이 평가하며 그 이유를 ‘시정신의 심화’와 ‘시언어에 대한 성과’로 든다. 그에 의하면 김구용의 시정신은 ‘동양정신과 서구정신의 종합적 정신’이다. 당시 조지훈, 박목월 등의 평가에서도 그의 산문 형식에 대한 우려는 있지만 난해성에 대한 지적은 없다. 이 무렵 전통계승파는 ‘정신주의’의 입장에서 김구용의 시를 수용하고 나아가 시정신의 현대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자유문학》과 《문화예술》 등 뒤이어 창간된 문예지들은 《현대문학》과 함께 문학 담론을 활성화하고 등단 제도를 통해 새로운 세대를 재생산해나갔다. 또한 아카데미의 급속한 성장으로 문학은 근대적이고 제도적인 학문으로의 정립과 장르별 전문성을 요구받았다. 이 과정에서 1950년대 후반에는 시의 ‘현대성’ 논쟁이 심화되는데 이때 ‘난해성’이 함께 언급되기 시작한다. 당시 현대성의 문제는 단지 문학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전후 남한 사회는 미국과 유럽의 현대성을 선진성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팽배했고 현대성은 서구의 현재적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는 했다. 시의 난해성을 비판하는 대다수의 이들은 이를 무분별한 서구 모방의 문제로 인식했다. 난해성이 현대시의 특징이라는 말은 달리 말해 난해하지 않은 것은 현대적이지 않은, 즉 후진적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50년대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들은 비평의 전문화를 주장했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신비평 이론 수용과 함께 작가 이상에 대한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들에게 시의 난해성은 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분석 비평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난해성이라는 주관적이고 부정적인 용어 대신 신비평의 ‘애매성’ 개념을 도입해 이를 학문적으로 객관화시키려는 이들의 시도는 시의 난해성 문제를 전문성의 영역으로 전환시켰다.  

당시 유종호와 김춘수의 김구용에 대한 비평은 앞서 서정주, 조지훈이 중요하게 보았던 ‘시정신’이 아니라 ‘시의 형태’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환을 보여준다. 유종호는 1957년 「불모의 도식」이란 글에서 김구용이 평범한 내용을 억지로 어렵게 만드는 ‘복잡하게 말하기’를 하고 있다며 공허한 포즈의 산물이라고 혹평한다. 하지만 이 글도 난해성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유종호는 김구용의 시 「소인」을 두고 ‘산문에의 굴종’이라며 산문성을 비판하는데 이는 그가 시의 자율성을 시의 형태적 경계를 지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유종호에게 시는 음악성에 기반한 언어 미학이었고 김구용의 산문성은 시의 장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춘수는 1959년 『한국시 형태론』에서 시의 형태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운동임을 주장한다. 그는 김구용의 작품 「뇌염」과 「탈출」을 평하며 장르적 파괴는 문학의 근원적인 형태로 회귀하는 과정으로 현대시에서 산문시의 영역을 긍정한다.  

김구용 또한 현대성 담론의 자장 속에서 현대의 의미를 피력하고는 했다. 그에게 ‘현대’는 서구적인 것이나 선진성이 아니라 동양이라는 시공간 내에서 자신이 체험하는 ‘현실’을 의미했다. 따라서 김구용을 초현실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더욱 엄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초현실주의와 자신의 시는 ‘의식’의 유무로 달라진다. 초현실주의가 서구예술의 재현적 전통과 인식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반발로 무의식을 중시하는 기법을 사용했다면,  김구용이 보기에 자기반성에 이른 서구의 철학과 예술은 동양의 전통적 인식관과 유사한 것이었다. 사물과 이념의 고정된 ‘상’을 부정하는 불교적 인식론에서 보자면 초현실주의는 동양에서 “생성의 묘리”라 할 수 있는 ‘이질적 심상이나 물상의 배합’인 것이다. 김구용은 이 방법론을 다시 ‘무의식적 배합’과 ‘의식적 배합’으로 나눈다. 초현실주의가 선택한 ‘무의식적 배합’은 효과를 생각하지 않은 지성이 결여된 방식이지만 ‘의식적 배합’은 지성이 개입하여 작품의 밀도를 만들어내는데 이 중압감에서 난해성이 나타난다. 그에게 난해성은 재래의 관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당대의 변화된 현실을 이해하려는 사투로 발생하는 것이다. 김구용에 있어 ‘현대’란 ‘현실’에 다름 아니었고 시는 유동적이고 인과적인 현실을 향해 깨어있는 의식으로 쓰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난해성이란 시간에 따라 달리 평가되는 역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세기가 넘게 흐른 현재에 우리도 김구용의 시에 으레 뒤따르는 ‘난해성’에 의문을 던져 봐도 될 것이다. 그의 시는 정말 난해한가? 우리는 혹은 나는 이제 시에서 무엇을 난해하다고 표현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1950년대의 시인들과 비평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에 대한 각자의 탐색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3. ‘사기 논쟁’과 시인의 윤리


