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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서평/이정현/적막의 소리와 생명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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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적막의 소리와 생명의 온기
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 다시
적막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
―문인수, 「적막 소리」에서
1.
시는 감정의 동요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멜랑콜리와 애도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따라서 시란 언제나 현재형이면서 격렬한 자학과 위악을 동반하는 무엇이며 그 안에서 위안을 찾기 위해서 애쓰는 언어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적막과 적멸을 다룬 시를 즐겨 읽지 않았다. 시는 개인의 슬픔을 중심으로 세계와 접선하는 한 방식이라고 여겼다. 그런 와중에 문인수의 시집 <적막 소리>(창비, 2012)와 권덕하의 시집 <생강발가락>(애지, 2011)을 펼쳤다.
두 시인의 시집을 읽는 과정은 곤혹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두 시인의 언어에는 격렬한 감정의 떨림과 세계에 대한 저항이 직설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담담하게 기억과 풍경을 풀어놓을 따름이다. 아주 느리게.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멜랑콜리와 애도의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는데도 두 시인의 언어는 천천히 슬픔을 자아낸다. 이 슬픔은 곰삭은 음식처럼 깊다. 두 시인은 흔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진 것들에서 존재를 읽는다. ‘적막’에는 ‘소리’가 없고 식물인 ‘생강’에는 ‘발가락’이 없다. 그럼에도 시집의 제목은, 적막-소리이고, 생강-발가락이다. 제목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두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것에 어떤 것을 끌어내는 작업을 행한다. 권덕하 시인은 살아 있는 존재들 각자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먼저 짧은 표제작을 읽는다. “저건 뿌리다/무른 진흙 딛고 참은 울음이다/너덜겅 걷다가/매운 다리품이 감췄다가/비어져 나온 생각,//식구들 잘 보듬고 가만히 나가/어둑발 훔치며 좌판 펼치는/아내의 걸음새에/땅을 미는 힘으로 솟은 햇귀가/속 깊이 쟁여 준 가락이다”(「생강 발가락」 전문) 시간과 속도는 모든 것들을 사라지고 희미하게 만든다. 시간은 점진적으로 존재를 쇠잔하게 만들고 속도는 존재의 개별적 의미를 무화시킨다. 그렇다면 언어와 시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시간은 일방적으로 흐를 따름이니까 속도에 저항할 수밖에. 시인은 존재하는 대상들에게 실존적인 의미를 덧입히면서 속도에 저항한다. 언어가 직조하는 은유와 상징은 존재의 의미를 되물으면서 증가하는 속도와 맞선다. 이 싸움은, 대개 패배로 귀결된다. 시인과 언어의 무력함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패배는 시인으로 하여금 언어를 놓지 않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생강 발가락>에 수록된 시들에는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은 존재들로 가득하다. 시인은 관념과잉의 복잡한 언어가 아닌, 맑고 담백한 언어로 대상들에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를테면 ‘첫눈’은 ‘처음 내리는 눈’이라는 상식적인 정의를 벗어나 시인의 삶-기억과 뒤섞인다.
반찬 집어 주다 뜨거운 운두에 닿은 자국, 그대 살 속에
피어 회유할 수 없던 그 잎을 첫눈이라 불렀다
한 여자의 눈에 지운 한 사내의 눈물이 물들던 잎에 바
람도 무색하여
무슨 할 말 있는 듯 내 입술 가까이 떠 있다 가도 먼 길
걸어온 탓인 줄 알아 허공에 잡힌 물집인 줄 알아
가을에 혈육 두고 와 눈 붉어진 열매들 사이 설레며 오
가는 살점을, 나는 여적 첫눈이라 부른다
―「첫눈」 전문
기억은 시간의 흐름을 휘어지게 하고, 은유는 의미를 분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삶-기억을 투영시킨다. 그러면서 어떤 시들은 과잉된 관념을 표출하며 혼종적인 언어로 구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강 발가락>에서 시인의 언어는 시종일관 맑고 따뜻하다. 이 ‘맑고 따뜻한’ 언어들은 의외의 슬픔을 자아낸다. 낡고 쓸쓸하며 눈에 띄지 않는 존재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삿짐을 꾸리다가 조우한 ‘벌레’는 “아직 내리지 않은 식구”(「이사」)로 명명되고, ‘시’는 “입에서 새끼들 풀어놓는 물고기”(「詩」)로 묘사된다. 권정하의 시는 산골의 기운과 새벽이슬의 청명함, 그리고 소멸되는 존재들에 대한 애잔함으로 충만하다. 그 중 각별하게 읽은 한 편의 시를 적는다.
