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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집중조명/변종태/시평/바닷가를 서성이는 노마디스트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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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집중조명/변종태/시평/바닷가를 서성이는 노마디스트의 발걸음
바닷가를 서성이는 노마디스트의 발걸음
변종태
1.
오늘도 어느 바닷가를 서성인다. 돌아서면 해조음海潮音이 발목을 휘어 감는다. 뿌리치고 등성이를 올라서 사람들이 거니는 소도시 어둑한 뒷골목으로 스며들어 그들의 삶을 기웃거린다. 나른한 듯 피곤한 듯 흔들리는 조명 아래 수조에서 갓 건져 올린 돌문어 한 접시에 바다 물빛 소주 한 병을 시킨다. 앞자리는 비어 있다. 아니, 항상 투명한 ‘그대’가 앉아 있다. 비어 있는 그대의 잔에도 정확히 수평선 높이로 소주를 따른다. 술잔을 들어 올리지 않는 그대를 향해 쓴웃음을 짓고, 쓰디쓴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저무는 바다를 위하여, 쓰러지는 하루를 위하여, 그리고 항상 투명한 그대를 위하여!
오늘도 주머니는 산책길에서 잡아 온 포획물들로 불룩하다. 이 정도의 사냥이면 제법 소득이 짭짤하다. 이것들을 어떤 단어로 양념을 하고, 어떤 시로 조리를 할 것인가. 시인은 근본적으로 노마디스트Nomadist들이다. 언제 어디서건 그들의 사냥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식성은 다양하여 식물성이든 동물성이든 광물성이든 가리지 않는다.
노마디즘Nomadism은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살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노마드, Nomad)에서 나온 말. 유목주의라고도 한다. 이 용어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1968년 발표한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서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여 철학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기존의 가치나 철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는 것을 뜻하며 학문적으로는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시인들의 시력은 매보다 뛰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조차 종종 포획하곤 한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또 안 보이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마저 포획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부여하는 가치는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가치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론을 거쳐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의심할 수 없는 명제로 선언하였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를 패러디한 다양한 언술들이 쏟아진다. “나는 쇼핑(셀피, 클릭, 욕망, 노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소비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하고, 셀프 사진을 찍는 순간,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여 확인하는 순간에 자아를 확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인이라는 유목민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까. 데카르트식으로 말하면, “나는 시를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천형天刑이라는 고백을 하는 시인도 있었듯이, 쓰고 싶어도 써지지 않는 시, 몸부림치며 썼지만, 맘에 들지 않는 시를 앞에 놓고 있으면 왜 시를 쓰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반면에 독자들을 기쁘게 해 줄 만한 한 편의 시를 완성한 순간에는 형벌이기보다는 환희일 수도 있겠다. 그러기에 환희에 찬 시인의 신선하고 뜨끈한 신작을 읽는 것은 추운 거리를 지나다가 포장마차에서 따끈한 어묵 국물을 들이켜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
2.
서정문이라는 노마디스트는 오늘도 바닷가를 서성인다. 바람, 파도, 짠내음, 짭조름한 맛에 이르기까지 그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은 온통 바다에서 온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그의 삶에서 바다는 그의 생존환경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런 그가 바다와 가까워진 것은 어떤 연유인가. 최근 그는 오랜 군생활을 마무리하고 제주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것도 해조음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서귀포, 바다가 코앞에서 철썩이는 곳을 삶터로 삼고 있으니, 그의 오감이 바다를 향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침에 왔다가 저녁이면 희디흰 이를 드러낸 채
등을 보이며 흐르는 사람을 보았어요
검은 바위에 이마를 얼마나 부딪쳤으면
끝이 하얗게 탈색되었을까요
건너지 못하는 강도 있었는지요
너무 깊어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잃어버린 기억으로 발이 얼얼할 때까지
이리저리 강변을 걸었는지요
갈대는 저물어가고
이편과 저편의 집 없는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강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는지요
온몸은 눅눅해지기 시작하고
아침까지는 아무래도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밤
첨벙거리는 소리의 그 끝을 서성이며
잡았던 손의 느낌을 잊지나 않았는지요
너무 오래거나 빠르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는지요
손가락 끝에서 좁은 여울 소리 들립니다.