김구용의 시가 ‘난해시’로 각인된 것은 1960년대 중반, 대표적인 난해시 논쟁으로 알려진 일명 ‘사기 논쟁’에서 비롯한다. 김수영은 《사상계》에 게재한 1964년의 연평 「난해의 장막」을 통해 시에 해설이 필수적인 것처럼 다루는 문예지의 기획과 난해시 비판 글의 증가를 두고 그 해가 마치 “난해시의 계몽주간” 같았다고 비판한다. 그는 난해시에 대한 비판은 긍정하면서 50년대 후반부터 반복되어온 난해시 논의의 틀을 벗어날 것을 요구했다. 김수영은 이 글에서 난해시에 대한 해설로 쓰인 수준 이하의 시론을 비판하는데, 이때 전봉건의 시에 대한 김구용의 시평과 함께 전봉건의 시론이 그 대상이 된다. 김수영은 김구용과 전봉건이 양심 없이 기술만 앞세우는 ‘사기’를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에 전봉건이 《세대》지 1월호에 반론 글 「사기론-김수영 시인에 부쳐」를 쓰고 김구용의 시를 비평한 김수영의 다른 글을 함께 비판한다. 같은 잡지 다음 호에 김수영이 재반론 글 「문맥을 모르는 시인들-사기론에 대하여」를 게재했지만 전봉건의 다음 글이 이어지지 않으면서 ‘사기 논쟁’은 일단락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전봉건에 따르면 3월호에 두 번째 글을 송고하고 조판까지 이루어졌으나 게재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봉건의 글이 실릴 예정이었던 3월호에는 그 대신 당시 신진비평가였던 김현이 쓴 김구용의 시 「삼곡」에 대한 비평 「현대시와 존재의 깊이」가 실린다. 김수영이 필연성이 없는 난해시라고 비판한 것에 대하여, 김현은 이 글을 통해 김구용 시의 난해성이 필연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김수영, 전봉건, 김현에 의해 논쟁은 의도치 않게 김구용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이후 문학사 서술에서 김구용이 ‘난해시’ 혹은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각인되는 계기가 된다.  

‘사기 논쟁’은 ‘난해시’에 대한 논쟁이지만 앞서 50년대와는 다르게 시의 생산주체에 대한 정의, 시인의 윤리에 대한 문제이다. 김수영은 「난해의 장막」에서 “시의 기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이라고 주장하며, 양심 없이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는 부류로 김구용과 전봉건을 지목했다. 같은 글에서 그는 김구용을 “초현실주의 시를 쓰는 시인”으로 언급한다. 당시 일본을 경유한 초현실주의에 대한 이해는 김구용에게서도 볼 수 있었듯이 정치성을 배제하고 정신분석에 기댄 무의식적 기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김수영은 문단에서 초현실주의의 기법을 현대성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만연했다고 보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영미 문학의 ‘오든 그룹’을 경유하여 ‘지성’과 ‘현실 참여’ 개념을 자신의 시론으로 내세웠다. 그에게 “시의 모더니티란 외부로부터 부과하는 감각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지성의 화염”으로, 기술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수영은 다른 지면에서 김구용 시를 비평하며 당대 현대시의 문제를 ‘자기 언어’의 부재로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이리하여 말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생겨난다”는 김구용의 시 「맹盲」의 구절을 들어, 언어에 대한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말을 하는 우리들 자신” 즉 현실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주체의 문제가 더욱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김수영이 김구용을 비판한 것은 그의 시론에서 합리적이고 근대적 지성의 대결을 볼 수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그의 시가 내세우는 ‘의미에 대한 부정성’이 결국 비지성이라는 한계를 직시하지 못하게 가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김수영의 ‘현실’이 시인과 관련하여 이미지로 작품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전봉건의 ‘현실’은 반영적인 것이 아니라 시인의 기술에 의해 재창조된 것이다. 전봉건은 김구용과 함께 50년대 문학장에서 전통의 계승과 현대성을 동시에 지향한 신진으로 불렸으며, 초기 시는 전통 서정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형식적 변화를 모색해갔다는 점에서 또한 김구용과 친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전봉건은 「사기론」에서 현대시를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현실 위에 새로이 창조된 시적 현실”로 보고 이를 위해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시를 만드는 기술”로 보았다. 그에게 시의 난해성은 김구용처럼 현실과의 대결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었고, 김구용의 시 역시 비지성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전봉건에게는 오히려 김수영이 주장하는 ‘현실 직시’가 ‘현실에 대한 관심’에 불과한 것이며, 김수영은 자신의 경험을 미학적으로 제작하려 하지 않고 감정이나 지식, 주장 등을 직접적으로 노출한 불성실한 시인이다. 이처럼 몰개성적 방법론을 추구한 전봉건의 입장에서 시인은 작품을 제작하는 주체이지, 시민적 주체로서 개인의 정체성은 고려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신진 평론가이자 불문학도였던 김현에게 시의 난해성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과 언어의 문제로 바뀐다. 김구용을 비롯해 50년대 난해시를 옹호한 이들의 근거였던 ‘난해한 현실 인식’은 상징주의에 근거해 사물에 부여된 낡은 언어를 벗겨내고 그 진정한 상태에 도달하려는 시인의 존재론적 인식과 그 실패의 흔적으로 재규정된다. 이는 도구적인 산문의 언어와 달리 사물 그 자체인 시의 언어로는 문학적 참여가 불가능하지만 시인을 “패배를 향하여 참여하는 사람”으로 지칭하며 시 고유의 참여성을 말한 사르트르의 관점과 동일한 맥락을 가진다. 김현은 김구용에게서 의미/무의미, 존재/비존재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실존적 주체로서의 시인과 그 ‘내면세계’를 발견한다. ‘내면세계’는 개별적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본질, 근원이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개시되는 세계이다. 김수영과 전봉건, 김구용만 하더라도 ‘현실’은 시의 공통된 존재 기반이었지만, 김현에게 시의 대상은 ‘현실’과 ‘내면세계’로 분리된다. 시인이 내면세계에서 존재의 본질에 천착할수록 그 근원적 경험을 기존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난해성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김현의 견해는 「현대시」 동인으로 이어져 이후 60년대 후반 난해시 담론은 ‘현실의식’과 ‘내면세계’의 대립 구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의 난해성은 곧 김수영의 말처럼 ‘사기와 같은 것’으로, 담론의 개진 없이 부정적으로 굳어진다. 70년대부터 난해시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받으며 ‘난해시 해소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한다. 김구용 시에 대한 비평 역시 ‘사기논쟁’ 이후로는 유의미한 쟁점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4. 글을 맺으며


