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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시/최금진/사랑을 잃고 천국 미용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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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423회 작성일 13-03-01 15:37

본문

사랑을 잃고 천국 미용실 외 1편

 

 

혼자서 거울을 만나는 것은 왜 아직도 두려운가

미용실에 가면, 나의 정체를 밝혀준 너는 이제 없고

불면증이 시커멓게 자란 장발의 나만 남아

잘려나가고, 깎여나가고, 떨어져나간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가위가 커다란 입을 벌려 세련된 현대인의 삶에 대해 설교하고

레이디경향 사십 쪽,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이르지 못하니

머리카락이 귀찮으면 목을 잘라내는 것도 괜찮을까요

세례를 받는 사람처럼 머리에 물 스프레이가 뿌려지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너의 망아지가 되어

섬과 별들과 안개를 물어다가 너의 외양간을 꾸며줄 텐데

머리에 대해 지나치게 경건한 여자 미용사로부터

어때요, 새로운 스타일로 한 번 살아보시겠어요?

신탁처럼 계시를 받았을 때

나는 가위를 임신한 어리석은 계집애처럼 찔끔찔끔 울었던가

이십 년도 더 넘은 이야기, 찢어버린 편지처럼 지워진 이야기

나는 어쩌다 부쳐지지 못하고 아직도 나를 읽고 있는가

전학 온 아이처럼 낯설게 미장원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반짝이는 면도칼을 들고 서 있던 긴 생머리의 하나님이

내 생활을 캐묻고,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납작한 뒤통수를 바라보는 참 쓸쓸한 기분

레이디경향, 육십오 쪽, 당신의 삶은 당신의 잘못

레이디경향, 구십이 쪽, K군의 은밀한 고백, 나는 사생아

사랑이 없는데, 세상이 예뻐 보일 수 있을까

한 달에 한 번은 들러서 커트도 하고, 염색도 하고

가운을 입고 의자에 앉아 멍하게 자신을 보며 살라고

이것은 절대 비유가 아니라고 싹둑싹둑

내 말대꾸를 잘라내는 미용실 원장님, 고개 좀 똑바로 들어요

거울을 보면 희끗희끗 늙어버린 내가 우습고

이 얼굴을 평생 의지하고 살아야 할 나는, 사랑도 없이 미용실에

 

 

 

 

개미귀신

 

 

사랑도 없이 멀쩡한 귀신이 되어가는 세월

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짧은 건 아닐까

비겁을 횃불처럼 들고 찾아가는 산82-5번지 모래 사원

해골을 주렁주렁 목에 걸고 누운 개미귀신이란 놈은

시체애호증이 있어서

집 가까운 곳에 뼈다귀만 남은 것들을 파묻어 둔다

침침한 눈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듯 언어를 골라내기엔

너무 늦은 저녁,

책임감도 없이 먹다 남은 혼잣말을 마저 먹는다

슬픔은 항상 기계적으로 씹히고

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불행한 건 아닐까

미쳤다고 말하는 자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자도 없는데

낡은 수도복을 입은 개미귀신들만

모래 속으로 장엄하게 몰려간다

모래로 샤워를 하면서

부스스, 사라지는 모래의 언어를 만져본다

제 몸과 섹스할 일밖에 남지 않은 지옥

폐허로 지은 이 집에서

시를 쓰기엔 너무 캄캄한 모래 구덩이에서

죽은 언어들을 해골처럼, 염주처럼 대롱대롱 목에 걸고

귀신으로 살기엔 너무 예쁜 시 한 줄을

퉤, 하고 뱉어내는, 당최 입맛이 없는……

 

최금진∙2001년 ≪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시인상. 시집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오장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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