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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서평/장이지/낯선 자연, 무해한 일상의 탐색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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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305회 작성일 13-03-0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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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지|낯선 자연, 무해한 일상의 탐색자들

 

1. 머리말

시의 질서는 일상의 질서와는 분명히 다르다. 문학은 일상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문학은 쇄말적인 일상의 세계와 거리를 두고, 반복되지 않는 일회적인 경험, 특별한 경험을 특권화한다. 그러나 일회적인 경험이나 특별한 경험이 그 일회성과 특수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배음으로서 구체성을 띠고 재현되는 일상의 질서를 거느리고 있어야 한다.

김춘의 <불량한 시각>, 하재연의<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은 모두 일상의 질서와 경쟁하면서도, 배음으로서의 일상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시집들이다. <불량한 시각>에서 김춘은 일상으로서의 자연을 자연 그대로 덤덤하게 묘사하는 대신 활유법이나 환유와 같은 수사적 장치 등을 통해 자연을 한 번 비틀어 시의 주조음이나 배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에서 하재연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로서 ‘놀이동산’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아 찾기라는 자신의 테마를 더 드라마틱하게 변주하고 있다.

김춘은 자연적 공간을, 하재연은 인공적 공간을 시적 배경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시인은 대척적인 지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춘의 자연적 공간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하재연의 인공적 공간이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김춘의 자연적 공간이 더 낯선 공간으로 인식되고, 하재연의 인공적 공간이 어떤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비단 우리가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2. 일상의 경계 너머, ‘불량한 시각’이라는 장치를 통과한 자연

<불량한 시각>의 김춘은 언어의 묘미를 잘 아는 시인이다. 시집을 읽는 내내 그의 위트에 깜짝깜짝 놀랐다. “오른쪽으로 누워도 왼쪽으로 누워도 벽이 이마에 닿던 스물”(「눈의 여왕」)이라든지 “어제는 그를 붙잡고 새가 말하는 동안 비가 왔다”(「소나무」), “저수지는 마을을 베고 낮잠 중이다”(「두 노인의 고요」)와 같은 구절들의 아름다움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닐 텐데, 첫 시집을 내는 시인의 위트가 정말 이 정도인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불량한 시각>이 위트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시작詩作의 기교에 있어서도 자기만의 스타일을 이미 성취하고 있어서 더 반가웠다.

