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6호(여름호)미니서사/박금산|하루가 그냥 그렇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341회 작성일 13-03-08 18:28

본문

박금산|하루가 그냥 그렇게

 

 

나는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 뒤 휴대용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막대형 녹음기는 중앙에 녹음, 정지, 재생 버튼이 있었다. 나는 녹음 버튼을 눌렀다. 작은 홈에서 초록색 불빛이 흘러나왔다. 녹음 장치가 작동중이라는 표시였다. 나는 불빛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화장실에 갈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엘리베이터를 탈 때에도 나는 녹음기를 손에 들거나 호주머니에 넣은 채로 다녔다.

나는 외출에서 돌아온 뒤 녹음기를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여전히 초록 불빛이 홈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신문을 읽거나 티비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녹음기는 늘 내 곁에 있었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나는 잠에 빠져들면서 ‘내일 아침에는 확인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나는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머리맡에 두었던 녹음기를 손에 쥐었다. 여전히 초록불이 켜져 있었다. 어제 아침에 일어났던 그 시각이었다. 나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초록불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나는 정지 버튼 옆에 있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울렸다.

어제의 소리가 한숨으로 시작되었다. 화장실을 이용하고, 세수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걷고, 버스를 타고, 전화를 걸고, 통화는 연결되지 않고, 다시 걷고……. 녹음기에서는 구별할 수 없는 잡음도 많았고 내 곁을 스쳐가는 타인들의 목소리도 많았다. 내 목소리는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알고 있었던 그 사실을 귀로 확인하게 되자 내가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이번에는 ‘조차도’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혼잣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나는 녹음기에서 재생되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냈다. 밤이 되자 졸음이 찾아왔다. 나는 어제 무얼 하려고 나를 녹음했던 것일까. 어제 하루를 듣기 위해서는 오늘 하루가 꼬박 필요하다는 사실 외에는 깨달아지는 바가 없었다. 이제 잠에 든다면 어제 잠을 자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잠자는 동안 혹시 나는 무슨 말을 혼자 되뇌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오는 잠을 쫓으려고 찬물을 마셨다. 녹음기에서는 코고는 소리와 한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아마도 꿈속이었을 것이다. 어제 나는 무슨 꿈을 꾸었기에 잠을 자면서 한숨을 쉬었을까. 나는 달력을 보았다. 하루가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박금산∙1972년 여수 출생. 2001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생일선물>, <그녀는 나의 발가락을 보았을까>, 연작소설 <바디페인팅>. 장편소설 <아일랜드 식탁>, <존재인 척 아닌 척>.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