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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소율/고추의 본질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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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신작시/소율/고추의 본질 외 1편
소율
고추의 본질 외 1편
깜박 속았네
진보 속에 보수 있고
보수 속에 진보 있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거라고
그렇게 뒤섞여 가는 거라고
오이 같이 상큼하고 참외처럼 달달한 맛을 내는
아삭이 고추를 집어 삼키며
참 맛나다 고것 참 맛있다
감탄을 하고 있는데
어느 한 순간 한 사내처럼
벌컥 성을 내며 달려드는 고추의 본질
씨앗 안에 숨겨져 있던 그만의 본성
방심하다 깜짝 놀란 내 눈에선
눈물이 왈칵
늘 처음처럼 맨발
맨발로 오라
맨발로 들라
맨발은 행위의 시작, 늘 처음 이니라
황금빛 찬란한 쉐다곤*, 가슴이 시려오도록 맑은 눈을 가진 만들레이** 순백의 사원 앞에서 나 맨발로 선다. 한참을 차마 들지 못하다 한 발 만만하게 내어 딛는다, 발바닥 밑 감촉이 낯설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없이 뒤섞여 얽혀있을 사람들의 발바닥의 문양과 보다 간절하였을 불탑 앞 소망 그리고 축복의 염원들이 미처 하늘 위로 오르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다가 내 발바닥 밑에서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낸다
사원 밖은 온통 유리파편과 오물과 거친 눈빛들
그 길 위를 아기 탁발승마저도 맨발로 담담히 걷는
사원을 나서며 나는 처음 같은 맨발 위에
양말을 입힌다 신발을 신기운다
석양은 저물기 전 여전히 처음처럼
산마루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드는데
성급한 내 몸이 먼저 발목 삐끗하여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마침내 양 손엔 목발
그제서야 나 다시 처음처럼 맨발이 된다
*미얀마 양곤에 있는 미얀마 인人들의 최대 상징물이자 세계 불자들의 성지순례지로 유명. 1990년대부터 미얀마 역대 왕과 불교도들이 기증한 금판으로 외벽을 장식하면서 지금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뒤덮인 세계적 불교유적지로 자리매김 됨.
**19세기 영국군에게 점령당한 미얀마 마지막 왕조의 수도. 그곳엔 황혼기 목조다리의 풍경으로 유명한 우베인 브릿지가 있고 순백의 사원인 산다무니 파고다, 쿠도도 파고다 등이 있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소율 (본명 김희경) 1994년 《예술세계》로 등단. 시집 『브래지어가 작아서 생긴 일』 , 『내 얼굴 위에 붉은 알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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