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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시깊이읽기/황인찬/죽음 밖의 죽음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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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29
전봉건
밝구나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맑구나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따뜻하구나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오 구름
떠도는 솜털구름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참
오늘은 일요일이구나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다시
오 떠도는 솜털구름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보고 싶구나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못 잊구말구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사랑하구말구
그렇게 말하다가
죽었다.
모두 그렇게들 죽었다.
죽음 밖의 죽음을 죽었다.
모두 죽었다.
1.
전봉건이 ‘전후戰後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하나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 ≪문예≫를 통해 등단한 그는 평생에 걸쳐 ‘전쟁 경험’과 그 상흔에 집중하여 일관된 작품 활동을 계속해왔으며, 그에 걸맞은 다양한 형식 실험을 병행해 왔다. ‘전후’와 ‘모더니즘’, 이 양자를 그만큼 충족시키는 이도 얼마 되지 않으리라.
전봉건의 시 세계가 도달한 한 지점이 바로 「6·25」 연작이다. 비록 미완의 유작으로 남긴 했으나, 한국전쟁을 시로 형상화하고자 한 그의 시도는 문학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를 차치하고서도 나에게 「6·25」 연작은 전봉건의 시편들 중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편들에는 ‘현대가 형식을 강요한다’는 그의 시 정신이 철저하고도 처절하게 구현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연작의 거대한 흐름이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을 그려낸 「6·25 29」다. 쉬지 않고 죽음을 말하며 “죽음 밖의 죽음을 죽었다”고까지 말하는 저 죽음의 거대한 연쇄는 대체 무엇인가? 여기서는 그 ‘죽음 밖의 죽음’이 무엇인지, 또 그것은 어디에 기인하고 있는 것인지, 나름의 이해를 전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연작이라는 형식의 특성상 「6·25」 연작의 전체적 흐름에서 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 편의 시에 집중하여 깊이 읽는다는 기획과 다소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기실 한 편의 시를 깊이 읽는다는 것은 그것이 끌어안은 저변의 세계를 둘러보는 일을 수반할 터이니 크게 무리한 일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2.
우선 시편이 드러내는 다소 단순한 형식을 살펴보자. 우리는 단순한 형태의 반복을 발견할 수 있다. ‘말하다가 죽었다’는 구절은 연마다 반복되다 “모두 그렇게들 죽었다”는 진술을 통해 하나의 죽음으로 수렴되며, ‘밝음’, ‘맑음’, ‘따뜻함’, ‘솜털구름’, ‘일요일’과 같은 유사한 성질의 시어들은 이후의 ‘죽음’과 대비되어 그 극적효과를 뚜렷하게 한다. 또 ‘말하다가 죽었다’는 진술의 반복은 전쟁의 포화에 휘말린 저 수많은 익명들의 죽음이 하릴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반복적 단순함은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인가? 반복은 그 단순성으로 인해 시적 상황의 성격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끝없는 죽음의 연쇄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위의 시편뿐 아니라 「6·25」 연작 전체가 이러한 반복을 통해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이 트는데//햇살보다 먼저 터진 것은 총소리 대포 소리였다 처마 밑에서 터지고 돌담 아래서 터지고 뒤뜰에서도 터졌다 지붕에서도 터졌다
―「6·25․11」 부분
동이 트는데/햇살보다 먼저/고깃배 저어 나루에 당도한 것은/자라 가물치 붕어 잉어 쏘가리 모래무지/비린내 절은 맨발의 덕만이가 아니었다/긴 가죽신 신고 허리에 권총 찬 낯선 얼굴이었다/덕만이의 얼굴을 닮은 낯선 얼굴이었다
―「6·25․12」 전문
동이 트는데/햇살보다 먼저 총소리가 터지고 대포 소리가 터졌다 안방에서 터지고 건넌방에서 터지고 문간방에서 터졌다 마루방에서 터지고 사랑방에서 터지고 마구간에서 터졌다
―「6·25․13」 부분
동이 트는데//햇살보다 먼저/논두렁에 올라선 것은/바짓가랑이 걷어올린 덕쇠의 흙빛 정강이가 아니었다/칼 꽂은 장총 걸쳐멘 낯선 얼굴이었다/덕쇠의 얼굴 닮은 낯선 얼굴이었다
―「6·25․14」 전문
다소 긴 인용이지만, 이를 통해 「6·25」 연작의 형식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6·25․11」은 「6·25․13」과 형식적으로 유사하며, 「6·25․12」와 「6·25․14」 또한 그렇다. 각 연작의 순서도 A·B·A‘·B’의 순으로 반복·변주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그것들은 다시 ‘동이 트는데 햇살보다 먼저’라는 구절의 반복으로 하나로 묶이고 있다. 이러한 반복적 형식으로 인해 일차적으로 발생하는 효과는 모종의 리듬감일 테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시적 상황의 동시성과 전체성의 강조에 있다. 저 죽음의 연쇄를 특정 시간이나 공간에 한정하지 않고, 그것이 한반도 ‘전체’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이러한 단순성과 반복성을 두고 “기계적인 매카니즘의 무자각적인 형식으로 시의 격이 떨어진다”(조영복,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근대성과 일상성>, 1997)고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저 기계적인 메커니즘과 무자각적인 특성이야말로 이 형식의 백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전봉건은 자신의 연작시에 대해 “6·25는 특히 (총을 들고 전쟁을 기었다는 뜻이다)나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잊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내던질 수도 없는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연작시 「6·25」는 그 숙제를 정리하는 일이 된다고 할 수 있다.”(「시의 변화」, ≪문학사상≫, 1985.4)고 말한 바 있다. 그에게 ‘전쟁 경험’은 평생토록 떨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잊는다거나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무의식적인 것, 즉 완전히 몸에 각인되어 떨쳐낼 수 없는 것에 가까우리라. 그렇다면 저 기계적인 반복은 그의 ‘전쟁 경험’과 그로 인한 상흔이 시의 형식으로서 체화된 것 아닐까. 다시 말해 「6·25․29」를 비롯한 연작 전체가 공유하는 단순성과 반복성은 도처에 가득한 죽음의 연쇄와 그로 인한 시적 자아의 무자각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예의 의미심장한 구절인 ‘죽음 밖의 죽음’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3.
