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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여름호)독자시감상/최유리|칸도 없고 나도 없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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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탄
댓글 0건 조회 3,133회 작성일 13-03-0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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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리|칸도 없고 나도 없는 마음으로

 

 

칸나

최승호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주도의 여름, 현무암 돌담 아래 피어 있던 칸나, 그 붉은 꽃을 본 후로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도 쓰려고 애쓰다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었다. 칸나 속으로 들어가서 칸도 없고 나도 없는 칸나의 마음으로 말이다. 칸나! 칸나는 말의 저편에 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글이 이렇게 갑자기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제주도의 여름, 붉은 칸나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날, 무슨 일인지 내 혓바닥은 고름들로 퉁퉁 부어올라 있는 상

태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나는 칸나를 보고 있었다. 시커먼 화산재들이 치솟고 뜨거운 용암들이 흘러넘치는 한라산 밑에서 나는 꽃 붉은 칸나를 보고 있었다.

 

이제는 굳어버린 불의 돌, 현무암, 그 거무스름한 돌담 아래 피어있던 칸나의 붉은 꽃, 오늘도 칸나에 대해 제대로 쓰지 못한 느낌이 든다. 다음에는 칸나에 대해 더 잘 쓸 수도 있겠지.

 

나도 ‘칸나’에 대해 쓰고 싶었다. 현무암 돌담 아래에 피어 있는 붉은 꽃, 칸나. 흑색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그 붉은색에 대해 쓰고 싶었다. 하지만 ‘칸나’를 종이에다가 옮기는 일이 어디 쉬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나 마음으로 와 닿는 그 무언가를 글로써 표현하는 일. 내게는 너무 어렵다. “무슨 일인지 내 혓바닥은 고름들로 퉁퉁 부어올라” 말문부터 막혀버린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칸나’가 무엇인지만 알아내려고 했다. 억지로 이것저것 끼워 맞추어보면서 머리로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때는 ‘칸나’가 아닌 ‘칸나’에 대해 쓰려고 하는 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은 욕심은 날로 커지는데 “제대로 쓰지 못한 느낌”만 든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생각해보면 그 답답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의욕이 앞서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할 때면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런 내 모습에서 열정을 되찾기도 했다. 또,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칸나’가 되어 쓰고 싶은 욕심이 날 가만두지 않기도 했다. 오늘도 쓰고 내일도 쓰고 싶은 그 마음. 한동안 잊고 지냈지만, 내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읽어본 최승호 시인의 「칸나」에서 역설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욕심과 답답함이 느껴졌다.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침착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시를 통해 내 고민을 함께 나누는 기분이랄까. 어딘지 모르게 격려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칸나’를 보고 충격을 받고 나서는 줄곧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어쩌면 시를 쓰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내 혓바닥은 고름들로 퉁퉁” 부어올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칸나를 보고 있었다.”라고 말하는 화자의 시선에서부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가. “오늘도 쓰려고 애쓰다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은 ‘칸나’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내가 ‘칸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온갖 자극적인 수사들이 “시커먼 화산재”나 “뜨거운 용암”의 이미지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다른 누군가의 ‘칸나’에서 나온 미문이나 은유일지도 모른다. 이는 유혹이라기보다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칸나’는 고요하다. 시간이 흘러도 그 자태는 “이제는 굳어버린 불의 돌”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새카만 현무암과 멋있게 어우러지는 ‘칸나’의 붉은색.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시를 쓰는 이유는 ‘칸나’의 저 초연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칸나인 것처럼 쓰고 싶었다. 칸나 속으로 들어가서 칸도 없고 나도 없는 칸나의 마음으로 말이다.”

 

칸나 속에는 ‘칸’이라는 것이 부재한다. ‘칸나’를 쓰고자 하는 ‘나’도 없다. 자유롭고 제재가 없으며 모든 것이 열려있다. 그 공간의 마음으로 글을 쓴다면 ‘말의 저편’에 있는 ‘칸나’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칸나’는 ‘말의 저편’에 있는 존재이며 나는 ‘말의 저편’을 좇는 자이다. 시간이 흘러도 ‘칸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지 않던가. 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칸나’에 대해 제대로 쓸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칸나’인 것처럼 쓸 수는 있을까. 오늘도 내일도 애만 쓰다가 그만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칸도 없고 나도 없는” 그 마음이라면 오늘보다 더 잘 쓸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칸나’가 썼다는 ‘칸나’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다. 한 번에 썼다는 ‘칸나’의 소문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오래도록 “꽃 붉은 칸나”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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