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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집중조명/김정현/작품론/한계가 없는 절망과 패배하는 사랑 어디에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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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529회 작성일 22-12-2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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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집중조명/김정현/작품론/한계가 없는 절망과 패배하는 사랑 어디에선가 


김정현 평론가


한계가 없는 절망과 패배하는 사랑 어디에선가 



1. 

개인적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허연 시인의 근작 시집인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 를 읽었을 때 들었던 느낌은 이 시집이 일종의 허무에 맞서 싸우는 실패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좀 더 풀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모두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모두 공평하다는 지점으로부터 출발하는 어떤 슬픔을. 즉 누구라도 결국에는 평등하게 쇠락해가고 지워져가며 한때의 빛나던 무언가를 상실해갈 수 밖에 없다면, 그러니까 “연옥”같은 이 세계 속에서 결코 ‘같은 모양을 가지지 않는 눈송이’(「FILM2」)를 다시 기다리는 것은 어떠한 ‘고통’의 형상을 가진다고 해야 할까. 

시인으로서 도달해야 하는 언어의 심연이라 할만 한 것. 그러나 ‘쓰는 자’로서 평생을 매달려도 결국 도달하지 못하는 그 지점에 대해서 그는 항상 생각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여기까지는 아마 시인이라는 생각에 어느정도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도달을 이루기 위해서, 혹은 치루어야 하는 ‘댓가’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있다. 언어의 심연을 언어로 규정하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고통과 슬픔 그리고 회한과 치열함이라 부를 만한 무엇이 없다면 ‘그곳’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점만은 확연할 것이기에.

말하자면 시인은 언어를 쓰기 이전에, 언어에 대한 ‘실패’를 안고 출발해야 하는 불가능성을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성공이란 가짜의 영광을 안고서 그저 자족하게 될 뿐이니. 시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출구를 찾지 못한 치욕들이 제 몸이라도/지킬 양으로 가시가 되고 밤은 길다./가시가 이력이 된 날도 있었으나 온당치/않았고 가시가 수사修辭가 된 적이 있었으나/모든 밤을 다 감당하지는 못했다.”고, 그리하여 “가시가 지배하는 밤. 가시의 밤”(「가시의 시간 1」)이 그저 남았다고 말이다. 

그의 말처럼 ‘온당한’ 말을 찾기는 지극히 어렵다. 온당하지 못한 말은 그저 ‘수사’로만 남게 되어, 이 ‘모든 밤’을 감당할 수는 없을 뿐. 그의 시집에서 들려오는 ‘선을 넘지 못했다’는 언급은 이처럼 실패한 자의 회한이 짙게 묻어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 대한 회한은 또한 욕망의 어떤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온당한’ 언어의 심연을, 혹은 불완전한 언어가 도달하기를 욕망하는 어떤 궁극적인 지점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고 그것은 불가능한 방법으로서‘만’ 가능하다. 

