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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시깊이읽기/오채운/모래가 만드는 시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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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4,245회 작성일 13-03-02 11:19

본문

오채운

모래가 만드는 시적 공간

 

 

모래내

김승희

 

 

모래내 언덕배기에 비탈진 집들,

비탈진 집들은 여기 부유浮遊하여

넋나간 짐승의 울부짖음 속에

주춧돌을 박은 듯……

여기 부유하여

 

사람을 먹는 모래, 식인食人모래,

소식도 없이 모래에 먹히우는 무슨

손발같은― 흔적만한……

 

사람들

 

화농 흐르는 부스럼꽃같은 아이들 몇이

풍선처럼 떠 있다.

풍선 묶어둘 어떤 말뚝도 없어

아이들은 제 스스로

풍선으로 떠있는 걸 배운다……

 

가두는 모래, 덮치는 모래,

괴물怪物 모래와 솟구치는 모래들……

능히 피 한방울도 없이

모래는 역사를 덮는다,

무슨 눈물자욱같은 흔적만한

사람들……

 

멀리서 보면 떠있는 풍선들이 말하는 것같다,

살려줘요――라고,

풍선에서 풍선으로 떠도는

주소만을 가진 사람들……

어떤 풀씨처럼

허공에 주춧돌을 박은……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사람들은 그곳을 남가좌동이라는 지명 대신 ‘모래내’라는 지명으로 더 많이 부른다. 그곳에는 모래내시장이 있고 사천교라는 다리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모래도 없고 내도 없다. 혹자는 그곳이 내를 이룰 만큼 모래가 많았던 곳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지금 그 모래가 건축을 위해 모두 사용되어 사천교 아래에는 모래도 내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벌써 20여 년 전 모래내에 살던 사람들에게 내가 직접 들었던 이야기에 불과하다.

‘모래내’는 김승희 시인이 살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내게는 시적인 공간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김승희 시인의 시에는 「모래내」, 「기차가 지나가는 모래내」, 「목마른 모래내」, 「모래내에서 연신내로」 등 모래내를 배경으로 하는 시들이 여러 편 있다.

김승희 시인에게 ‘모래내’는 장소로서의 모래내가 아니라 언어로서의 모래내로 존재한다. 나 또한 그 시들로 인해 현실적 공간인 모래내를 시적 공간인 모래내로 느끼며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 김승희 시인의 「모래내에서 연신내로」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시인은 모래내를 떠난 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지금 새삼스레 모래내 시편들을 꺼내어 읽어보며 단지 그 시절만이라고 말할 수 없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모래내의 세계’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모래내’는 모래를 품고 흐르던 물이 같은 장소에 모래를 토해내 만들어진 삼각주와 같은 지리학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런데 이 ‘모래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물이 아닌 모래가 흐르는 내’와 같은 모순적 의미를 포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래로 만들어진 내’는 시 안에서 인간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가져다주는 모순적 상황을 내포하게 되면서 단순한 지명이 아닌 ‘시어’로 변이된다. 그래서 ‘모래내’라는 말을 작품 전체의 맥을 짚을 수 있는 중요 시어로 삼고 시를 읽어나가야 한다.

여기에 소개하는 「모래내」 외에 김승희의 모래내 시편들은 우리를 절망과 고통과 죽음의 세계로 안내한다. 모래내라고 하는 그 모순적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암담함은 우리를 풀려날 수 없는 갑갑함 속으로 인도한다. 모래내는 입안에 모래를 씹는 듯한, 섬뜩하게 이 한쪽이 시큰거리는 것 같은, 혀 안에 모래가 감기는 듯한 느낌에 빠지게 한다. 언어의 모순적 의미가 가져다준 그 갑갑함은 현실의 갑갑함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갑갑함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래내’라는 시어가 가지는 치명적인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모래내의 언덕배기에’ 지어진 ‘비탈진 집들’로부터 시작된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정지되어 있는 모래도 아니고 내를 이루고 있어서 언제 어디로 흘러가버릴지도 모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내를 이루어 쌓여진 모래의 언덕배기에 집을 짓는 일은 참으로 위험천만하다. 모래 위의 집은 반듯하지 못하고 비탈진 채 버티고 있다. 우리의 삶이 화자의 눈에는 모래언덕에 비탈진 집을 짓고 사는 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나무처럼 땅속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유浮遊하고 떠돌고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 위태로움 속에서 맞이하는 공포, 그 공포에서 흘러나오는 울부짖음. 그것은 사람의 울음소리일 수가 없다. 그것은 ‘넋나간 짐승의 울부짖음’이다. 화자의 눈에 인간은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위태로움 속에 집을 짓고 떠도는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한 울부짖음은 인간을 인간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은 이 시에서 ‘넋나간 짐승’으로 격하된다. 인간은 이렇게 격하된 짐승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춧돌을 박은 듯’ 현실에 뿌리를 내린다.