감은 눈으로 머금고 있던 모습 하나 가만히 내려놓았다
조금씩 숨구멍 빠져나가는 울음 짙은 저녁, 숨죽이는
몸 차가운 구들이 달래 줄 때
회화나무들이 기르던 길도 이제 끊어졌다
아직 몸에 남의 피가 흐르는데 구석에 수액세트 엉겨
있다 세상과 이어주던 탯줄 속 알부민 누렇게 남아 있다
열에 굳어 말 잇지 못하고
더 이상 몸으로 흘러들지 못할 신앙 남았는데, 바깥은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
내려앉고 있는 것, 누군가 눈감고 물 위에 가만히 내려
놓은 것이 있어
몸 바꾸며 이어 가야 할 일 바다에 남은 것이다
―권덕하, 「눈 오는 바다」 전문
시인은 누추한 기억과 삶의 풍경을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말한다. 생명을 지닌 존재들은 모두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의 온기와 기억을 반추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먼 길 걸어온 바닥”(「풍경소리」)과 “허우적대며 바람에 쓸려가”(「빈 의자」)는 것들을 되새기지 않는다면, 소멸하는 존재들의 삶은 체념과 허무를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에 지나지 않으리라. 권덕하의 시는 그러한 사실을 직시하기에 따뜻한 생기를 지녔으며, 그래서 더욱 쓸쓸하다. 생명의 온기와 쓸쓸함이 부딪히면서 생성되는 것은 바로 ‘그리움’이다. 권덕하의 시는 그리움의 힘으로 지속된다.
2.
문인수 시인은 ‘죽음’, 혹은 ‘죽어가는 것’을 끊임없이 호명한다. 시의 소재를 살펴보면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죽은 새, 하관, 내리막, 무덤, 늙은 해녀와 어부, 사별, 구제역, 버려진 역사驛舍, 그리고 적막.
이곳 패션센터 건물 앞, 붉은 대리석 조각 매끈한 상단에
이 무엇이
웬 조그만 새 한 마리가, 입가가 노란 참새 새끼 한 마리
가 반듯하게 죽어 있다.
돌에 싹터 파닥거린 새의 날개가 허공에 눌려, 그리하여
끊임없이
돌에 스미는 중인지,
가슴의 보드라운 깃털 아래 늑골 여러 가닥이 희미하게
세세히 도드라지기 시작해,
현絃인가 싶다.
