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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책·크리틱/정기석/이행passage: 다른 상태로 옮아감 ―허진석,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파란,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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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책·크리틱/정기석/이행passage: 다른 상태로 옮아감 ―허진석,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파란, 2019)
정기석 시인
이행passage: 다른 상태로 옮아감 ―허진석,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파란, 2019)
비간Bi Gan 감독의 영화 『지구 최후의 밤』(2019)의 인트로에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난 꿈을 꾸는 동안 늘 의심한다. 내 몸이 수소로 된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내 기억력은 돌로 만든 게 틀림없다.” 꿈속에서 몸이 가벼운 기체처럼 유체이탈 하는 데 비해, 기억력은 어떤 대상에 단단히 정박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는 비유이다. 이에 빗대자면,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에서 기억은 몸에 ‘나사못’(「시인의 말」)으로 박혀 있다. 그것은 “돌 박힌 자리”(「신경통」)이고 “옆구리에 새겨진 찰나의 터널”(「옆구리에 대한 궁금증」), “척추에 심어 둔 구리 막대기”(「연안 부두에서」)이다.
양철로 접은 날개를 달고
모르는 곳을 날아다니다가
엔진이 아파 내려왔다
왼쪽 젖꼭지에 해 박은
나사못 하나가 튀어나왔다
-「시인의 말」
‘시인의 말’은 《현대시학》(2019년 5-6월호)에 발표된
「사이보그2」라는 제목의 시의 일부이다. 부분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한다. 비행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이동이지만, 비행의 감각은 ‘나’의 몸과 비행기 사이의 변이를 만들기도 한다. 비행-이동하며 ‘나’는 ‘비행-사이보그’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행은 신체가 정주하고 있을 때에도 일어난다. “잠들 무렵” “내 집”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쯤은/들을 줄” 아는 것처럼(「집 안의 집」), 집 안에 있을 때 내 ‘몸’은 ‘집’이 되기도 하니까. 다른 시공의 세계로의 횡단과 몸의 변이 등 이행은 동시적이고 전全방위적이다. 비행의 감각으로 비행-사이보그가 되는 식의 이행은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난다』 곳곳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이행에는 대상으로의 감각 전이와 ‘나’에 대한 망각이 전제된다. 우리는 사실 늘 그런 중이다. 무언가를 하면서 우리가 하는 무엇으로 변하거나, 먼 곳을 바라보면 이미 거기 가 있기도 하니까.
튀어나온 ‘나사못’은 기억의 트리거trigger이다. 상처의 흔적들은 기억 속 어딘가로 이행하게 한다. 동시에 몸 곳곳의 상처들은 지금-여기의 몸을 감각하게 한다. 지금 여기에서 아프다. 어딘가 어긋나서 발현된 증상이 지금-여기를 환기하고 동시에 ‘나’는 다른 언제-어딘가로 소환된다. 모든 이어짐은 어긋남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나사못으로 인해 지금을 감각하고 다른 곳으로 이행하는 일, 이것은 동시에 일어난다. 과거에 다친 곳의 흔적이 지금 아픈 만큼, 통증은 과거와 지금을 잇는 “찰나의 터널”이 된다. ‘나’의 통증으로 이어진 다른 곳에 ‘네’가 있다. ‘나’의 통증이 ‘너’를 느끼게 한다. “살아가는 모든 나날”과 “스쳐 가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너의 일부”를 만나고 겪는 일이다(「백년 동안의 고독」).
물론, 최초의 통증은 ‘나’를 확인하는 최소한의 증상이다. 나사못은 시야의 프레임을 편성하는 최소치의 참조점이다. 시공의 거대한 차원에서 “무한을 현시하려면 최소치의 건축, 즉 모서리와 칸막이, 가장자리의 기예가 필요”하다.(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색채 속을 걷는 사람』, 이나라 옮김, 현실문화A, 2019, 75쪽.)
광대한 세계의 크기와 광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쉽게 잊고 잊힐 수 있으니까. 나이를 먹고 몸은 삐걱거리고 그리고 어느새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행성의 한 구석에 ‘작대기’를 박는다. “통영 앞 포구”와 “칠보산 기슭”에 ‘작대기’를 하나씩 꽂으면 “세상의 덩치를 잴 수”도 있는 것이다(「월식」). 이때 측정되는 것은 세상의 크기이면서, ‘내’가 있는 시공간의 좌표이기도 하다. 다른 세계를 보고 그곳으로 이행하기 위해 발 딛는 이곳의 좌표점 같은 것, 혹은 “노을 가장 붉은 날/우주의 폭풍과/시간의 포효”를 문득 깨닫는 것처럼, “심장을 걸어”(「극지極地」) 두는 표지 같은 것이다.