―「물 꿈」 전문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얘기지만, ‘물 꿈’은 길몽吉夢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마당에 물이 넘치는 꿈은 큰 재물이 들어온다고 하고, 솥에 물을 끓이는 꿈은 재물이 물 끓는 것처럼 넘쳐나게 된다거나, 지병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운을 되찾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몽한다는 것이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물의 이미지를 ‘부드러운 물’과 ‘난폭한 물’ 두 유형으로 나눈다. 부드러운 물은 물의 물질적 상상력, 문화의 콤플렉스, 역동적 상상력, 모성적 상상력으로 나누는데, 이러한 물의 이미지는 현대시에서 다양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1연의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는 2연의 깊고 넓은 강으로 이어지고, 그 기슭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천母川으로서의 안식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에서의 물은 ‘그대’와 ‘나’ 사이를 가르는 동시에 이어주는 것이면서 나아가 그대를 향한 그리움으로 그려지고 있다.
길 없는 허공을 가로질러 까마귀 한 마리 날아간다
황톳빛 화면에 까맣게 서 있는 먼나무 한 그루
그 위에 깃털을 꿈꾼다
붉은 열매 가득한 가지가 출렁이고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 공간을 메운다
까마귀 부리에 붉은 노을이 물들 때
나무 아래쪽으로 접힌 날갯죽지
퍼덕거릴수록 화면은 노오랗게 물든다
마른 잎들이 푸르르 말소리처럼 울부짖어
오래된 능선을 남겨둔 채
꽃등을 켠다
붉은 반점들이 검은 날개에 박힌다
빗장을 벗기고 문을 들어서는
저녁 만장
먼나무 초록의 잎들
검은 날개를 지나 우르르 떨어진다
― 「서귀포 까마귀 ― 변시지 화백 풍으로」 전문
변시지 화백(1926 ~ 2013)은, 시의 주석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제주 서귀포 태생으로 서양화가이면서 2007년부터 10년간 한국인 최초로 미국 국립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작품 2점을 전시한 화가이다. 그는 1942년부터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학과에서 수학하여 1945년 졸업, 조선인 최초로 일전日展에 입선하였으며, 1948년에 광풍회 최고상을 수상하여 광풍회 정회원 및 일전 무심사의 자격을 부여받아 심사위원이 되었다. 광풍회는 일본 문부성 주최의 일전日展을 주관하는 일본의 최고 중앙화단으로서 약관의 나이(23세)에 최고(광풍)상 수상은 일본화단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강한 황토색으로 칠한 바탕에 검은 물감으로 거친 붓 터치를 특징으로 한다. 화재畫材도 그림마다 한 명의 남자, 소나무 한 그루, 말 한 마리 등으로, 섬에 사는 고독한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변시지 화백의 그림은 서귀포 기당미술관에 상설전시되고 있다.) 이 시는 군 생활로 인한 오랜 방황의 시간을 접고 제주에 정착한 자신의 모습과 변시지 화백의 그림이 주는 이미지를 동일시한 일종의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촘촘하게, 아니
허리가 잘리고 나서야 숨을 토하는 나이, 아니
허리가 잘려도 이야기하지는 않는 나이, 아니
잘 보이게 허연 이를 드러내고 웃다가, 아니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고 살아가다가, 아니
빨리 자라고 그래서 빨리 베어지는 삼나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빨리 돋아나는 건 저렇게 가슴이 말갛다
보란 듯이 창자를 드러내고 가지런히 줄을 맞추고
며칠 전 TV에서 들었던 아프리카 이야기처럼
낙타를 타는 남자들이 나이를 모른다는 것에 대해
개울가에서 멀리멀리 조약돌을 던진다
날아간 돌과 나 사이에 장마가 지면
내 나이를 잊는다
삼나무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도 젊게 보이는 남자도
꼭 나이를 알고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괜히 눈물이 난다
개울에서 멀리 던져버린 조약돌
다시 돌아와 강 아래 어딘가 자릴 잡는다
― 「나이테」 전문
제주의 산과 들, 오름에는 삼나무가 무척 많이 식재되어 있다. 숲을 이룬 삼나무들은 바닷가에서 산에 이르기까지 제주 풍경의 인상적인 모습을 하고도 있다. 19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심은 것들인데, 이제는 제법 그 둥치가 굵어 아름드리가 되어 있다. 그래서 보는 이들은 이 나무들의 나이를 헤아리곤 한다.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처럼 나무와 자신을 비교해보곤, 자신이 나이가 들어감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기를 거부한다.
