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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최도선/밤 열한 시에 막차는 떠나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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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최도선/밤 열한 시에 막차는 떠나네 외 1편
최도선
밤 열한 시에 막차는 떠나네 외 1편
두고 온 것도 없는데 자주 그곳엘 가네
백화점이 있고 대형서점이 있고 넘치는 물결이 있는 곳
늦도록 어물쩍거리다 벗들은 흩어지고
막차는 떠났고 나만 홀로 도로에 우두커니 섰네
거리는 이국땅 같이 낯서네
예전에 내가 살던 이곳이
어디에 살든 영원한 곳은 없는 우리
타관은 늘 셋집살이 같네
까치
솔향기
별
달
이슬
바람
까마귀
나는 이들 곁에 잠시 머무네
이 땅에 사는 동안
나를 두고
밤 열한 시에 막차는 머뭇머뭇 떠나네
막차는 봄눈같이 늘 놓치네
자작나무
하얗게 눈이 내린 밤 내 몸피를 벗겨 편지를 쓴다. 낮에 자작나무 숲을 지나간 열차 속에서 손 흔들어주던 이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그에게 띄운다. 무엇을 보러 가는 길이냐고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냐고 당신이 사는 곳의 풍경은 어떤 색깔이냐고 그 곳의 향기는, 고통 같은 것은 없느냐고 묻는다. 나는 바람이 아니면 내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 하나도 떨어뜨리지 못한다고 하루에 두 번 이 숲을 지나가는 열차의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다고, 바람은 제 소리는 못 듣고 나무들 사이만 휘휘 휘돌아다닌다는 사실도 적는다. 그리고 내가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뉴욕, 뉴욕이라고 쓴다. 왜냐고? 언젠가 신문 한 장 날아와 내 허리에 철썩 붙었는데 거기에 타임스퀘어, 황홀한 코카콜라 전광판을 보고 그 콜라를 마셔보고 싶었어, 그리고 이 자작나무숲을 그곳에 잠시만이라도 옮겨 보고 싶어, 눈 내리는 하얀 전경까지를. 동이 트면 몸피들이 붉은 빛을 띄우는 이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을 뉴욕 한가운데 옮겨줄 수 없을까? 인간의 것이 아닌 자연의 모습을 잠시만. 안녕
*최도선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3년 《현대시학》 소시집 발표 하며 자유시 활동. 시집 『그 남자의 손』, 『겨울기억』, 『서른아홉 나연 씨』. 비평집 『숨김과 관능의 미학』. 《시와문화》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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