이 부분에 대해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해보자면 이렇다. 즉 불가능한 방법으로서만 가능한 언어란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무한할 수 있었고/학습되지 않았으므로 소멸하지 않았던 말”로서 존재한다고. 지금 주어져 있지 않은 그것은 아직 나에게 도달되지 않은 형태로, 가시와 같은 형상으로 그저 나를 찌르고 추동할 뿐이라고. 예컨대 “엎어지면 코 닿을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오십 미터」)은 언어의 세계 속에서, 나의 실패와 좌절은 ‘독’으로 쓰는 자를 부르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해야 하는 일은 그저, 그 독을 먹고 마시며 그 독으로서만, 나를 호명하고 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그가 말하는 “구제불능의 음악”이자 ‘치유하고 반항하는 것’ 혹은 ‘현기증’이자 ‘모든 비극에 뿌려져 있는 피’를, 그러니까 “고독”(「단풍에 울다」)을 감내하는 행위란 바로 이를 향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시인이 ‘끝내 하지 못했던 말’. 모든 시간의 쇠락과 쇠퇴와 몰락 속에서도, 이미 “쓴 맛을 다 본 소년”이 되어버린 자가 중얼거릴 말. “그래도/결국 가시가 나를 지탱하고 있다고……/그 말만은 끝내 하지 않았다”(「가시의 시간2」)고 중얼거리는 이 ‘하지 않은’ 말을 우리는 주의 깊게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은 그가 “오지 않는 자멸”을 기다리며, 그에 대한 “기억”(「마그마」)으로 왜 자신을 지탱하려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일 테다. 하여 “시가 나보다 더 다른 사람들이랑 더 친할 것 같다는/생각이 드는 오후다. 시 쓸 영혼이 얼마나 남았는지/가늠해”보며, “스스로 수치스러워 지는”(「Cold Case 2」) 것을 그가 견디려 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물어봐야 할 것이다. 이미 쇠락하고 소멸해가는 자신의 난파된 언어를 통해 어떻게든 견디며, 찾고자 하려는 것. 세계와 그리고 자신의 몰락을 고통스러워하며, 어떻게든 희미한 ‘불덩이’를 붙잡으려 하는 자가 지닌 허무함의 이면. 그 감각들이 허연 시인이 가진 내면의 풍경일 것이다.


2. 

그의 <대표시>에 읽혀지는 것들은 그러하기에 어떤 희망이나 성공인 완성의 이름을 가진다고 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는 오히려 실패와 고독을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말을 통해 현전하는 절망을 사랑한다. 그의 회한에 찬, 그러면서도 명징하게 냉정하고도 희미하게 뜨거운 목소리는 그러하다.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에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칠월」 부분

 

그의 시에 대해 다루었던 논자들 역시 지적했던 바이지만, 허연 시인의 시에서 느껴지는 어떤 서늘함과 냉철함은 뚜렷해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엄격성, 언어에 대한 치밀한 사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핵심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즉 우리에게는 ‘언제나 체념이 있’다는 것. 우리의 언어는 결국 불가능성에 의해 실패할 것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는 우리는, 실패의 지점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칠월」은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언어에 대해, 혹은 시를 쓰는 자로서의 운명이라 할만 한 것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드러내 준다. 그는 말한다. 자신의 언어가 사실은 얼마나 형편없으며 실패해왔는가를 말이다. 나의 언어는 빛나는 천상의 언어가 되지 못하며 사실 “땅바닥을 구르”고 있을 뿐이며, 그 언어를 어떻게든 끌어올려야 하는 고통은 “지옥같았던 내 눈물”이었다고. 그것은 “아직도 내곁에 있”으며 나의 실패를 철저하게 각인시키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물어야 하는 것은 고통의 근원, 혹은 “왜”에 있을 테다.

무언가를 행하려는 자로서, 자신의 도전과 노력이 철저한 실패로 일관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자신을 옹호하고 자신을 옳게 여기며, 스스로 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기에. 시간의 흐름과 망각에 저항하는 것이 시인의 언어에 대한 한 태도일 수 있겠지만, 그는 이 싸움에서 손쉽게 승리를 선언하지 않는다. “체념”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패배해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는 ‘승리’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아마도, 그가 지닌 언어에 대한 ‘사랑’이라 말해져야 할 성질의 것이지도 모르겠다.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으며, 나의 패배가 끊임없이 상기되고, 그 패배 속에서 지워져버린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 영화가 있고,/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기 때문에. 그가 과거형으로 말하는 이유는 이 사라짐을 자신의 쇠락과 매개시키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즉 일상의 나, 시를 쓰는 내가 아닐 수 있는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요컨대 이 쇠퇴에 소멸에 ‘저항’하지 않으며, 그저 ‘다르게’ 있고 싶어 한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결국 “늘 천국이 아”닐 수 밖에 없고,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그는 찾고 있다. 스스로를 믿지 않으며 냉소하는 것. 그리하려 성공한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실패가 더더욱 지속되기를 말이다. 그 실패의 지속만이 그를 ‘다르게’ 만들어 줄 것이며, 불가능한 언어의 가능성이 가진 좁은 문에 간신히 가 닿을 수 있게 해줄 뿐이므로. 그가 실패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가능성 때문이겠다. 그렇기에 그는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시 속에서 내밀하게 고백한다. 더 많은 실패와 좌절, 허무와 고독을 탐하려는 욕망을.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 색이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귀족을 의미하는 ‘푸른피’의 상징처럼, 시인이 정신의 귀족이며, 고고한 자여야 한다는 명제는 이제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는 시인이 시대나 사회와의 싸움에 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랴 시간과의 싸움에 패배한 자의 조건이자 동시에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하는 풍파에 가깝다. 즉 어떤 한때에,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이었으며, ‘소년’이자, ‘시인’이었던 나의 필연성. 그것은 시간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섭섭하게도.” 말이다.

