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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소시집/김인자/그림자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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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소시집/김인자/그림자 외 4편
김인자
그림자 외 4편
부동으로 사는 것이
나무로 알고 있다면
그건 나무를 모른다는 말
나무가 얼마나 긴 팔과 다리를 가졌는지
얼마나 잘 눕고 일어나 멀리 걷고 달리는지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숲을 걷다 보면
건너 계곡까지 제 그림자를 밀려 끌며
신출귀몰 축지법을 쓰는 나무는
부동의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도 되고 동사도 된다
태어난 자리가 죽음의 자리인 건 맞지만
오전에는 저 나무가 이리로 건너오고
오후엔 이 나무가 저리로 건너가며
계절을 따라 자리를 바꿔 돌다가
산이 텅 비는 밤이 되어서야
제자리로 돌아와 신발을 벗고
몸을 누인다는 걸 아는 자는
그 산에 깃들어 사는 새들과
나무 그림자와 새끼 다람쥐뿐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
신문을 펴고 뜯어온 나물을 다듬을 때
눈에 들어오면 구사일생 목숨은 건지지만
겁에 질려 몸을 숨긴 녀석의 운명은 달라진다
데친 나물에 허연 배를 드러낸 애벌레를 보면
내가 이토록 잔인한 존재였나 싶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먹고 살자고
내 몸이 사주한 일을
모르쇠로 일관하려는 심사는 뭔지
침입자는 나였고 분명코 내가 저지른 일인데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아니 말이 없으니까,
한 인간의 과실로 비명횡사한 존재를 두고
끓는 물에서 사체를 건져지는 순간까지도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이 존재의 가여움
눈앞에 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애벌레의 일방 과실로
덮어씌우기까지 하는 적반하장과 몰염치
신이 인간에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참회기도를 가르친 건
그럴만 한 뜻이 있었을 게다
죄가 없다면 벌도 없겠지만
이런 경우야말로 덫을 놓고
아무도 걸려들지 않기를 바라는 일처럼
얼마나 모순적인가
누구에겐 생사가 걸려있는, 그러니까
나는 잊어도 너는 차마 못 잊는 죄
미필적 고의
몽골의 봄
몽골인들의 주식은 양고기다
양을 잡을 땐 비나 눈이 오는 날은 피한다
궂은 날에 친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봄에 양을 잡는 것도 금한다
겨우내 잘 먹이지 못한 친구를
먹이로 삼는 건 도리가 아니란다
양을 고르면 눈을 가리고 신속히 숨통을 끊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게 한다
친구의 피를 헛되게 해선 안 된다고
배가 고파도 고통스럽게 죽은 양은 먹지 않는단다
집에서 기른 가축은 가족이기 때문에
긴 겨울이 끝나고
초원 가득 야생화가 피고 나비가 날면
게르 문을 활짝 열고
양떼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들판에
온가족이 둘러서서 마두금을 켜며 긴 고음으로
대지의 신께 바치는 노래를 부르는 그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으므로
모으고 소유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으며
설령 뜻하지 않는 재해로 모든 걸 잃더라도
신의 뜻이라며 순순히 받아들인다고
육체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마침내 영혼조차 자유로워지는 유목
낡은 책갈피에 잠들어 있던 꽃잎을 깨우듯
그들의 봄은 그렇게 대지에 깃든다고
무슨 짓을 한 거니, 우리가
캥거루야,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눈은 꿈이려니 하고 감은 거겠지
그런데 입은 설마 웃고 있는 거니
아니겠지. 기가 막히단 뜻이겠지
기가 막혀서 아예 실성한 거겠지
이렇게 끝날 바엔
차라리 마지막 순간에
웃고 갈 수 있는 실성이라면
다행이지 싶기도 하고
자고 일어나니
지구 한쪽이 불바다가 되었다고
미안해할 자격조차 없는 인간들이
남의 일처럼 불구경을 하는구나
대체 우리가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니
화마에 쓰러진 소방대원들
천국을 버리고 피난길에 선 자동차 행렬
놀란 캥거루는 꼬리에 불을 달고 뛰고
뛰고 싶었겠지만 뛸 수 없었을
잠이 덜 깬 느림보 코알라는
제 집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채
눈만 멀뚱거리다 고아가 되었겠지
상상에도 없던 아득한 숫자
그렇게 죽어간 우리의 친구가 5억
여전히 불타고 있는 지구
여전히 쌓여가는 시체들
그 많은 숲속 친구들에게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설마,
신이 우리를 버린 건 아니겠지
진실
진실은,
수백 킬로미터 해저동굴
암반 속 금고에 저장된
얼음보석 같은 거라서
지구 종말이 오기 전엔
함부로 꺼내지 말라
세상엔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진실 따윈 없다
진실은 밖으로 나오는 순간
녹아버리거나
먼지처럼 사라지거나
거짓의 옷을 입고 만다
진실은,
억만 년 잠에서 깨어나
우리의 몸과 행동을 통해
아주 천천히 빛을 보여주는
몹시 귀한 원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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