시간이 끓어오른다, 진공 속을 질주한다
지상의 눈금을 지나쳐 지구의
이쪽과 저쪽을 꿰뚫는다, 혈액이 달리는 터널에선
소리가 나지 않는다
-「체온을 재다」 부분
허진석 시인의 감각적 이행은 일상의 소소하고 작은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다른 세계와의 접점은 지근거리에 있는 다양한 접촉으로 만들어진다. 그저 ‘체온계’로 체온을 재면서 지구의 “이쪽과 저쪽”을 뚫으며 “우주”까지 사유가 뻗친다. 달빛 아래 건너는 육교에서 “달 표면을 걷는 사람들”의 발에 달린 ‘바퀴’를 감각하고(「삼성역에서 돌아오다ㅡ김포 시편 23」), 그저 저울 위에 서서 몸무게를 재면서도 지구의 위도에 따른 중력을 가늠하고(나의 비겁ㅡ김포 시편 32), 냉탕에 흘러넘치는 물에서 ‘이승’ 너머를 감각하는(「레테」) 이행들, 넘나듦들. 일상의 눈앞에 보이는 것들 너머에 행성이 있고, 우주가 있으며, 생명 너머의 저 세계가 있다.
나사못·작대기가 만들어내는 이행의 통로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과 빛이 지나온 진공과 어둠만큼 아득한 거리를 넘고 이승과 저승을 잇는다. “딱 그만큼 삶과 죽음은/연줄이 닿는다”(「슈바르츠발트」). 때로는 눈을 화하게 밝히는 빛줄기도 눈을 찌르는 이러한 나사못이 된다. 비행 중에 보는 성층권의 빛들, 북극을 횡단하는 오로라, 혹은 황혼을 오래 보면 그 건너 명왕성도 보인다. 그 길-기억들이 어둠과 진공을 지나는 여정의 이정표가 되어, 성층권 황혼의 빛 속에서 명왕성pluto, 명부冥府 의 땅, 저승까지 건너다보이는 것이다. 다른 세계의 좌표에는 한계가 없어서, 먼 과거와 어떤 미래, 이승과 저승 뿐 아니라 “미처 보지 못한 기억마저”(「성층권의 황혼」) 재생된다.
반딧불이의 푸른빛이
별똥별 긴 꼬리가 가로지른다.
과거가 미래를
현실이 미지未知를 만나고 있다.
만 년 천 년 백 년 전의 기억과
몇 분 전의 불빛과
현재의 생명이 빛으로 만나 이 계절을
이야기한다.
-「산정의 호수」 부분
나사못 혹은 작대기를 붙들면, 그 뒤에 물러나 있는 세계의 크기와 “물들지 않”는 시간의 면면부절을 볼 수 있다. 감각할 수 있다. 또한 반딧불이와 별똥별의 긴 꼬리를 겹쳐보듯 미소微小한 것으로부터 이행하는 광대한 것을 통해 ‘다른’ 세계를 감각할 수 있다. 온몸이 삐걱거리는 만큼 “아픈 곳이 모두 기억나”지만, 그중 유달리 아픈 구석이 있다. 하필이면 왼쪽 가슴팍에 박힌 것들, 예컨대, “가장 아름다웠던 목숨 두어 개”(「KLM으로 귀국하다」), “이십대의 알몸뚱이들”(「보덴제 1」), 또는 어머니(「산정의 호수」 외). 시인에게 인간의 본령이란, 그 인간이 철갑을 둘렀건 좀비이건 간에 ‘기억’을 통해 “그리워하는” 존재다(「사이보그」). “기어코 너를 만나리라는/오래된 다짐”, “이토록 지독한 약속”이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을 낸다(「오로라」).
하지만 접점은 시인의 기억 속 그리움의 대상에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다른 세계 혹은 세계의 어두운 구석과 미지 어디든 그 삶의 아픈 곳을 감각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만 년 천 년 백 년 전의 기억과/몇 분 전의 불빛”이 만난다. 황현산 선생이 말했던 바,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된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난다, 2016, 204-5쪽.
다른 시공, 다른 세계로의 이행 가능은 시인의 감수성이 가진 현재의 두께이며 발 디딘 곳의 넓이이다. 보도블록 사이에 돋은 “질경이”를 통해 ‘1980년대’를 보고(「연안부두에서」)이기도 하고, 새벽녘 신호등 앞의 여성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보기도 한다(「루시」).
시인은 온 하늘에 넘실거리는 이행의 ‘기미’를 통해(「오로라」), 이미 지났던 진공의 어둠이나 미지를 감각한다. 이 통로를 통해, 기미를 통해, 상처를 통해, 이승과 저승을 오가고, 이편과 저편의 세계를 본다.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것은 세계의 곳곳을 함께 아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아픈 곳’을 통해 “우리는 발그레한 얼굴로 이렇게 마주 보고” “우주의 이편과 저편, 삶과 죽음의 경계 가장 먼 곳에서 설핀 눈빛을 나눠” 가진다(「머리말」).
*정기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경희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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