2연에서 모래가 사람을 먹는다는 표현을 보자. ‘넋나간 짐승’으로 격하되어 울부짖어야하는 공포 속을 버텨나가야 한다면 인간은 충분히 모래에게 잡아먹힐 만하다. 왜냐하면 ‘모래내’ 위의 언덕배기에 집을 짓고 사는 것으로부터 이들의 죽음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래는 인간이 처해 있는 위태롭고 모순적인 상황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결국 그 위태로움과 모순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성이 상실되는 상황은 어떠한 징조도 동반하지 않는다.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성 상실의 징조이며 전조증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모래의 억센 아귀를 피하지 못한 채 머리도 몸통도 모두 잡아먹히고 손발만 남은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그 손발조차도 진짜가 아니다. 모래에게 먹힌 인간의 최후는 손발이 아니라 손발의 흔적에 불과하다. 모래에게 잡아먹힌 뒤 형체도 없는 흔적만이 인간인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모래 위에 집을 짓고 모래에게 잡아먹히는 상황은 아이들에게도 전이된다.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인간이 가지는 위태로움은 마치 유전처럼 아이들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 아이들의 몸에서는 화농이 흐르고 부스럼이 생겨난다. 아이들의 모습이 하나의 거대한 ‘부스럼꽃’이 된다. 이 아이들 또한 모래내에 집을 지은 어른들처럼 부유浮遊하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 아이들은 가벼워 금방 어디로든 바람에 실려가버릴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을 땅에 묶어둘, 혹은 한곳에 정착하게 해줄 ‘말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존재할 곳은 바로 그 장소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제 스스로 풍선으로 떠있는 걸 배운다’. 그리고 이 아이들 또한 머지않아 모래에게 잡아먹히게 될 것이다.

4연에 오면 모래는 점점 더 인간의 목을 조여 오기 시작한다. 모래는 모래내 언덕배기에 집을 지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가두고 덮친다. 어른은 물론 부스럼으로 얼룩진 아이까지 가두고 덮친다. 사람을 가두고 덮쳐 꼼짝 못하게 만들고 마는 모래의 모습은 작은 알갱이에서 괴물의 형상으로 변이된다. 모래는 사람 위로 솟구친다. 솟구치는 모래의 가공할 힘에서 인간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모래는 화농 흐르는 아이들을 동정하는 한 방울의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한 매정함이 인간의 역사를 덮는다. 인간의 역사 대신 모래의 역사가 들어선다. 이렇게 모래로 상징되는 거대한 힘 앞에 인간은 눈물도 아닌 ‘눈물자욱’의 ‘흔적’과 같은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결국 인간은 말줄임표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운명에 처한다.

이들과 좀더 거리를 두고 살펴보자면 인간은 떠 있는 풍선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서로에게 ‘살려줘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비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간과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풍선들이 말하는 것 같다’. 화자는 풍선에게서 혼잣말을 듣는다. 멀리 보이지만 낮게 속삭이는 듯한 그들의 간절한 비명을 듣는다. 이 비명들은 풍선에서 풍선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이곳 모래 위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한 번도 나무처럼 뿌리내려 보지 못하고, 말뚝에 묶여 보지도 못하고, 떠 있는 풍선들로 평생을 보낸다. 평생 ‘넋나간 짐승’이 되어 낮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말이다. ‘허공에 주춧돌을 박은’ 풀씨처럼 그렇게 흔들거리며 위험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화자가 접하는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이 시는 모순적 의미를 담고 있는 ‘모래내’라는 시어를 통해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실상을 살펴본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모래내 사람들’은 단지 그 공간의 안쪽에 있다는 의미로서의 모래내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전체의 모습을 의미한다. ‘위태롭게 흔들리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뿌리를 두고 있는 그 위태로움은 공시적, 통시적으로 퍼져나간다. 퍼져나간 위태로움은 인간 전체의 역사가 되고 인간 개개인의 운명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운명에 처한 인간의 모습을 화자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내가 지금 딛고 있는 땅이 금방이라도 모래가루로 부서져나갈 것 같은 운명적 폐허의식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에 대한 연민 또한 잊지 않게 될 것이다.

모래내 밖에 있다고 믿고 싶은 우리들 혹은 모래내에 갇혀 있다고 믿는 우리들 모두 과연 ‘모래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김승희 시인의 「모래내에서 연신내로」의 한 부분을 되새겨 보면서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모래내에 살 때부터/나는 강물 보다는 모래를 더 많이/보았었지만/<모래내>라는 이름 속에서 물을 느끼고서/나는 풍경(살풍경)에 절망하기 보다는/말 속에서 미래를 꿈꾸는 버릇을 가졌다’. 나는 아직 모래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김승희 시인처럼 나도 한 번 풍경에 절망하기 보다는 말 속에서 미래를 꿈꾸어 보기로 한다.

 

오채운∙1964년 전북 김제 출생. 2004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모래를 먹고 자라는 나무>, 저서 <현대시와 신체의 은유>. 현재 한양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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