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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책·크리틱/김유석/크로키croquis, 즉흥성의 발랄한 변주 ―정령 시집 『자자, 나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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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책·크리틱/김유석/크로키croquis, 즉흥성의 발랄한 변주 ―정령 시집 『자자, 나비야』
김유석 시인
크로키croquis, 즉흥성의 발랄한 변주 ―정령 시집 『자자, 나비야』
치밀한 묘사나 감각, 상상의 확장을 통해 텍스트를 끌어가는 시류詩類에 비해 『자자, 나비야』는 조금 다른 양상의 시편들을 펼쳐 보인다. 우선, 두 편의 시를 읽어보자.
별을 세다가 야옹, 열을 셀 때마다 야옹,
생쥐를 세다가 야옹, 열 마리 셀 때마다 야옹,
백 마리 못 세고 음냐옹, 눈꺼풀이 처량하다.
밤새 고양이가 찍어놓은 발도장 위로
별들이 내려앉고 생쥐들은 잔치를 벌인다.
생쥐들이 놀라다가 아니다가 별들이 웃는다.
눈꺼풀 간신히 붙잡았다가 호되게 당겼다가
야옹, 잡히지 않는 잠의 꼬리를 물고 간다.
-「고양이가 물고 간 잠」 전문
눈치를 보니 안됐다 싶은 얼굴로
게가 무슨 일 하냐고 물으면
옆으로 걸으며 도망을 한다고 해두자.
도망을 가며 놀 게 뭐가 있나 걱정 되는 얼굴로
구체적으로 왜 도망을 가냐고 궁금해 하면
게는 옆으로 걸으며 즐겁게 논다고 해버리자.
게들끼리 다리 수 세기도 하고 숨은 내장과 알 찾기도 하고
흰 살이 되는 상상도 하고 좋은 낚시 밥도 기다리고 껍데기
태 모양도 서로 보고 소리 없는 숨소리도 바꿔보고 줄줄줄
할 게 넘친다 하자.
게들이 물방울도 뿜으며 모래알을 동그랗게 굴리는 걸 보고
왜 저러나 했더니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맞서자.
요즘 게들은 게들끼리 잘 살아간다 치자.
-「게들끼리 요즘은」 전문
작품에서 느껴지듯 대상을 빌어 드리우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정령을 읽으려 한다면 약간의 착오가 생길 법하다. 이미지를 통한 감정의 전이를 노리거나 겹겹의 상상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회하는 익숙한 텍스트들과는 자못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용한 시에는 이렇다 할 비유가 없다. 정교한 치사나 감각도 눈에 띄지 않는다. 주제의 노출 없이 대상만으로 끝까지 시를 몰아가고 있다.
「고양이가 물고 간 잠」에는 고양이 한 마리뿐 여타의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양이 한 마리를 빌어 잠 못 드는 화자의 정황을 비몽사몽 끌어가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 고양이조차 아무런 치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수염이나 눈동자, 색깔 등을 묘사하여 주제에 근접하는 시들과는 별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별’은 시공간을, ‘생쥐’는 고양이와의 대척점으로 등장 할 뿐 전체의 의미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평범한 고양이 한 마리가 시를 이끌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이 꽤 흥미롭게 주목을 끄는 까닭은 단순함의 변주에 있다. 운율을 타고 들려오는 의성어 “야옹”이 바로 그러하다. 1연의 반복적인 의성어는 청각적이면서도 시각적이라 할 만한데 청각적 측면에서는 점점 작아지는 느낌의 소리로 다가오고 시각적으론 졸린 고양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겠다. 시의 흐름을 따르자면 들 듯 말 듯 잠을 뒤척이는 고양이가 있다. 별을 세고 생쥐를 세다가 깜박 잠들라 치면 잠 속에서 생쥐가 뛰쳐나와 고양이를 깨우는데 생쥐들은 곧 고양이의 상념에 다름 아니다. 밤새 반복되는 이런 정황을 함축하는 의성어가 3연의 “야옹”이며 끝내 “잡히지 않는 잠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게들끼리 요즘은」도 유사하다. 게와 게들의 생태로 이뤄진 구성이 그렇고 각별이 눈여겨야 될 만한 정치精緻없이 건듯 건듯 행과 연을 뛰어넘어 지탱해나가는 묘한 문장의 활력이 또한 그렇다. 요약하자면
옆으로 걷는 게를 화자는 도망중이라 설정한다. 도망하는 것은 노는 모습으로 치환되고 그 놀이라는 것이 지극히 자연한 게들의 생태임을 밝힌다. 곧, ‘자기로부터의 도피’처럼 살아가는 게들의 삶을 ‘안됐다’ 싶은 얼굴로 대하는 화자를 만날 수 있겠는데 이 작품을 읽는 재미는 “해두자” “해버리자” “하자” “치자”로 변주되는 종결어미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칫 단순해지려는 시의 흐름을 환기해 다음으로 호흡을 가다듬는 역할을 수행하며 발랄한 걸음을 놓는다.
