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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신작시/이시경/설산에서 나오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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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에서 나오다 외 1편
사색의 그림자마저 밟은 적 없다
설산에 깊이 갇혀 반짝이는 언어들
깊숙이 묻혀 있을수록 더 아름답다
하루에 한두 번 눈폭풍 몰아칠 뿐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곳
손가락 다섯인 지각과 망각으로는 곡괭이를 잡을 수 없다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생긴 전두엽의 크레바스 사이로
헬리콥터를 타고 접근할 수는 없는가
엔진소리가 나자 설벽이 무너져 내린다
반쯤 맞추었던 뼈마디들이 다시
뒤죽박죽 눈 속에 파묻힌다
짐승의 털로 온몸을 덮은 아이가
누군가를 부르며 설산 속으로 사라진다
붉게 물든 눈 위에 가물가물 누운 어미 매머드
빙하가 녹으면서 한마디 흑고래 소리를 낸다
육각형 감옥에 꽁꽁 얼어 있던 언어들이
고래소리에 증폭되어 나오다가 그 큰 설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루게릭 증상을 보이며 설산에 다시 갇힌다
그녀는 밤마다 깃털이 된다
밤새 뼈마디 녹아내려 설산을 녹이는
그녀의 류마티스 통증은 하룻밤에도 몇 번씩이나 설산을 훌쩍 뛰어넘는다
어둠 속에서 응어리 날마다 조금씩 여물어 흑진주 된다
검게 빛나는 언어들이 밤마다 침대를 흥건하게 적신다
신생어를 찾아서
토굴 속에서 꿀꿀거리는 언어들
잠자다 놀라 흰 이를 드러내며 앞 다투어 나온다
깊은 암굴, 허기질수록 날쌔다
주둥이가 붉게 물들어 비릿한 냄새 풍기며 가늘게 떤다
허접하게 꿀꿀대는 저들을 달래느라
자정을 멀리 보내고서야 토굴에 모두 가뒀다
이빨 끝이 예리하게 다듬어진 신생음을 찾아 문학지를 저인망 어선으로 훑는 데도
관성적으로 자꾸만 전통적 서정시에 눈이 가는데
용수철 끝에 달려 꿀꿀거린다
어느 추는 그렇게 십여 년을 쳇바퀴만을 돌렸다
수많은 용수철에 매달려 시가 학생이 학교가 주어진 궤도 안에서
원운동, 나선운동, 직선 왕복운동을 하면서 진부한 소리를 낸다
그들은 용수철의 탄력성과 두께에 대해서는 간과하면서도
추의 무게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집착하였다 바람이 동풍인지 돌풍인지
세기와 방향에 대해서도 입을 꽉 다물었다
황사는 고비사막이 백만 년 동안 다듬어온 황금언어다
이빨로 용수철 줄을 끊고 하나둘 토굴을 뛰어 넘었다
신생어가 찬란하게 붙박이별로 하늘에 박혔다
이시경∙2011년 ≪애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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