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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제10회 리토피아 문학상/손현숙/박정규의 푼쿠툼, 내 고향 남해 바다 ―박정규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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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제10회 리토피아 문학상/손현숙/박정규의 푼쿠툼, 내 고향 남해 바다 ―박정규 시세계
박정규의 푼쿠툼, 내 고향 남해 바다 ―박정규 시세계
손현숙 시인
시는 지적이고 정서적인 정신의 기능이나 작업으로 보아야 한다. 이번 박정규 시인의 시편들은 모두 자신의 고유한 정서에 기대어서 철저하게 개인의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따라서 이번 시편들은 거의 통시적 관점을 넘어 공시적인 시선으로 전개한다. 그것이 고향이라는 ‘스투디움’적인 요소를 배재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박졍규의 고향, 즉 남해에 대한 해석은 개인의 풍부한 ‘푼쿠툼’을 수립한다. 박정규 시인은 시집 제목을 아예 『내고향 남해』로 공간을 설정한 후, 그 속에 기억의 한 단면과 현재적인 풍광을 실천적 질서를 동원하여서 보여준다. 파토스적인 부분을 다소 제외시키면서 로고스적인 입장을 고수한 이번 시집에서는 고향이라는 신화적 공간속으로 독자를 충분히 몰입시킨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시집 속에서 언표 하는 시인의 고향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현재의 공간으로 시간을 소환시킨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때의 그곳으로 돌아가서 고향을 회상하는 방법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고향, 지금, 여기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심상을 펼쳐나간다. 따라서 그는 시가 갖고 있는 애매함이나 모호함의 이론적인 장치를 배재한 후, 고향이라는 정서의 장소와 남해라는 특정한 공간을 상징적인 요소에 기대어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그가 주로 주목하는 대상은 물론 그의 고향인 ‘남해’겠지만, 특정 장소의 의미 외에도 바다를 흙처럼 생업으로 삼던 어촌, 즉 바닷가의 풍광을 보여주는 것에도 주력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 여기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인의 시적 태도와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작법은 기억의 무늬들 속에서 과거를 집대성하는 관념이 아닌, 수처작주隨處作主 하여 입처개진立處皆眞 하는 삶의 적극적인 방식과도 깊은 관계를 맺는다. 이는 상징에 기대어서 고향이라는 특정 공간을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신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이 사용하는 상징이란, 사물을 전달하는 매개적 작용을 통칭하는 말로,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기호가 그 성질을 직접 나타내는 것과 달리 상징은 그것을 매개로 다른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것이자,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부릴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자는 박정규 시인이 고향이라는 공간 안에서 발화하는 시적 상징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내고향 남해』를 읽어볼 것이다. 특히 시인의 시들 중에서도 상징 발화의 진술이 강한 ‘바다’와 ‘어머니’에 관한 시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강진만의 아침 바다는
잘 다림질한 물방울 원피스 같아서
빈센트 반고흐 ‘아몬드 꽃’처럼
영혼을 담은 한 폭 시원한 유화 같아서
어미에서 태어나는 세상 첫 옹알이
비눗방울처럼 반짝이는 진한 바다
찰랑이는 파도송이
둥지에서 먹이 찾는 새들의 부리 같아서
밤새 쏟아 놓은 시름들
반짝반짝 씻어 집어등에 걸어 말리는
한 점 허기 없는
맑은 아침끼니 한 사발 같아서
-「강진바다 윤슬」, 전문
위에 사용된 인용 시에서 우선 ‘윤’슬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기로 한다. 사전적 의미로 윤슬은 달빛이나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일컫는다. 이는 물별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런 광경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하나의 풍광을 넘어선 여백의 아름다움을 창출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시인이 아예 제목으로 차용한 윤슬은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물별처럼 강진바다에 관한 아름다운 한 때를 빠르게 스케치 한다. 시의 첫 행 “강진만의 아침 바다는”로 포문을 여는 「강진바다 윤슬」에의 서정은 마침표의 사용을 거부한 채 바다의 출렁임이나 밀물과 썰물의 교차처럼 시행엇붙임으로 문장을 이어나간다. 이는 강진바다의 신비를 묘사한 것인데, 이는 마치 있음과 없음의 찰나적인 모습처럼 윤슬에 반짝이는 강진바다에 관한 시인의 깊은 정서와도 맥을 잇는다. 이렇게 시인의 시선 속에서 포착된 윤슬 속에는 “잘 다림질한 물방울 원피스” 같기도 하고 “영혼을 담은 한 폭 시원한 유화” 같은 것이기도 하다. 또한 사는 동안은 반복해야하는 삶처럼 “둥지에서 먹이 찾는 새들의 부리”처럼 “밤새 쏟아 놓은 시름” 같은 걱정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윤슬의 찰나적인 시선 속에서도 시간, 즉 바다는 유장하게 흘러서 시인은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내어주는 강진바다에 관하여 “한 점 허기 없는/맑은 아침끼니 한 사발 같아서”처럼 삶을 아름답게 묘사되기도 한다. 이렇게 시인은 영원할 것 같지만, 찰나적인 바다의 한 때를 윤슬에 반추하여 삶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수억만 년 전 겨울
지구가 열병을 앓았을 성 싶다.