‘죽음 밖의 죽음’은 「6·25․25」부터 「6·25․29까지」, 그리고 「6·25․38」과 「6·25․39」의 총 일곱 편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예의 반복과 변주의 형식을 통해 하나의 주제부로 묶이는 「6·25․25」-「6·25․29」까지의 다섯 편이다. 이 시편들은 주어진 상황만 다를 뿐 거의 같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머니는/솥뚜껑을 열어놓고/보리밥을 푸다가/죽어 있었다//누렁소는/가래를 멘 채/밭이랑을 베고/죽어 있었다//(중략)//모두/그렇게 죽어 있었다/죽음 밖의 죽음을/죽어 있었다
―「6·25․25」 부분
종을/치다가/죽었다.//무릎을/꿇다가/죽었다.//구겨진/성경책을 펼치다가/죽었다.//아멘/그 소리를 내다가/죽었다.//어린아이들/성당 안마당에서/나비처럼 놀다가//나비처럼/폴 폴폴/뛰놀다가 죽었다.//그렇게들 죽었다./죽음 밖의 죽음을/모두들 죽었다.
―「6·25․27」 전문(강조는 인용자)
마찬가지로 ‘~하다가 죽었다(죽어 있었다)’의 반복이다. 전쟁의 참상이 낳는 수많은 죽음을 예의 무정한 기술記述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죽었다”는 진술이 계속 그 상황을 달리하며 반복될 때, 시는 묘한 정서적 효과를 일으킨다. ‘죽음’의 기계적 반복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물결 앞에서 죽어가는 민간인들의 무력함을 강조하며 애잔함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내지만, 동시에 ‘죽음’의 반복적 강조를 통해 여타 서사적 배경을 지워버리며 개개인의 죽음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일종의 소격효과를 낳기도 한다.
수많은 죽음을 그려냄으로써 개별의 죽음을 무화시키고 거대한 관념으로서의 죽음만을 남기는 이 묘한 효과에 주목하자. 「6·25」 연작 전체에 가득한 ‘죽음’을 넘쳐흐르는 죽음, 즉 ‘죽음의 초과’ 상태로 본다면, 그것은 ‘죽음’의 시편들을 하나로 묶는 결구인 ‘죽음 밖의 죽음’과 상통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심지어 ‘죽음 밖의 죽음’을 다시 ‘죽었다’고까지 표현하는 이 압도적인 ‘죽음’의 진술을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설명을 거부하는 죽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 반복적이며 과잉된 ‘죽음’은 다른 의미가 개입될 여지를 차단하고, 오로지 죽음 자체만을 강조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가장 심화된 것이 바로 「6·25․29」다. 여기서는 어떤 구체적 상황도 찾아볼 수 없으며, ‘죽음’이라는 사건의 자명함만이 남는다. 심지어 시적 자아나 주체 또한 극도로 축소되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자각적이고 기계적인’ 상태, 외부를 잊은 듯한 상태에 들어서는 것이다. 전쟁 속에서, 휘몰아치는 죽음들 속에서 어떤 외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저 죽음만 남겨질 뿐이다. 죽음 밖에는 죽음만 존재한다.
이것이 내가 이 시편에 사로잡힌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이토록 극명하고 순수한 죽음을 본 적이 없다. 죽음에 사로잡힌 기계가 되어, 끊임없이 죽음을 투사하는 이 철저함과 처절함이 내 마음을 들끓게도, 아리게도 한다. 「6·25」 연작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서 끝없는 죽음의 연쇄를 드러내며 도달한 일순간, “죽음 밖의 죽음을 죽었다”고 말하고야 마는 그 순간의 심정은 대체 어떠한 참혹 속에서 가능한 것일까.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니 그저 작게 입을 벌려 따라할 뿐이다. 밝구나, 맑구나, 따뜻하구나, 사랑하구말구……
황인찬∙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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