따라서 「나쁜 소년이 서 있다」의 첫 구절,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라는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사는게 별반 값어치가 없다’는 것은 문학하는 자로서의 기본적 생각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무서운 것’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일 것이다. 삶은 ‘처연하게도 늘 한자리에서 무섭게 반짝인다’. 그것은 나의 쇠락과 망각 속에서도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 사라지지 않으며 늘 항상 그 자리에서 ‘무섭게 반짝’이며 뚜렷하게 각인될 뿐이다. 

이 무서운 삶의 올곧은 형태와, 쇠락하가는 나의 ‘외로운’ 현재 사이에서, 시인은 길항한다.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운 삶은 언제나 영속할 것이며, 그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결코 변할 수 없다. 그러니 그 안에서 나는 나를 ‘다르게’ 그리고 또한 ‘다르게’ “만들어”갈 수 밖에. 요컨대 쇠락과 소멸에, 패배했다는 사실에 대해 지지 않기. 나는 나의 ‘외로운 올곧음’을 버리고, 그저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만 존재하겠다는 것. 이 태도를 그의 냉철함의 이면에 존재할 뜨거운 욕망의 한 측면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그것‘만’을 위해 있겠다는 것. 시인이 시인을 만든다는 행위가 바로 이러하다. 제도나 이름만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이자, 유일하게 그 시간의 쇠락과 소멸, 삶의 완강함에 패배함으로서 저항할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하는 것. 그것이 이 시인에게 유일한 ‘법’이며, 그의 실체적인 존재인 “나쁜 소년”의 본령이 될 수 있다. 그는 말하자면 있는 것이 아니라, “서 있”으려 한다.


3.

하여 시인에겐 “소포엔 재난이 가버린 추억이/적혀 있었”고, 그 지나가버린 추억은 “시퍼런 독약”처럼 각인될 것이다. 그 기억들은, 아니 현실의 나보다 더 나여야 하는 무엇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필사적이며 필연적인 호명으로서만 그것은 인식될 수 있기에. 끊임없이 시인을 부르는 무엇.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북회귀선에서 온 소포」)는 이 세계 속에서, 언어의 심연을 찾으려는 자로서, 그러니까 쓰는 자에게 주어질 유일한 무엇으로. 

따라서 그의 냉소적이고 차가운 언어는 그 안에 어떤 뜨거운 불길을, 존재에 대한 자각을,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도달될 수 없는 지점을 향한 시선을 숨기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허연 시인의 새로운 작품인 「이별의 서」와 「중심에 관해」는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욕망한다. 여전한 패배와 실패를 그리고 자신의 출발점이라 할 기억의 존재를.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이었지

내일을 몰랐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단어를 찾아내도 모두 부정확했으니까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우리의 한숨이 너무 깊어서 오히려 누군가를 살게 했을지도 몰라

더 이상 한심해질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다 한 거 같았고

강변에서 일어나기로 했지


기뻐서 했던 말들이

미워하는 이유가 되지 않기를


                 ―「이별의 서」, 부분


시의 제목이 알려주는 것처럼 이 시는 이별에 대한, 혹은 일종의 연시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다른 시들처럼 이 시 역시 어쩌면 시에 대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언어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가를 말하고 있는 시로 읽어도 될 것이다. 그가 이 시에 말하고 있는 바는 사랑의 그러한 불가능성으로부터 유래할 무엇이기 때문에.