심장이 박상 같이 터져
안나푸르나 바위가 되었다고 본다.
수수만년 후 여름
보물섬 몽돌해변
출렁대는 파도의 속살에서
찰랑대는 심장을 건져 올린다.
긴 여정 득공의 도를 넘어
박동소리 따사롭다.
이식하고 싶은
말랑말랑한 당신의 결.
-「몽돌」, 전문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 문학의 본질이 꿈꾸는 것이고 그 무엇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인용한 위의 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화적인 상상력에서 출발을 한다. 몽돌이라는 바닷가의 아주 작은 돌멩이로부터 촉발이 되는 위의 시는 무생물에서 생명으로, 다시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혹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지표의 이동을 시도한다. 시간을 동반하는 신화적인 상상력은 일단 지구라는 무기물에 ‘열병’이라는 생물의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는 “수억만 년 전 겨울/지구가 열병을 앓았을 성 싶다.”로 현재의 지구는 이미 수억만 년 전부터 존재했던 시간의 결과물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행에서는 상상의 공간 속에서 지구가 지독한 열병을 앓고 난 후에 생겼을 물리적인 현상을 “심장이 박상 같이 터져/안나푸르나 바위가 되었다”라는 신화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관하여 화자는 비현실적 상상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현실의 공간 속으로 이입시킨다. 그리고 시인의 해석대로라면 그렇게 만들어진 바로 지금, 여기의 장소가 바로 “보물섬* 몽돌해변”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으로 오늘까지 살아남아 존재하는 바다는 어떤 생명의 원초적인 속살이고, 그 속에서 화자는 “찰랑대는 심장을 건져 올린다.”로 몽돌 자체를 심장으로 치환 발화한다. 급기야 화자, 즉 시인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몽돌에서 느껴지는 “긴 여정 득공의 도를 넘어/박동소리”로 촉각에서 청각으로 감각의 향연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시의 낙차가 생기면서 마지막 행에서 언표 하는 “이식하고 싶은/말랑말랑한 당신의 결.”은 급기야 시의 첫 행에서 발화했던 지구는 상징적으로 가이아, 즉 우주의 모신이었음을 밝힌다. 즉, 위의 시는 ‘몽돌’이라는 기표를 기점으로 시간의 단위를 무화시키는 신화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몇 날을 주무시던 어머니가
열꽃처럼 번지는 생의 여분을
마치 주문처럼 열었다
달토록 그리던 아버지를
울타리처럼 둘러선 자식들의 글썽임 속에서
가느다란 숨결로 만난 것이다
토끼풀꽃반지 끼워주던 분홍빛 시간으로
육십년을 환생처럼 고무줄로 당겨
고무줄놀이 하던 그 계집아이가 되고 만 것이다
싱글 뛰고, 벙글 뛰고
눅눅한 병실을 안마당 놀이터로 만드신다.
째깍째깍 초침의 끝자락에서
고운 어머니의 둥근 시간을
애벌레처럼 갉아먹은 자식들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마당놀이 관객이 된다
수천 년을 누워 있는 백두대간 허리처럼
아프다는 말 한마디 않던 어머니가
이제 그 아픔마저도 잊은 채
싱글 뛰고, 벙글 뛰며
자식들을 위해서
마지막 춤사위를 벌리신다.