정령 시 읽기의 묘미 중 하나는 아마도 이런 재치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재치는 자연스럽고 천진해 보인다. 애써 억지스럽거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려 들지 않는다. 그런 감각은 어디서 길어진 것일까, 시집을 되짚어 읽으면 미시적 관찰보다 거시적 전망을 따르는 그의 시선과 마주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그의 시편들은 굵은 질감의 선을 이룬다. 대상의 이미지나 섬세한 부분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전체의 그림을 한눈에 본다. 크로키croquis하듯 대상과 정황들을 한 편의 시 속에 담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그리고 안 보이는 것은 행간에 묻어 둔 채 딴전부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즉흥성이 필경 그의 시작법 같아 보인다. 이 경우 필요한 요소는 언어의 활용인데 「자자, 나비야」는 그 점을 관통하고 있으며 그의 주된 개성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주에 조각배를 띄우고 신들이 모여 사는 별로 가는 거야
거기서 신들이 가꾸는 푸른 꽃밭에 한 올 머리칼을 시는 거
지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푸른 꽃밭에 물을 뿌리고 신들이
춤을 추면 까딱까딱 머리칼에서 꼬물거리는 뱀이 혀를 날름
대다가 춤을 추던 신들의 발목과 허리와 온몸을 서리서리
감아 올라가지 별이 흔들리고 달이 흔들거리고 우주가 흔들
려 기우뚱거리면 네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한 번 더 던져보
는 거야 출렁거리는 우주가 잠잠해지면 바로바로 푸른 꽃들
이 나풀나풀 꽃잎을 떨구고 서서히 몸이 풀린 신들이 안도의
숨을 뱉지 뱉어낸 숨으로 뱀들이 푸른 꽃밭에 알을 낳으면
떨어진 꽃잎이 알을 품지 춤추던 신들이 입김을 뱉을수록
알들은 커지고 뱀들은 허물을 벗고 더 커지지 다 자란 뱀들
은 신들의 입김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거야 그 순간 냉큼 별
을 낚고 달을 낚고 우주를 낚는 거지 그때 너는 나를 낚아.
-「낚시」 전문
다른 또 하나의 개성은 주제의식에 천착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집 전반부에 실린 여러 편의 작품에서 화자의 의도를 선명하게 밝히기란 쉽지 않다. 정황만이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하거나 내버려두듯 대상들의 표면을 스치는 느낌들이 짙다. 마치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반투명의 창에 가려진 화자의 그림자를 대하는 듯한데 시가 의미의 전달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의 텍스트들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즐거움을 너그러이 허용한다.
‘시적 순간’이란 말이 있다. 대상과 마주치는 순간 느끼는 시인의 감각을 그렇게 일컫는다.
그로부터 시는 시작되며 시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설정되었음을 뜻한다. 감각과 의미가 부합되었을 때 시의 흐름은 자연스럽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이야기 할까, 고민하는 경우도 많다. 어쨌거나 설정된 의미를 구체화 하는 일이 대체의 시작詩作임에 틀림없으며 주제를 의식하지 않는 시는 그리 흔치 않다.
여기서 정령은 고개를 잠시 갸웃하게 한다. 주제에 연계하여 난해하다거나 의식이 희박하다는 뜻이 아니다. 먼저 인용한「고양이가 물고 간 잠」은 보이는 그대로 읽어도 무방하고 「게들끼리 요즘은」은 ‘게’를 ‘사람’으로 치환해 애환의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시니컬cynical하게 그려 볼 수 있을 터다. 신화적 상상에 몽상의 감각을 입힌「낚시」의 예는 좀 까다롭지만, 미리 의도한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대상들을 몰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시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음이 적시된다.
