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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소시집/김인자/그림자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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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1
댓글 0건 조회 335회 작성일 22-12-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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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소시집/김인자/그림자 외 4편 


김인자


그림자 외 4편



부동으로 사는 것이 

나무로 알고 있다면 

그건 나무를 모른다는 말  

나무가 얼마나 긴 팔과 다리를 가졌는지

얼마나 잘 눕고 일어나 멀리 걷고 달리는지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숲을 걷다 보면 

건너 계곡까지 제 그림자를 밀려 끌며  

신출귀몰 축지법을 쓰는 나무는 

부동의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도 되고 동사도 된다

태어난 자리가 죽음의 자리인 건 맞지만 

오전에는 저 나무가 이리로 건너오고 

오후엔 이 나무가 저리로 건너가며 

계절을 따라 자리를 바꿔 돌다가 

산이 텅 비는 밤이 되어서야 

제자리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몸을 누인다는 걸 아는 자는 

그 산에 깃들어 사는 새들과 

나무 그림자와 새끼 다람쥐뿐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 



신문을 펴고 뜯어온 나물을 다듬을 때 

눈에 들어오면 구사일생 목숨은 건지지만 

겁에 질려 몸을 숨긴 녀석의 운명은 달라진다

데친 나물에 허연 배를 드러낸 애벌레를 보면 

내가 이토록 잔인한 존재였나 싶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먹고 살자고 

내 몸이 사주한 일을 

모르쇠로 일관하려는 심사는 뭔지  

침입자는 나였고 분명코 내가 저지른 일인데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아니 말이 없으니까,


한 인간의 과실로 비명횡사한 존재를 두고

끓는 물에서 사체를 건져지는 순간까지도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이 존재의 가여움  

눈앞에 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애벌레의 일방 과실로 

덮어씌우기까지 하는 적반하장과 몰염치

 