-「둥근시간」, 전문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 위의 인용시가 표상하는 둥근 시간이란, 어머니의 시간이자 여자의 시간이기도 하다. 처음과 끝이 맞물려 있는 ‘둥근’이 상징하는 발화의 의미란,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처음으로 회귀하는 시간의 의미이기도 하고. 여자의 자궁을 나타내는 표상문자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자궁에서 태어나서 자궁, 즉 무덤 속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의 시작에는 언제나 여자, 즉 어머니가 계시다. 그 시작의 의미인 둥근, 자궁은 처음에는 불이었다가 흙이었다가 다시 원초적인 몰로 돌아가는 순환회귀의 ‘둥근’이 존재한다. 그 ‘둥근’에 시인은 시간에 관계된 의미를 부여한다. 위의 시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한 장면이다. “몇 날을 주무시던 어머니가”로 보아 어머니는 벌써 며칠째 의식이 없는 병환의 상태였었던 모양이다. 그런 어머니가 자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시듯 갑자기 깨어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 속의 어머는 지금, 여기에서 존재하는 어머니가 아닌 자손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고무줄놀이 하던 그 계집아이가 되고 만 것이다”처럼 지금의 어머니가 아닌, 과거로의 퇴행, 혹은 회귀를 보여주신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어머니의 깨어남은 느닷없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운 만남이기도 하다. 자손들은 모두 망연자실 “꿀 먹은 벙어리마냥 마당놀이 관객이 된다” 로 속수무책이다. 그런 어머니의 유아적인 회기에 화자는 “자식들을 위해서/마지막 춤사위를”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애틋한 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단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시지 않던 어머니는 ‘둥근시간’, 즉 죽음을 목전에 둔 삶의 시간 앞에서 생의 가장 환하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알 수 없는 어머니의 행동을 화자는 어머니의 ‘둥근시간’이라 명명하면서 어머니 이전의 고왔던 한 여인을 소환시켜서 깊이 애도한다.
우리 집 닭은 나이가 많다.
유년의 닭장 속 알둥지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품고 있다.
도시락 속 꽁보리밥에
들국화처럼 예쁘게 수를 놓아
가난과 존심을 가려주던
어머니의 사랑을 품고 있다.
학교 앞 구멍가게 붕어빵에 눈멀어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가
자갈길에 넘어져 옷 범벅 들통 나
아버지가 준 종아리 상처는
어머니의 약손과 동갑내기다.
우리 집 닭은 어머니다
허기진 자식 안쓰러워
눈물만 훔치다 몰래몰래
계란을 용돈처럼 낳아 주었다.
눈시울 붉어지는 지천명
자꾸만 굽어가는 어머니의
그 따뜻한 사랑을
석양빛 닭장에서 본다.
-「우리집 닭은 어머니다」, 전문
박정규시인의 이번 시집 『내 고향 남해』는 오롯이 시인이 나고 자랐고, 또한 아직도 살고 있는 고향에 관한 진솔한 기록이다. 시인은 처음 태생부터 그곳에서 수처작주隨處作主 하였으며 물론 입처개진立處皆眞했던 시인이다. 그가 나고 자랐던 고향 남해는 아름다운 12비경이 존재한 것은 물론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기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계란을 용돈처럼 낳아주는” 닭과 어머니를 치환 발화시킨다. 지금 이 시간 화자는 지천명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나이다. 그런 화자의 눈에 비친 “우리 집 닭은 나이가 많다.”의 ‘늙은 닭’은 마치 ‘늙은 어머니’의 행보와 겹쳐서 읽혀진다. 지금은 늙어서 볼품이 없지만 화자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꽁보리밥을 싸가는 도시락보자기에 “들국화처럼 예쁘게 수를 놓아” 주시던 자존심 센 어머니이고. 아버지의 회초리에 상처가 난 화자의 종아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심성이 따뜻했던 어머니이시다. 화자는 그렇게 무엇이든 내어주시기만 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늙은 닭에게서 고스란히 느낀다. 이미 늙어서 쓸모없을 것 같은 닭이지만, 닭은 여전히 화자에게 “계란을 용돈처럼 낳아 주”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바라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존재에게서 어머니를 읽어내는 화자는 이제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완성된 몸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이제 어머니의 “그 따뜻한 사랑을” 몸으로 실감한다. 따라서 인용된 위의 시는 화자가 늙은 닭과 어머니를 알레고리로 엮어서 발화하는 시작법을 넘어서 구체적인 삶의 순환을 묘파한다.
이상으로 박정규 시인의 시집 『내고향 남해』를 읽었다. 이번 박정규의 시집은 한 개인의 고향에 대한 애정을 뛰어넘어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와 근원에 대한 회귀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인간에게 고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따뜻한 서정으로 읽을 수 있는 어머니와 바다에 관한 박정규의 푼쿠툼, 시들을 살폈다. 이것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답을 대신할까 한다.
*손현숙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사진산문집 『시인박물관』, 『나는 사랑입니다』. ‘국풍’ 사진공모 수상.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수상. 경기일보 오피니언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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