시의 첫 구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는 그의 말처럼,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아니면 먼지가 되어버린다거나 할 수도 없었”던 무력함은 이 시를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우리의 사랑이란 그저 무력하다. “한시절 파스타를 고르다 웃었고/가끔 강변에 앉아있는” 우리들처럼, “파산과 횡재와 저주와 찬사같은 것이 왔다” 가버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저 그는 그리고 너(혹은 언어)는 있었다. 무력하게. “우리는 그저 자주 웃었고 아주 가끔 절규”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을 따름이므로.

이 ‘무력함’에 대한 그의 고백을 우리는 그저 단순한 층위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무력함은, 시와 언어가 가진 성공이란 그저 사랑의 이름을 둘러싼 폭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명료하게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서 시인은 이 실패의 지점을 통해서 존재하게 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그러한 사랑의 방식은 무언가를 주거나 행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는’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왜? 그저 본다는 것이 어떻게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사랑이란 무언가를 베풀거나 주거나 혹은 너(혹은 언어)와 내가 함께 무엇인가를 창출해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거나 받는 것이 아닌가. 시인은 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그러한 사랑이란 결국 ‘부정확해질 수 밖에 없을’ 따름이다. 시인은 이를 다음처럼 말한다. “반은 사랑이고 반은 두려움이었지/ 내일을 몰랐으니까/ 곧 부서질 것 같았으니까/ 아무리 가져도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어떤 단어를 찾아내도 모두 부정확했으니까”라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소유한다는 것. 그는 그러한 행위의 성공이란 결국 ‘모두 부정확해질 수 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가져도 ‘내것’이 될 수 없는 것이며, 시간의 흐름과 몰락에 따라 “곧 부서질” 따름이기에.

따라서 그저 본다는 것,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이름으로 하지 않는 것에 속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사랑이란 결국 어떠한 점에서 ‘두려움’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요컨대 그가 말하는 ‘힘들었다’는 언급의 이면처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의 사랑으로 덮어씌우지 않기. 그가 말하고 있는 너에 대한, 혹은 언어에 대한 사랑이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요컨대 언어의 심연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무능에 가까운 무엇을 말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할 일을 다 하고 (강변에서) 일어난다는’, 어떤 무능한 행위와 말로서 귀결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무능한 ‘종결’은 불가능한 언어,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유일한 접근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불안전성을 통해 비롯될 수 있을 무엇. 아니 ‘올바른 사랑의 방식’으로 가득 찬 세계의 올곧은 강요와 시간의 쇠락 속에서, 그에 대한 패배를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 그것이야 말로 “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그 수다한 소리들이 아닐 때 오게 되는 ‘무언가’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시인은 시의 말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한숨이 너무 깊어서 오히려 누군가를 살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 한심해질 수 없다고 느꼈을 때/우리는 할 일을 다한 거 같았”다고 말이다. 이 말은 결국 “기뻐서 했던 말들이/미워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능함과 종결을 받아들이는 행위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즉 타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란 현상의 한 측면이라면, 시인은 그 소유를 버리고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도달될 수없는 희망과 그에 대한 절망의 극한이라는 지점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려 한다. 그 안에서 비롯될 어떤 가능성들의 언어를 말이다. 


중심을 잃는 다는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 목마가

꿈과 꿈이 아닌 것을 모두 싣고

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


중심이 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살면서

가장 막막한 일이다


어지러운 병에 걸리고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


중심이 흔들리니

시도 혼도 다 흔들리고

그리움도 원망도 다 흔들리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 까지 가는 것도 어렵다


그동안 내게도 중심이 있어서.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나가지는 않았었구나


중심을 무시했다

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지만 한 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겠다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구나


                                 ―「중심에 관하여」 전문


그가 말하고 있는 중심이란 말의 본뜻을 굳이 어떠한 하나의 개념으로 치환하는 일은 별다른 의미가 없겠다. 이 ‘중심’이란 말이 가지는 함의는 매우 많으며, 궁극적으로는 어떤 깨달음의 영역에 가까운 것일 테니. 그렇지만, 이 ‘중심’이라 말의 가장 핵심적 층위는 아마 언어,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의 패배와 실패 그리고 허무가 축적해온 언어에 심연에 대한 사유라 해야 할 필요는 있다. 말하자면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내가 원했던 가장 궁극적인 언어일 무엇.

