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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미니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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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2,276회 작성일 13-03-0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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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나무 처녀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눈앞의 것들이 온통 푸르고 싱그러웠다. 길은 겨우내 눈보라를 이겨낸 나무들을 지나고 땅에서는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새들이 내 발짝 소리를 듣고는 포로롱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드디어 고갯길이 시작되었다. 몇 걸음 떼지 않았는데 벌써 종아리가 당겼다. 하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곧 꼭대기에 다다를 것이고 길은 다시 평평해 질 테니까.

하늘 높이 팔을 벌린 나무들 사이로 다람쥐가 뛰놀고 버섯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숲길이 펼쳐졌다. 오르막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당겨와 절로 발걸음이 느려졌다. 나는 곧 다다르게 될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꼭대기는 조금 전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누군가 산의 꼭대기만 떼어내어 멀리 옮겨 놓은 것 같았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스웨터 속으로 파고들어 몸이 덜덜 떨렸다. 구름이 낮게 모여들더니 주변이 안개로 자욱해졌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나는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내 숨이 사그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할는지 모른다. 공포가 몰려왔다.

그때 거대한 나무 하나가 나타났다. 누군가 마술을 부려 나무를 내 앞으로 가져다 놓은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나무가 아이들이 말하는 '나무 처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 처녀가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 나무에게 잡혀 먹은 아이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나무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나는 찬 땅바닥에서 얼어 죽느니 차라리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구부린 채 나무 구멍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벌레처럼 몸을 꾸물거리며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구멍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너무 컴컴해서 크기를 짐작할 수 없었다. 동굴! 나는 몸을 더 오므린 채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몇 분이 지나자 무슨 소리가 났다. 오싹, 소름이 끼쳤다. 다행히 소리는 곧 멈추었지만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내 몸은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굳어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나는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살은 무언가에 쓸리고 긁혀 피가 났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등에 땀이 배었다.

나는 소리쳤다. 웅웅 메아리가 내 목소리를 더 크게 만들었지만 동굴이 내 목소리를 삼켜버리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나는 목이 쉬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순간, 내 몸이 끝도 없이 깊은 곳으로 굴러 떨어지는 걸 느꼈다. 눈앞이 아찔하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곧 알 수 없는 평온이 찾아왔다. 몸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워졌다. 키도 작아지고 얼굴도 절반가량 줄었다. 손과 발, 내 몸의 모든 부분이 차츰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나는 등을 둥글게 만 채 배꼽으로 숨을 쉬었다. 오래된 기억 속의 그 물, 나는 나무 처녀의 자궁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김혜정∙여수 출생.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장편소설 <달의 문>으로 서라벌문학상 신인상 수상. 소설집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 <수상한 이웃>. 장편소설 <독립명랑소녀>로 ‘2010 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청소년 저작상 수상. 현재 경기국제통상고등학교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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