주제를 의식하기 보다는 비우기에 오히려 가깝다 할 것인데 「낚시」가 그 하나의 예시이다. “우주에 조각배를 띄우고 신들이 모여 사는 별로 가는 거야” 이 한 행으로 시는 끝난다. 나머지는 즉흥적 상상의 파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목이 꼭 「낚시」일 까닭이 없으며 의미론을 염두하고 시를 읽을 필요 또한 없겠다. 양떼를 따르는 양치기처럼, 겹치고 상충하는 언어들을 따라 설정되지 않은 의식 속으로 잠입하면 그만이다.
이렇듯 ‘무의미,적인 감각과 즉흥적인 언어의 활용을 정령의 개성으로 지적하기에 충분하다. 미학의 관점을 더한다면 일찍이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를 고민했던 <대여 김춘수>선생의 시학을 조심스럽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빛깔에 끌리기로 하자 아침에는
주홍빛의 능소화 노란 금계국 붉디붉은 찔레
빙빙빙 후리며 돌다보니 겨드랑이가 결린다.
날갯죽지가 뻑뻑하다.
향기를 따르기로 하자 저녁에는
붉은 장미 바라보다가 코가 따갑다.
목련꽃 핀 자리에는 아련한 어머니의 냄새
고상하다는 튤립 옆에서 어깨를 편다.
옆집 누이 치마 속이 궁금해지는 명자꽃 정강이가 가렵다.
달개비꽃길 따라 맴맴 돌다가
보르르 날개를 접고 숨을 고른다.
-「자자, 나비야」 전문
아련하게 아름다운 이 시를 음송하면서 하나 더 사족을 달자면 시속에 속속 등장하는 꽃들의 의미일 것이다. 시제부터 문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초들이 화자에게 호명된다. 상사화 채송화 코스모스 모란, 한련화 쑥부쟁이 군자란 홀아비바람꽃 산머루 등등 꽃은 이 번 시집의 주된 대상을 이룬다. 그 꽃들의 이미지를 한데 모아 꾸민 꽃밭이 아마 위 작품일 테고 그래서「자자, 나비야」를 시집 제목으로 간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꽃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꽃은 정령의 감흥에 저절로 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꽃들은 그의 뒤안길을 따라 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에 있어 꽃의 정체란 그가 돌아 온 삶들과 여러모로 닮아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짚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과거 회귀적인 자위로써의 꽃이 아니라 현재의 삶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진행 중인 기억을 조명하는 상징의 대상이란 점이다. 그것을 한 폭으로 담아낸 작품이 표제가 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그의 의식일지 모른다. 이는 앞서 상재한 두 권의 내용을 짐작케 하기도 하는데 두 개의 가치관이 어려 있는 이번 시집은 그의 시세계에 있어 어떤 분기점을 이루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든다.
정령의 다음 장에는 어떤 꽃들이 피어날지, 한껏 자유롭게 발현될 열정의 폭에 대한 기다림이 은근하다.눈치를 보니 안됐다 싶은 얼굴로
게가 무슨 일 하냐고 물으면
옆으로 걸으며 도망을 한다고 해두자.
도망을 가며 놀 게 뭐가 있나 걱정 되는 얼굴로
구체적으로 왜 도망을 가냐고 궁금해 하면
게는 옆으로 걸으며 즐겁게 논다고 해버리자.
게들끼리 다리 수 세기도 하고 숨은 내장과 알 찾기도 하고
흰 살이 되는 상상도 하고 좋은 낚시 밥도 기다리고 껍데기
태 모양도 서로 보고 소리 없는 숨소리도 바꿔보고 줄줄줄
할 게 넘친다 하자.
게들이 물방울도 뿜으며 모래알을 동그랗게 굴리는 걸 보고
왜 저러나 했더니 그걸 몰라서 묻느냐고 맞서자.
요즘 게들은 게들끼리 잘 살아간다 치자.
-「게들끼리 요즘은」 전문
작품에서 느껴지듯 대상을 빌어 드리우는 의미를 염두에 두고 정령을 읽으려 한다면 약간의 착오가 생길 법하다. 이미지를 통한 감정의 전이를 노리거나 겹겹의 상상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회하는 익숙한 텍스트들과는 자못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용한 시에는 이렇다 할 비유가 없다. 정교한 치사나 감각도 눈에 띄지 않는다. 주제의 노출 없이 대상만으로 끝까지 시를 몰아가고 있다.