<불량한 시각>은 타자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자의 위기의식으로 가득하다. 스스로 “개구리 시력으로 살았다”(「불량한 시각」)고 고백하는 자의 심경은 어떤 것일까. 세상을 읽어내는 ‘자신의 시각’을 믿지 못하는 자의 불안은 그대로 시 쓰는 자의 자기 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시적으로 읽어내려는 시인 앞에 세계는 그 신비의 문을 좀처럼 열어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는 ‘안개’로 그 자신을 은폐한다. 「소나무」, 「안개, 관계」, 「블랙박스」 등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안개’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세계의 진실, 혹은 삶의 비의적 순간들을 차폐하면서 내밀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한다. ‘내’가 ‘내’ 안에 숨기도 하고(「술래가 사라졌다」) ‘아내’는 귀를 열고 들어가 나오지 않는 존재로 그려지며(「이명의 존재」) 세상의 어느 구석에선가는 “그를 빨아들이는” “검은 철문”(「그의 콜라주에는 그녀가 있다」)이 있다고 하는 그 숨바꼭질적인 일생일대의 사건들 역시 저 ‘안개’ 모티프의 한 변주로서 ‘나’와 ‘세계’ 사이에 어떤 경계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 경계는 항상 ‘철문’으로서 강고하게 버티고 있지는 않다. 그 경계의 ‘틈새’에서 ‘그’가 “쓰윽” 나오기도 하고(「새벽을 훔쳐보다」), ‘그’가 ‘안개마을’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풀어지기도 한다(「소나무」). “별 같은 말”은 “구멍 난, 오늘”에서 쏟아져 나온다(「꿈들은 증식을 시작한다」). 따라서 이 ‘틈새’나 ‘구멍’과 같은 일상의 균열들은 가능성의 공간으로 인간의 일상 어딘가에 감춰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 가능성의 공간이란 다른 게 아니라 ‘시’ 바로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춘의 시는 이 자아와 세계의 경계면을 따라 형성되거니와,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의 서정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동일성의 시학과는 다른 개성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불량한 시각>에서 인간은 그 전신全身으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어로서, 다시 말해 손가락이나 눈동자, 입술, 목젖과 같은 신체의 일부로서 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기억도 그 전말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대신 어떤 뉘앙스로만, 어떤 기미로만 드러난다(「국화차」). 기억은 끊어진 채(「신 귀거래」) 출몰한다. 아마도 ‘낙조’에 대한 묘사일 것인데, “떨어지는 감긴 눈동자/서로에게 스미기 직전, 어긋난다”(「봄의 장례」)고 하는 ‘어긋남’이나 ‘결렬’의 감각이 <불량한 시각>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김춘은 마음을 잘라버린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옹이’의 “지독함”(「소나기」)이나 한때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사이였다가 이제는 “독설”(「그의 콜라주에는 그녀가 있다」)만이 남은 어떤 남녀 사이의 ‘어긋남’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이러한 페이소스만이라면 김춘의 시가 개성이 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가령 「달의 바다」에 나타나 있는, ‘달’과 ‘바다’에 대한 동경이나 자살 시도(손목 긋기)와 같은 것들은 과도한 감상성이나 상투성이라는 지점에서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춘은 대체로 이러한 감상성을 우회하고 상투성을 불식시킬 만한 스타일이 확고한 편이다. 가령 「물길」에 나타난 활유법이나, 「꿈들은 증식을 시작한다」에 나타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환유 등은 매우 유려하여 이 시인을 주목하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연을 낯설게 하는 이러한 장치들이 너무 빈번하게 등장하고, 그 낯선 장치가 장치 이상의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교의 허망 같은 것도 느끼게 되지만, 그만큼 시인이 세계를 새롭게 보아내려고 하는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실감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불량한 시각>의 매력은 아무래도 김춘이라는 시인의 유려한 언어 감각에서 휘황하게 빛난다고 해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춘이 「두 노인의 고요」, 「나도 벙어리가 되고 싶다」, 「못」과 같은 더 구체적인 경험들에서 우러나오는 시의 길로 나아간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거추장스러운 것」, 「기린이 어미의 눈을 읽는다」, 「작업걸기」 등에 언뜻 보이는 알레고리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거니와, 김춘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내레이션에 적합한 이야기꾼일지도 모르겠다.

 

3. 디즈니화한 세계에서 자아 찾기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에서 하재연은 “픽션보다” 더 허구적인 일상에서 진정한 ‘나’를 찾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내가 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한 번도 없었다”고 고백하며(「픽션보다」), ‘놀이동산’에서는 자기 자신인 것으로 추정되는, 그러나 자신과 하나도 닮지 않은 ‘단발머리 아이’와 마주친다(「놀이동산」). 「벨린다 메이」의 아무도 내 이름을 묻지 않는 세상은 물론 가상의 세계이지만, 내레이터에게는 지극히 매혹적인 세계로 다가온다. 그는 ‘고요한 밤’들이 증식하는 ‘무해한’ 일상을 살아간다(「고요한 밤의 증식」).

하재연은 소위 ‘미래파’ 시대에 등장하였지만, 미래파의 자극적이고 산만한 어법과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경제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자기 세계를 구축해왔다.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의 ‘무해한’, 혹은 평화로운 일상이 그와 같은 인상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그는 이 무해한 일상을 추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해한 일상의 질서 너머에 있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꿈꾼다.

하재연은 무해한 일상의 기원에 대해 탐색한다. 그것들은 어른들이 주고 간 ‘레고 블록’과 ‘인형’들을 통해 학습되고 강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종이 인형들의 세계」에서 슬픈 일이란 종이드레스가 몇 번이나 찢어지는 정도의 사건이고, 슬픈 일이라고는 해도 “약간” 슬픈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인형들의 세계에서 인형들의 어머니인 소녀들은 죽고, 인형도 죽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이거니와, 하재연은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나는 조금도 훌륭해지지 않았다”라고 발설한다(「인형들」). “나는 평면적으로 잘 자라난다”(「밤의 케이블카」)라는 전언은 그러니까 일종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삶은 “손댈 수 없이 망가져 있다가/손을 대는 순간” 더 망가져버린다(「증거들」). 그는 자문한다. “나는/나를 언제까지 연습할 수 있을까.”(「카프카의 오후」)