처음 김구용의 시를 접했을 때 그의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그의 시가 가진 특이성은 독자로서 감상을 넘어 한국 문학사에 대한 무지를 더 강렬하게 각인시킨 셈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문학사에서도 드물었다. 덕분에 김구용의 이름이 오랫동안 잊힌 이유는 문학장 연구를 통해서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인 1950년대 문학은 전쟁과 반공, 빈곤, 서구 문화의 유입 속에서 자기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며 동시에 문학의 학문화, 전문화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었다. 또한 60년대의 정치적 격변은 남한 사회 지식장의 변화와 함께 작가들의 위치 변화, 문학장 내부의 세대교체와 새로운 의제를 요구했다. 김구용의 시는 문학과 사회의 관계가 부단히 변화하던 시대에 다양한 이들의 시론이 부딪히는 하나의 장소였던 셈이다. 그러나 ‘사기 논쟁’ 당시 이루어진 ‘난해시’, ‘초현실주의 시’라는 김구용 시에 대한 단편적 평가가, 이미 ‘난해시’가 부정적 의미로 굳어져 버린 70년대에 문학사 서술을 통해 재생산된다. 4·19세대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1973)에 언급된 ‘초현실주의 세례를 짙게 받은 「삼곡」의 김구용“이라는 짧은 서술은 오랫동안 보편적 평가처럼 반복되었다. 

현대문학사에서 김구용의 흔적을 찾는 과정은 문학장 내부의 영향 관계 뿐 아니라 정치, 사회, 제도와 문학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김구용 시로 가는 길 하나가 늘어났길 바라본다. 전통적 지식인의 아비투스를 가진 한 젊은 시인이 해방기와 전쟁, 혁명, 개발과 자본주의의 심화를 거치며 근대를 경험하고 그 현실을 이해하려한 분투로 그의 시를 다시 읽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이 글은 필자의 석사 학위 논문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남현지, 「1950-60년대 난해시 담론 연구-김구용 시에 대한 비평적 쟁점을 중심으로」, 동국대 석사논문, 2019 참조.

2)피에르 부르디외, 『예술의 규칙』, 동문선, 1999. p.225.  

3) 조지훈, 「한국 현대시사의 관점-한국시 50년의 반성」, 『조지훈 전집3-문학론』. 나남, 1996. 

4)유종호, 「불모의 도식」, 『유종호 전집1-비순수의 선언』, 민음사, 1995. 김춘수, 「한국시 형태론」, 『김춘수 시론 전집 1』, 현대문학, 2004. 

5)김구용, 「눈은 자아의 창이다-시를 위한 노트」, 『전집 6권-인연』, 솔 출판사, 2000.  

6) 필자가 구성한 ‘사기 논쟁’에 해당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김수영, 「난해의 장막」, 《사상계》, 1964.12. 전봉건, 「사기론-김수영 시인에 부쳐」, 《세대》, 1965.1. 김수영, 「문맥 을 모르는 시인들-사기론에 대하여」, 《세대》, 1965.2, 김현, 「현대시와 존재의 깊이」, 《세대》, 1965.3.

7)전봉건, 「두 시인」, 『플루트와 갈매기』, 어문각, 1986, 156쪽. 

8)김수영, 「모더니티의 문제」, 『김수영 전집2-산문』, 민음사, 1981, 350쪽.

9)장 폴 사르트르, 정명환 역,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54쪽. 





*남현지 동국대 국문학과 박사과정. 석사 논문  「1950-60년대 난해시 담론 연구-김구용 시에 대한 비평적 쟁점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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