또한 ‘나이’와 ‘아니’의 반복으로 라임Rhyme을 형성하고 있는 언어표현은 부정의 부정을 반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반복은 시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강화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첫 행부터 7행까지 반복되는 ‘아니’는 ‘나이’를 의식하기를 거부하는 화자의 행위를 오히려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의식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굳이 의식하지 않고 싶은 나이를 의식하게 만드는 현실은 부정하고자 하지만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덜 헐거워지고 빈틈없이 촘촘히 엮은
그물이다 망태기다
김장철 노랗고 단단히 박힌 배추 옆에
높이 솟아올라 더 힘센 파도는 다시 바다로 떠나
더 단단하고 알찬 소금이 된다
바다 가까운 사람들은 옷에서도 소금기가 배어 나온다
다시 바람이 소금이 되는 날
쏟아진 파도는 바위에 소금기를 잔뜩 부려놓고
수북한 인심도 덤으로 얹힌다
씻어내고 닦아서 가장 낮은 곳을 점령한
이 시대의 밑바닥이다
저 파도를 다시 불러 들여보리라
파도는 소금이다
소금이 파도다
흰 것이 졸아서 낮을 대로 낮아지면 소금이 된다
― 「소금을 위하여」 전문
‘소금’은 주지하다시피 대표적인 방부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재료인데,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은 이 시는 시인의 자아 찾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김장하는 모습을 보다가 소금을 떠올린 시인은 배추를 절이는 소금을 생각하고, 그것이 결국은 바다에서 비롯되었음을 떠올린다. 운명적으로 소금기에 전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바닷가 사람들처럼, 소금을 머금은 바다처럼, 세상의 근본이 되고자 함을 표현하고 있다. 부서지는 파도의 이미지로 환원되면서 “흰 것이 졸아서 낮을 대로 낮아지면 소금이 된다”는 마지막 행은, “이 시대의 밑바닥”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삶의 자세가 삶의 정수精髓인 소금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듯하다.
겨울이 반이나 흘렀다, 흘렀나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막다른 길을 돌아 나온다
아득한 것들이야 어디에도 흔하지만
양지에 수선화가 피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길로 들어서
이름 모를 덩굴이 촘촘하게 외벽에 드리운 귤창고처럼
겨울은 왜 이리 어수선한지
좁은 골목길 돌아 나오면 제멋대로 꽃을 피우는
헛헛한 바람만 가슴을 훑고 지난다
홀로 걷는 그 오르막은 여전히 낯설다
겨울이 반이나 흘렀나, 흘렀나
― 「겨울 수선화」 전문
길을 걷다 보면 문득 잘못 든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이럴 때는 가던 길을 되짚어 돌아 나오는 게 정답일 수 있다. 하지만 절반이나 간 상황에서 돌아 나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이 길이 정답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낯선 풍경들로 채워져 있는 순간이 있다.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들에 혼란이 온다. 알고 있던 모든 것들마저 회의하게 된다. 게다가 겨울이 반이나 흘렀다고 생각하는데, 계절을 잊은 꽃들이 피어 있다면 상황은 더욱 낯설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3.
오늘도 시인은 서귀포 바닷가를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가 어떤 포획물을 들고 그의 은신처로 숨어들지 모를 일이다. 그의 사냥도구는 지극히 단순하여, 싸구려 볼펜 한 자루만으로도, 그것이 해조류海藻類이거나, 크고 작은 물고기거나, 갯고둥 몇 개이거나, 파도 몇 잎이거나, 바다 그 자체마저도 포획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오롯이 시인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기에 그것들이 어떻게 변용되어 우리에게 다가올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그가 들려주는 바닷바람이 진득하게 배인 몇 편의 시들로 그의 짭조름한 생각을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면 그뿐이다. 그러다 보면 파들거리는 고기 몇 마리를 볼펜에 끼우고 은신처로 돌아가는 한 노마디스트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운이 좋다면 싱싱하고 아삭거리는 파도를 한 입 베어 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차운 바람이 부는 서귀포 바닷가에서 그를 기다린다.
*변종태 1990년부터 《다층》으로 활동 시작. 시집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 『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 『안티를 위하여』, 『미친 닭을 위한 변명』. 다층문학동인, 계간 《다층》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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