「고양이가 물고 간 잠」에는 고양이 한 마리뿐 여타의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양이 한 마리를 빌어 잠 못 드는 화자의 정황을 비몽사몽 끌어가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 고양이조차 아무런 치장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수염이나 눈동자, 색깔 등을 묘사하여 주제에 근접하는 시들과는 별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별’은 시공간을, ‘생쥐’는 고양이와의 대척점으로 등장 할 뿐 전체의 의미에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평범한 고양이 한 마리가 시를 이끌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이 꽤 흥미롭게 주목을 끄는 까닭은 단순함의 변주에 있다. 운율을 타고 들려오는 의성어 “야옹”이 바로 그러하다. 1연의 반복적인 의성어는 청각적이면서도 시각적이라 할 만한데 청각적 측면에서는 점점 작아지는 느낌의 소리로 다가오고 시각적으론 졸린 고양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겠다. 시의 흐름을 따르자면 들 듯 말 듯 잠을 뒤척이는 고양이가 있다. 별을 세고 생쥐를 세다가 깜박 잠들라 치면 잠 속에서 생쥐가 뛰쳐나와 고양이를 깨우는데 생쥐들은 곧 고양이의 상념에 다름 아니다. 밤새 반복되는 이런 정황을 함축하는 의성어가 3연의 “야옹”이며 끝내 “잡히지 않는 잠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게들끼리 요즘은」도 유사하다. 게와 게들의 생태로 이뤄진 구성이 그렇고 각별이 눈여겨야 될 만한 정치精緻없이 건듯 건듯 행과 연을 뛰어넘어 지탱해나가는 묘한 문장의 활력이 또한 그렇다. 요약하자면
옆으로 걷는 게를 화자는 도망중이라 설정한다. 도망하는 것은 노는 모습으로 치환되고 그 놀이라는 것이 지극히 자연한 게들의 생태임을 밝힌다. 곧, ‘자기로부터의 도피’처럼 살아가는 게들의 삶을 ‘안됐다’ 싶은 얼굴로 대하는 화자를 만날 수 있겠는데 이 작품을 읽는 재미는 “해두자” “해버리자” “하자” “치자”로 변주되는 종결어미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칫 단순해지려는 시의 흐름을 환기해 다음으로 호흡을 가다듬는 역할을 수행하며 발랄한 걸음을 놓는다.
정령 시 읽기의 묘미 중 하나는 아마도 이런 재치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의 재치는 자연스럽고 천진해 보인다. 애써 억지스럽거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려 들지 않는다. 그런 감각은 어디서 길어진 것일까, 시집을 되짚어 읽으면 미시적 관찰보다 거시적 전망을 따르는 그의 시선과 마주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그의 시편들은 굵은 질감의 선을 이룬다. 대상의 이미지나 섬세한 부분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전체의 그림을 한눈에 본다. 크로키croquis하듯 대상과 정황들을 한 편의 시 속에 담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그리고 안 보이는 것은 행간에 묻어 둔 채 딴전부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즉흥성이 필경 그의 시작법 같아 보인다. 이 경우 필요한 요소는 언어의 활용인데 「자자, 나비야」는 그 점을 관통하고 있으며 그의 주된 개성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우주에 조각배를 띄우고 신들이 모여 사는 별로 가는 거야
거기서 신들이 가꾸는 푸른 꽃밭에 한 올 머리칼을 시는 거
지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푸른 꽃밭에 물을 뿌리고 신들이
춤을 추면 까딱까딱 머리칼에서 꼬물거리는 뱀이 혀를 날름
대다가 춤을 추던 신들의 발목과 허리와 온몸을 서리서리
감아 올라가지 별이 흔들리고 달이 흔들거리고 우주가 흔들
려 기우뚱거리면 네 머리에 난 머리카락을 한 번 더 던져보
는 거야 출렁거리는 우주가 잠잠해지면 바로바로 푸른 꽃들
이 나풀나풀 꽃잎을 떨구고 서서히 몸이 풀린 신들이 안도의
숨을 뱉지 뱉어낸 숨으로 뱀들이 푸른 꽃밭에 알을 낳으면
떨어진 꽃잎이 알을 품지 춤추던 신들이 입김을 뱉을수록
알들은 커지고 뱀들은 허물을 벗고 더 커지지 다 자란 뱀들
은 신들의 입김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거야 그 순간 냉큼 별
을 낚고 달을 낚고 우주를 낚는 거지 그때 너는 나를 낚아.
