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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시/김중일/나인핀스의 밤에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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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732회 작성일 13-03-0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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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핀스의 밤에 외 1편

 

 

나의 몸에는 총 아홉 가지의 다른 색깔이 있다.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단지 아홉 가지 빛깔의 죄악으로 내가 도색되어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열 손가락을 구부리며 가만히 내 잘못을 떠올리는 밤에, 마지막 한 가지가 기억나지 않을 때의 기분. 나는 정말 죄짓는 기분이 되어, 그 죄짓는 기분으로 나머지 한 가지를 슬쩍 채워놓곤 하던 밤에.

검은 안대를 한 안개의 밤에. 아홉 개의 양초처럼 쓰러진 그림자들을 일으켜 세워 놓은 밤에. 아홉 개의 태양을 번갈아 바꿔 입으며 도열해 있는, 쓰러져 나뒹굴어 마땅한 아홉 명의 이교도의 밤에. 내가 몸을 최대한 작고 둥글게 말고 단단한 공처럼 서서히 그러나 단호하게 그들에게 몸을 굴리는 나인핀스의 밤에. 달을 가리키던 내 손가락 하나를 누가 베어간 밤에. 아홉 손가락의 밤에. 나를 포함해 누구도 사라진 한 개의 캔들핀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 밤에. 하나의 촛불만 더 있었더라면, 마저 읽을 수도 있었던 문장들의 밤에. 잃어버린 내 문장들의 밤에. 불가피한 불문율의 밤에. 씻어 낼 수 없는 단 하나의 밤에. 시커멓게 먹칠 된 거울의 밤에. 아홉 가지 서로 다른 색깔로 덧입혀져, 결국 시커멓게 먹칠 된 알몸의 밤에.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티켓이 개찰되기 전에 출발한 불타는 열차의 밤에. 죽은 자의 인중 위에 고요히 올려진 잃어버린 캔들핀의 밤에.

태양의 반대쪽, 깊은 잠 속의 사람들이 동시에 물구나무를 서는 밤에. 그리하여 지구를 아홉 개의 촛불로 밝혀진 태양계라는 레일 위로 한 번쯤 힘껏 굴려 보는 밤에. 캔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밤에. 나뭇잎을 귀 대신 붙이고 배회하는 몽유병자들의 밤에. 캔들, 캔들 숨길 수 없는 딸꾹질의 밤에, 캔들, 캔들, 캔들 일렁이는 빨간 아홉 치마들의 밤에.

기어이 개인적 다짐이, 처음으로 현실이 되어 내가 누군가를 버린 밤에, 나인핀스의 밤에.

 

 

 

 

코러스맨

 

 

내가 마이크를 잡고 보니, 이미 사방이 노래 부르고 있었다. 나 아닌 모든 것들이 모두 모여 합창 중이었다. 바람이 나뭇잎과 매일 손뼉 치듯 단조로운 박수의 노래. 낯선 자로부터 내 이름 석 자가 불려진 이후, 나는 그 노래의 사이사이 코러스처럼 불려졌다. 흥얼거리듯 나는 불려졌다. 커다란 손바닥의 노래들은 나를 한 손에 거머쥐고 공중으로 한없이 끌고 올라가더니 돌연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 방울의 빗방울처럼 적하 지상으로 스며들었다.

방금 전 지루한 장마의 끝머리에서 누가 돌연 나타나 박수를 단 한 번 쫙 치고 사라졌다. 뜨거운 두 손바닥만 덩그러니 여기 남겨둔 채. 한 순간 화끈하게 달라붙었던 두 손이 이제 떨어지듯, 하늘과 땅이 둘로 떨어져 나갔다. 막바지의 장맛비는 하나로 달라붙어 있던 하늘과 땅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뜯어내는 사이 드러난 아교풀처럼 공중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었다. 산천초목은 지상과 천상이 단단히 달라붙어 있었다는 몇 조각의 증거. 땅에서 하늘이 공중으로 뜯겨나가며 발생한 풍경이란 흔적들은 나의 화음 속으로 불시에 뛰어들었다가 금세 이탈했다.

나는 노래의 부스러기. 우리가 왜 틈만 나면 손 붙잡고 있었는지 끌어안고 있었는지 금세 또 혼자 있고 싶어 했는지를 노래해야지. 네가 십년 전 내 재킷 안주머니에서 가로챈 목소리로 이제 그 노래를 불러줄 수 있을까. 지난 하루, 하루는 그 사이로 삽입되는 코러스. 구름은 항상 파도처럼 밀려와 창문이란 오선지 위에, 하얀 포말로 염한 죽은 고래와 조가비를 밀어 놓고 갔다.

내가 녹슨 마이크를 입술에 대고 보니, 이미 모두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활어처럼 자꾸 미끄러지는 마이크를 부여잡았다. 내가 노래한 철지난 악보들이 발밑에 폐달력처럼 잔뜩 뜯겨 있다. 철새 떼의 행렬이 하늘에 거대한 이빨자국을 남기며, 구름이란 악보를 집어삼키고 있다. 비와 바람은 사이좋게 내 한쪽 귀를 나눠 잡고, 부지불식간에 내 노래하는 입술까지 뒤집어씌웠다.

 

김중일∙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국경꽃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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