때로는 삶 전체가 ‘유원지’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재연은 “내가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인생은 유원지」). 메리고라운드가 돌고 도는 「꼬리 달린 이야기들」, 일요일에도 대관람차가 돌아가는 「자라는 놀이터」, 유년기의 자신과 조우하는 「놀이동산」에서도 그는 ‘디즈니화한’ 유원지를 배회한다. 회전하는 놀이기구를 타고 정신없이 놀고 있을 때만 ‘나’는 잠시 ‘나’를 잊고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잊는 것이 즐거운 것은 이 ‘나’가 진정한 ‘나’가 아닌 까닭이다. ‘나’의 삶은 “노동을 하고 식량을 살 수 있는”(「인생은 유원지」) 전혀 훌륭해지지 않은 어른들의 세계, 무해하지만 삶의 뚜렷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세계에 속해 있다. 레고 블록과 인형들의 세계가 자본주의적으로 심화해가면 곧바로 대관람차와 메리고라운드의 세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디즈니화한 세계에서 삶은 그 고유성을 잃어버린다.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해한 평화가 아니라 선명한 ‘자국’, 이를테면 “재봉틀의 스티치처럼”(「사라진 것들」) 뚜렷한 흔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생은 더 이상 유원지여서는 안 되고, ‘나’는 디즈니화한 세계와 결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아무도 ‘내’가 ‘어른임’을 고지해주지 않았다(「주말의 만화영화」). 아무도 ‘내’가 틀렸다고 “양말이 짝짝”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그림일기」).

하재연의 시들에 자주 나타나는 ‘나/너’ 관계가 「고기의 맛」에서처럼 “서로의 목구멍이 보이지 않는/기분”, 소통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장면을 반복·재현하는 것은 아무도 자신이 틀렸음을 고지해주지 않았다고 하는 그러한 ‘원망’으로부터 싹이 튼 것은 아닐까. 그것은 섣불리 단정할 수 없지만, ‘나/너’ 관계가, 소통의 ‘불/가능성’이 그의 주된 레퍼토리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든지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보다도 “인사하는 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지구의 뒷면」). 다원주의라든지 상대주의가 결국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교묘하게 미화하는 것이라면, 그의 인사법은 타자가 타자임을 “증명”(「안녕, 드라큘라」)하는 것으로서의 의미화 과정이라고 해야겠다. “당신은 당신의 소년을 버리지 않아도 좋고/나는 나의 소녀를 버리지 않아도 좋은”, 당신이 당신임을 포기하지 않고, 내가 나임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하재연 식의 ‘인사법’은 이 디즈니화한 세계에 잘못 들어선 개인들이 어떻게 이 유원지를 벗어나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 날 수 있는가 하는 구원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재연이 디즈니화한 세계와 결별해야 하되, 되풀이해서 그 유원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바로 거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4. 맺음말

문학이 특별한 경험을 특권화한다고 할 때, <불량한 시각>에서는 「안개, 관계」와 같은 시를 맨 앞에 내세워도 좋을 듯하다. 정선으로 가는 38번 국도 상에서 일어난 “통정의 순간”은 불순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인간이 인간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정념이 만들어낸 ‘통정의 순간’을 “안개”가 차폐막이 되어 가려주고, 그 불가시성 때문에 오히려 귀를 세워 듣게 되는 에로틱한 장면에서 산과 계곡, 나무들의 관능적 자세가 김춘 특유의 ‘낯선 자연’으로 그려져 있는 시가 바로 「안개, 관계」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에게 요구되는 것 중에서 아마도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진귀한 사적 경험의 형상화일 것인데, 「안개, 관계」와 같은 시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딴은 그런 맥락에서이다.

진귀한 사적 경험이 사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의미를 띠게 될 때, 비로소 시인은 자기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의 하재연은 디즈니화하는 자본주의 세계에 살아가는 도시 남녀의 감정생활과 그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탐색하는 진지한 탐색자를 도처에 형상화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한 ‘정신’에 한 발짝 더 다가간 게 아닌가 싶다.

 

장이지∙200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안국동울음상점>, <연꽃의 입술>이 있고, 연구서로 <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보>, 편저로 <이수복 시전집>이 있음. 김구용시문학상, 바움젊은시인상 수상.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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