-「낚시」 전문
다른 또 하나의 개성은 주제의식에 천착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집 전반부에 실린 여러 편의 작품에서 화자의 의도를 선명하게 밝히기란 쉽지 않다. 정황만이 조금씩 변주되며 반복하거나 내버려두듯 대상들의 표면을 스치는 느낌들이 짙다. 마치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반투명의 창에 가려진 화자의 그림자를 대하는 듯한데 시가 의미의 전달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의 텍스트들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는 즐거움을 너그러이 허용한다.
‘시적 순간’이란 말이 있다. 대상과 마주치는 순간 느끼는 시인의 감각을 그렇게 일컫는다.
그로부터 시는 시작되며 시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설정되었음을 뜻한다. 감각과 의미가 부합되었을 때 시의 흐름은 자연스럽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이야기 할까, 고민하는 경우도 많다. 어쨌거나 설정된 의미를 구체화 하는 일이 대체의 시작詩作임에 틀림없으며 주제를 의식하지 않는 시는 그리 흔치 않다.
여기서 정령은 고개를 잠시 갸웃하게 한다. 주제에 연계하여 난해하다거나 의식이 희박하다는 뜻이 아니다. 먼저 인용한「고양이가 물고 간 잠」은 보이는 그대로 읽어도 무방하고 「게들끼리 요즘은」은 ‘게’를 ‘사람’으로 치환해 애환의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시니컬cynical하게 그려 볼 수 있을 터다. 신화적 상상에 몽상의 감각을 입힌「낚시」의 예는 좀 까다롭지만, 미리 의도한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대상들을 몰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사한 시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음이 적시된다.
주제를 의식하기 보다는 비우기에 오히려 가깝다 할 것인데 「낚시」가 그 하나의 예시이다. “우주에 조각배를 띄우고 신들이 모여 사는 별로 가는 거야” 이 한 행으로 시는 끝난다. 나머지는 즉흥적 상상의 파생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제목이 꼭 「낚시」일 까닭이 없으며 의미론을 염두하고 시를 읽을 필요 또한 없겠다. 양떼를 따르는 양치기처럼, 겹치고 상충하는 언어들을 따라 설정되지 않은 의식 속으로 잠입하면 그만이다.
이렇듯 ‘무의미,적인 감각과 즉흥적인 언어의 활용을 정령의 개성으로 지적하기에 충분하다. 미학의 관점을 더한다면 일찍이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를 고민했던 <대여 김춘수>선생의 시학을 조심스럽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빛깔에 끌리기로 하자 아침에는
주홍빛의 능소화 노란 금계국 붉디붉은 찔레
빙빙빙 후리며 돌다보니 겨드랑이가 결린다.
날갯죽지가 뻑뻑하다.
향기를 따르기로 하자 저녁에는
붉은 장미 바라보다가 코가 따갑다.
목련꽃 핀 자리에는 아련한 어머니의 냄새
고상하다는 튤립 옆에서 어깨를 편다.
옆집 누이 치마 속이 궁금해지는 명자꽃 정강이가 가렵다.
달개비꽃길 따라 맴맴 돌다가
보르르 날개를 접고 숨을 고른다.
-「자자, 나비야」 전문
아련하게 아름다운 이 시를 음송하면서 하나 더 사족을 달자면 시속에 속속 등장하는 꽃들의 의미일 것이다. 시제부터 문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초들이 화자에게 호명된다. 상사화 채송화 코스모스 모란, 한련화 쑥부쟁이 군자란 홀아비바람꽃 산머루 등등 꽃은 이 번 시집의 주된 대상을 이룬다. 그 꽃들의 이미지를 한데 모아 꾸민 꽃밭이 아마 위 작품일 테고 그래서「자자, 나비야」를 시집 제목으로 간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꽃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꽃은 정령의 감흥에 저절로 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꽃들은 그의 뒤안길을 따라 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에 있어 꽃의 정체란 그가 돌아 온 삶들과 여러모로 닮아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짚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과거 회귀적인 자위로써의 꽃이 아니라 현재의 삶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진행 중인 기억을 조명하는 상징의 대상이란 점이다. 그것을 한 폭으로 담아낸 작품이 표제가 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그의 의식일지 모른다. 이는 앞서 상재한 두 권의 내용을 짐작케 하기도 하는데 두 개의 가치관이 어려 있는 이번 시집은 그의 시세계에 있어 어떤 분기점을 이루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든다.
정령의 다음 장에는 어떤 꽃들이 피어날지, 한껏 자유롭게 발현될 열정의 폭에 대한 기다림이 은근하다.
*김유석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상처에 대하여』. 『놀이의 방식』. 리토피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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