신이 인간에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참회기도를 가르친 건 

그럴만 한 뜻이 있었을 게다 


죄가 없다면 벌도 없겠지만 

이런 경우야말로 덫을 놓고 

아무도 걸려들지 않기를 바라는 일처럼 

얼마나 모순적인가 

누구에겐 생사가 걸려있는, 그러니까 

나는 잊어도 너는 차마 못 잊는 죄

미필적 고의 





몽골의 봄



몽골인들의 주식은 양고기다 

양을 잡을 땐 비나 눈이 오는 날은 피한다 

궂은 날에 친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봄에 양을 잡는 것도 금한다 

겨우내 잘 먹이지 못한 친구를 

먹이로 삼는 건 도리가 아니란다

양을 고르면 눈을 가리고 신속히 숨통을 끊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게 한다  

친구의 피를 헛되게 해선 안 된다고 

배가 고파도 고통스럽게 죽은 양은 먹지 않는단다 

집에서 기른 가축은 가족이기 때문에


긴 겨울이 끝나고 

초원 가득 야생화가 피고 나비가 날면 

게르 문을 활짝 열고 

양떼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들판에 

온가족이 둘러서서 마두금을 켜며 긴 고음으로 

대지의 신께 바치는 노래를 부르는 그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으므로 

모으고 소유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으며 

설령 뜻하지 않는 재해로 모든 걸 잃더라도 

신의 뜻이라며 순순히 받아들인다고 


육체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마침내 영혼조차 자유로워지는 유목 

낡은 책갈피에 잠들어 있던 꽃잎을 깨우듯

그들의 봄은 그렇게 대지에 깃든다고 





무슨 짓을 한 거니, 우리가



캥거루야,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눈은 꿈이려니 하고 감은 거겠지

그런데 입은 설마 웃고 있는 거니

아니겠지. 기가 막히단 뜻이겠지

기가 막혀서 아예 실성한 거겠지

이렇게 끝날 바엔

차라리 마지막 순간에

웃고 갈 수 있는 실성이라면

다행이지 싶기도 하고


자고 일어나니

지구 한쪽이 불바다가 되었다고

미안해할 자격조차 없는 인간들이

남의 일처럼 불구경을 하는구나

대체 우리가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니


화마에 쓰러진 소방대원들

천국을 버리고 피난길에 선 자동차 행렬

놀란 캥거루는 꼬리에 불을 달고 뛰고

뛰고 싶었겠지만 뛸 수 없었을

잠이 덜 깬 느림보 코알라는 

제 집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채 

눈만 멀뚱거리다 고아가 되었겠지


상상에도 없던 아득한 숫자

그렇게 죽어간 우리의 친구가 5억

여전히 불타고 있는 지구

여전히 쌓여가는 시체들

그 많은 숲속 친구들에게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설마, 

신이 우리를 버린 건 아니겠지





진실



진실은,

수백 킬로미터 해저동굴 

암반 속 금고에 저장된 

얼음보석 같은 거라서

지구 종말이 오기 전엔   

함부로 꺼내지 말라

세상엔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진실 따윈 없다 

진실은 밖으로 나오는 순간 

녹아버리거나 

먼지처럼 사라지거나 

거짓의 옷을 입고 만다


진실은, 

억만 년 잠에서 깨어나  

우리의 몸과 행동을 통해 

아주 천천히 빛을 보여주는  

몹시 귀한 원석이기 때문이다






시작메모

#무엇이 나를 글 쓰게 하는가
모든 고통과 번뇌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온다고했다. 그러니까 기도는 바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내려놓는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시詩도 그럴 것이다. 한동안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보던 시를 막상 쓰려고 하니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가처럼 시의 발자국을 떼는 일이 새삼스럽다. 문학을 갈망하던 푸른 청춘에 맛보던 짜릿한 희열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걸릴 듯 말듯 그 실낱같은 감정들이 심폐소생술을 받았을 때처럼 멈춰있던 심장을 가파르게 뛰게 했달까. 시를 놓아버린 후 나는 무엇을 하며 여기까지 온 걸까. 분명한 건 일상에서 시를 건져 올리진 못했지만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만은 더 없이 치열했으니 그만하면 됐다는 자위로 나를 달래본다. 지구 끝을 여행하고 울창한 숲을 걷고 책을 읽고 하루 10시간 책상을 지키는 일을 밥 먹듯 했으므로, 그런데 왜 나는 끝없는 갈증에 시달렸던 걸까.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주 먼 섬으로 숨어들었을 때도 너는 나를 찾았다. 그것은 아마도 네게만 들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겠지. 시도 꽃도 그러지 않을까. 지금 눈앞에 갓 피어난 꽃숭어리가 참을 수 없이 예쁘더라도 그 꽃 앞에서 지레 시들 것을 연민하는 건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거야. 지난 가을에 벼랑 끝으로 사라진 꽃들이 지금쯤 언제 그랬냐는 듯 약속을 지키기 위해 봄의 문 앞에 대기표를 들고 서있을 것이다. 지금 캄캄한 땅 속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광기가 없으면 피기도 전에 시들고 마는 것이 예술이라지. ‘적당’이란 무능한 자들이 즐겨 쓰는 변명일 뿐이다. 반은 스승이 이끌어 준다했고 반은 스스로 찾는 거라 했으니, 어떤 장르든 정점을 찍는 길은 험난하고 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스로 미치지 않으면 턱도 없다고 야유조로 말했다. 미치지 않으면 삼류도 힘들 거라고, 삶에 쫓겨 문학을 어깨 너머로 훔쳐봐야만 했던 내게 그들이 쳐놓은 금 안으로 들어가는 걸 의미하는 삼류는 꿈이었다. 그래서 지금 어떠냐 물으면 비로소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나는 한껏 독이 오른 청춘의 절망을 견디지 못해 깊은 수렁으로 뛰어든 적이 있다. 한 사람의 도움으로 그 수렁에서 건져진 후 비로소 나는 내가 떨어졌던 곳을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내 생애 가장 길고 위험한 여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쓰게 한 그는 지금 세상에 없다. 나를 깊은 수렁에서 건져준 그가 지상에 부재하므로 그간 시를 쓸 의욕마저도 놓아버리게 된 걸까. 무튼 나는 너무 먼 길을 돌아 이 자리에 서있다. 그가 사라진 후 그를 대신해 시가 내게로 왔으리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은 퍽이나 오래 유지되고 있다. 함량미달의 시를 세상에 내놓는 데는 그만한 핑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시작과 동시에 끝을 예감하는 일은 슬프다. 그러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매순간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동시에 마치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무엇으로든 끝난다는 이 분명하고 당연한 명제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심지어는 모두 끝난 후에야 그것이 끝이고 마지막이었다는 걸 간신히 자각할 때도 있으니까. 늦은 감은 있으나 그래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다시 첫날처럼 시를 받들고 모셔볼 작정이다. 




*김인자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 현대시학》 ‘시를 찾아서’로 등단.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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