―문인수, 「죽은 새를 들여다 보다」 부분
시집의 첫 작품부터 문인수의 시선은 죽음의 언저리를 응시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과 소멸의 풍경에 자신의 정념을 투영시키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아흔 살이 넘은 해녀가 물질을 하는 모습을 담은 시에서도 그녀를 아픈 시선으로 연민하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아흔 고개 바라보는 저 할머니/오늘도 물질 들어가신다. 좀더 걸어들어가지 않고/무릎께가 물결에 건들리자 그 자리에서 철벅,/엎드려버리신다. 물밑 미끄러운 너덜을 딛자니 자꾸/관절이 시큰거려/얼른 안겨/편하게 헤엄쳐 가시는 것이겠다/(…중략…) 말라붙은 가슴이 다시 커다랗게 부푼 걸까, 부레여.”(「해녀」) 시인은 늙은 해녀를 그리면서도 노동과 밥벌이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 빈약한 폐활량으로 물속에 들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말라붙은 가슴이 다시 커다랗게” 부풀었다고, “일평생 진화를 거듭하셨”다고 적는다. 이 시선에는 감정의 과잉이나 눈물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노동과 밥벌이의 피로함이 짙게 묻어난다. 죽음과 소멸, 이별(사별)을 마주할 때 사람들이 흔히 취하는 방식은 ‘소란’이다. 장례식장의 소란스러움과 부산함, 연인과 헤어졌을 때의 흐느낌은 그 자체로 슬픔의 표현이겠지만, 그것은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정작 사라진(사라지는) 존재는 그 소란에서 배제된다. 시인은 감정의 과잉을 통해서 형성되는 카타르시스를 배격하고 소멸되는 존재를 바라본다. “사람하고 헤어지는 일이 늙어갈수록 힘겨워”(「동행」)진다고 토로하는 이유는 소멸되는 존재를 쉽게 망각하는, 남은 자들의 어떤 과잉을 목격했기 때문이리라. 개발로 수몰되는 마을(「고래의 저녁」), 늙은 어부였던 아버지(「닻」), 황량한 역사(「모량역」)들을 응시하는 까닭도 같지 않을까. 시인은 소멸되어가지만 아직 가느다란 숨결을 유지하는 소외된 존재들을 적는다. 「모량역」 연작 중 한 편을 읽는다.
역무원도 없지만 아연, 다시 역이다.
중늙은이 아주머니 한 사람,
구부정하게 등짐을 멘 채 어디선가 지금 막, 당일치기로
돌아온 덕분이다.
자주 본 옆얼굴이다.
바로 앞마을에 사는 주민이겠거니 짐작되지만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정면으로 날 마주본 적 없기 때문이다.
축 발전. 1987년도 역사 준공 이후 줄곧 먼지만 뒤집어쓰
고 있는 내게 확인할,
뭘 자세히 물어보고 자시고 할,
그런 인생이 자신에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일까. 대합실을 빠져나가는 저 열두
어 걸음,
마디마디가 전부
아주머니의 일생일대 아니냐.
아주머니 힘내시오! 전면 마음 써보는 일,
오늘 일과도 이쯤에서 끝난 것 같다.
―문인수, 「모량역의 거울」 전문
앉아 있는 “중늙은이 아주머니”와 황량하게 버려진 역사. 버려진 역사는 곧 소멸되는 삶에 대한 쓸쓸한 은유다. 바다에서 늙은 어부였던 아버지와 해녀였던 할머니를 떠올리는 기억의 작용도 그러하다. 앞서 간 자들처럼 ‘나’ 역시 소멸되리라. 사라지는 것들은 소리가 없다. 늙은 자들은 조용히 숨을 거두고, 개발로 인하여 사라진 마을도, 죽어버린 새도,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들의 공통된 운명은 그러하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 잡다한 소리를 내고, 속도에 적응하면서, 소멸되는 운명을 망각하는 존재가 아닌가. 문인수의 시는 이 지점에서 전개된다. 시가 느리게 읽히는 까닭은 희미하게 존재하는 것들을 둘러싼 ‘적막’ 때문이겠지. 그러나 그 나약한 존재들은 시를 관통하며 ‘소리’를 얻는다. 이 아름다운 역설을 통과하면서 역설적으로 존재는 소멸을 견디는 힘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시를 더 읽는다.
그래, 그것은 어느 순간 죽는 자의 몫이겠다.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루가 갔다.
꽃이 피거나 말거나, 시들거나 말거나 또 하루가 갔다.
한 삽 한 삽 퍼 던져 이제 막 무덤을 지은 흙처럼
새 길게 날아가 찍은 겨자씨만한 소실점, 서쪽을 찌르며
까무룩 묻혀버린 허공처럼
하루가 갔다. 그러고 보니 참 송곳 끝 같은 이 느낌, 또 어
디 싹트는
미물 같다.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첨예하다.
―문인수 「최첨단」 전문
이정현∙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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