쓰는 자들에게 부여된 운명이란 이러한 점에서 무자비하고 가혹한 것이기도 하다. 그 가혹함은 우리는 언어를 신뢰하지 않으면서, 그저 가능성만을 믿으라 말한다. 그러나 그 믿음에 불구하고 그것이 나에게 올 것이라는 완벽한 확신은 주어질 수 없다. 그저 희미한, 실패와 패배와 허무를 통해서만이 도래할 수 있는 언어의 심연을, 시인은 그럼에도 찾으려 한다. 아니 찾아야만 한다. 그가 말하는 ‘중심’, 언어의 존재방식이란 그러하다.

시인은 그렇기에 이렇게 말한다. “중심을 잃는 다는 것/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 목마가/꿈과 꿈이 아닌 것을 모두 싣고/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과 같다고. 그것은 나에게, 쓰는 자가에 “가장 막막한 일”이라고. 누구보다도 언어를 믿어야 하는 자들이 누구보다도 언어를 믿지 않아야 한다는 모순과 간극 속에, 그는 “어지러운 병”을 얻고 나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고 불현듯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어지러운 병이란 아마도, 언어를 다루는 자가 언어를 믿지 못하게 되어버린다는 그 극한의 한계지점을 뜻할 것이다.  굳건히 믿어왔던 것, 너무나 확고하여 단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 우리가 문학과 시라고 생각해왔던 것들. 그 자명한 이데올로기.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젝의 언급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이데올로기란, 우리가 그것을 믿는 한에서는 강력하고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가장 비사기적이며 무의미한 것이라는 그 말. 문학과 시란, 언어란 지금까지의 그에게 이렇게 있어오지 않았을까. 그 틀이 깨어지는 순간을 그는 ‘어지러운 병’이라 일컬은 것일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예컨대 “중심을 무시했다/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지만 한 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리하여 다시 한번 더’(프리드리히 니체) 이 쓰는 자로서의 숙명과 언어가 가진 심연을, ‘믿어야만’ 한다. 즉 언어의 심연이라 생각되어왔던 것. 중심이라 생각해왔던 것을 버려야 만이 그것이 비로소 중심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모순된 진리를 말이다. 

그러니 ‘중심’에 대해 그가 깨달았던 것은 이러할 것이다. “이제 알겠다/중심이 있어/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라고. 우리가 울고 불고 때를 쓰며, 올바르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잘못 사랑해왔던 언어의 심연, 그 중심은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게 그저 그렇게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패배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것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숙명으로부터, 우리를 부르는 그 희미한 목소리를 언젠가는 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운명을 그저 바라보는 무능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쓰는 자로서 우리의 할 일을, 그저 다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4. 

그러니 우리는 그럼에도, 그저 믿어야 한다. 쓰는 자로서 올바른 완성된 길이 아닌, 더 많은 헤매임과 좌절과 실패를. 그 도달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극한으로부터 희미하게 움터올 가능성의 잔재들을. 그가 그러하듯, 한계가 없는 절망과 패배하는 사랑 어디에선가 헤매이며 떠돌고 있듯이.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냉철하게 ‘촉성’(알랭 바디우)하게 될 것임으로. 그러한 기다림만이 쓰는 자가 해야만 하는 유일한 ‘행위’임을.





-각주-

1)이하 시집에서 인용하는 시와 신작시로 개제되어 있는 시에 대해서는 인용표기를 생략한다. 





*김정현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학산문학》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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